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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트로덕션>과 <당신얼굴 앞에서>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트로덕션>과 <당신얼굴 앞에서>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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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스물여섯 번째 영화 <당신얼굴 앞에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많은 변화를 맞이한 영화이다. 큰 변화라고 한다면 홍상수 감독의 열일곱 번째 영화부터 계속해서 출연하고 있던 김민희 배우가 더 이상 극을 끌어가는 중심인물로 등장하지 않고, 촬영과 편집까지도 모두 홍상수 감독이 맡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도망친 여자> 이후 촬영 순으로는 <당신얼굴 앞에서>와 <인트로덕션>, 개봉순으로는 <인트로덕션>과 <당신얼굴 앞에서>, 두 영화가 그렇게 진행되었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다시 변화하게 될지 홍상수 감독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가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두 영화는 ‘김민희’라는 페르소나의 등장을 홍상수 감독 영화의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기존의 관점에 비추어볼 때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페르소나의 등장과 변화

‘김민희’라는 페르소나의 등장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녀가 등장하는 일곱 편의 영화마다 그 내적인 변화는 모두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일말의 진실을 담아 그 영화들의 공통된 변모를 추상적으로나마 이야기해 볼 수 있다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세상을 비춰왔던 방식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홍상수 감독은 거울처럼 세상을 비춰왔다. 그런데 그 거울은 때로는 사람들을 길게 늘이고 구불구불한 걸음걸이를 걷게 만드는 왜곡된 거울들이었고, 때로는 반투명의 거울이라서 흐릿하고 일렁거리게 우리를 비추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비춰진 세계는 마치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사실적인 외관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세계는 촘촘하게 직조된 순전히 인위적인 세계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우리에게 삶을 말한다. 삶을 그대로 비추는 투명한 거울보다도 더 아프게 쿡쿡 찌르면서, 우리가 애써 붙들고 있는 온갖 가식과 인위적인 노력들을 들추어내면서. 그래서 마치 술에 취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머리를 쥐고 일어났을 때, 할 수 없이 돌아오는 기억에 어제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어제의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완전히 낯선 타인처럼 느껴지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그런 존재들.

그런데 ‘김민희’라는 페르소나가 등장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변화를 맞는다. 우리의 비유를 이어나가보자면, 투명한 거울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홍상수 감독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고, 홍상수 감독과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김민희’라는 페르소나의 등장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때로는 항변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절절한 감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영화가 삶과 너무 밀착되어 버린 나머지 그의 영화는 왜곡과 반투명과 벗어버리고 투명하게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이상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에게서 타인처럼 느껴지는 어제의 나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타인인 누군가의 삶을 보게 되기도 했다.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아름답지만 그들은 내가 될 수 없는 타인들이었다. 나는 숙취 같은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들은 여느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삶에 관한 진실의 파편들을 드러내고, 퍼즐처럼 그것들을 맞추어보게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다.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선택도, 그들의 부끄러움도 나의 몫이 아니다.

 

또 한 번의 변화

어떤 것이 더 좋을까? 이 변화는 옳은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아니, 답해질 수 없는 질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답해질 수 없는 질문들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다시 분기점을 맞이했다. 그의 영화는 소설의 도입부처럼(<인트로덕션>), 또 한 편의 단편 소설처럼(<당신얼굴 앞에서>) 변화했다. 앞서 이야기한 큰 변화, ‘김민희’라는 페르소나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또 소설처럼 촬영과 편집까지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쓰여진다는 것도 이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인트로덕션>의 세 이야기는 소설의 도입부들처럼 보인다. 아들(신석호)을 부르고서는 한없이 기다리게만 하는 아버지(김영호)와 아버지를 기다리며 선잠에 빠지는 아들의 이야기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은 그려지지 않는다. 아들은 어떤 꿈이든 꿀 수 있고, 아버지와는 어떤 대화도 할 수 있으며, 그들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독일로 유학을 가는 딸(박미소)과 그녀의 어머니(서영화)가 딸을 머물게 해줄 친구(김민희)의 집에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의 아들이 두 번째 이야기의 딸을 찾아온다. 딸은 어떤 꿈이든 꿀 수 있고, 어디에든 갈 수 있으며,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의 아들과 그의 어머니(조윤희), 그리고 연극배우(기주봉)의 만남이 그려진다. 아들은 연극배우의 조언처럼 할 수도 있고, 어머니를 더욱 걱정시킬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꿈이든 꿀 수 있다. 이야기들은 모두 단지 시작되었을 뿐이다. 호텔의 발코니에 서 있는 어머니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차가운 겨울 바다에 온몸을 흠뻑 적신다. 어떤 예감들만이 있을 뿐, 어느 것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로 단지 시작되었을 뿐이다. 시작되지 않지는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한 도입이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체홉의 단편 소설처럼 진행된다. 죽음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온 상옥(이혜영)은 동생(조윤희)의 집에 머물며 동생과 조카(신석호), 자기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살던 옛집을 방문한다. 자기가 떠났던 것일까, 그들이 떠나보낸 것일까. 과거의 시간들은 그대로 두고 상옥은 삶의 감사함을 되뇐다. 그러고 나서 또 한 사람의 자기의 이미지를 기억하는 영화감독(권해효)을 만나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이 남자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동생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죽음이 어쩐지 홀가분하게 꺼내어진다. 그리고 여지없이 이어지는 헤어짐과, 받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편지를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떨쳐버리고,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광채가 있다. 자살을 결심했던 열일곱의 상옥이 서울역 앞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광채가 거기에 있다. 얼마든지 핥아줄 수 있었던, 하나도 더럽지 않았던 얼굴들. 그렇게 삶은 다시 미지근한 온기를 띠고 돌아온다. 살아있음을 알려오는 온도. 그 온도는 식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을 테지만. 삶은 체홉의 소설처럼 소름끼치도록 잔혹하고, 그러나 희극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타버리고 남은 온기를 가지고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이 두 영화에는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자전적인 요소가 분명 들어있을 것이다. <인트로덕션>은 그의 삶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젊은 시절의 어떤 순간들이기도 하고,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영화감독은 영화감독인 자신을 비추고, 상옥의 입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허구의 옷을 입은 이 두 영화는 더 이상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얇은 막 하나를 씌운 것처럼 희미하고, 그래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사실들과 기억들은 변형되고 변주되어서 우리에게 삶에 대해 묻는다. 당신들의 시간들은 괜찮은가, 그렇게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 감독의 최근 두 영화는 중요한 변곡점을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하고 세심하게 그의 영화는 여전히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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