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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와 비인간을 위한 무대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와 비인간을 위한 무대
  • 양근애 l 문화평론가
  • 승인 2021.12.0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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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너머의 비명들

연극은 인간 미디어(가 아니)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무대 위의 주인공을 자임해왔다. 극장에서 우리는 무대 위의 인물을 본다. 인물이 연기하는 인간을 통해 인생에 대해 깨닫는다(고 생각한다). 극장에 가는 상상을 해보자.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에 밝은 조명이 비치면, 그럴싸한 무대 장치 안에 의상을 차려입고 분장을 한 배우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이윽고 그가 내뱉는 대사와 유려한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다. 마법과도 같은 연극의 시작이다.

객석에 앉아 있는 나의 현실은 잠시 잊고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세계에 몰입하는 일, 극 중 현실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무대 위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 그것은 극적 ‘환영(Illusion)’에 드는 과정이다. 물론 모든 연극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본질을 떠받치는 모든 질서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연극은 환영 대신 실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연극은 현실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현실과의 거리와 괴리를 의식하면서 극장 바깥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극의 ‘주인공’ 하면,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니나, 바냐, 노라,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 등 고유한 인간의 이름들이 먼저 떠오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나 <새>처럼 코러스로 등장한 동물이나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에 등장하는 소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연극은 인간 중심의 장르로 발전해왔고 드물게 동물이나 로봇과 같은 비인간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를 의인화와 우화의 형식, 즉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그려왔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재현’으로 연극을 단순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탈근대적 인식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인간을 주체로 놓고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이해함에 있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듯하다. 베르너 파울슈티히가 미디어의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연극을 가장 오래된 인간 미디어로 파악한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주체에 대한 믿음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동물퍼포먼스’와 같은 실천이 있었지만, 여전히 무대는 비인간을 문학적 은유나 기호로 파악하면서, 타성에 젖은 채로 질문을 게을리해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기후위기와 인류세의 위협 속에서 더는 물러설 데가 없어진 요즘, 인간 역시 객체이며 사물이나 동물과 같은 비인간 역시 행위자로 보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국립극단에서 제작한 ‘여기는 당연히, 극장’(여당극)의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지금-여기를 가리키면서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될 리 없는 연극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게 한다.

 

로드킬인더씨어터 국립극단

라이카, 고라니, 비둘기, 그리고 죽음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이 세계의 주인을 자임해왔다.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을 구분하는 것이 근대 역사의 출발이었다. 어느새 인간은 지구의 생태계를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됐다. 인간으로 인한 지구의 변화가 결국 인간을 향한 위협으로 돌아온다는 경고로 과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지질학적 연대를 주장했다. 공식적으로는 빙하기가 끝났음을 알린 흔적을 바탕으로 한 홀로세(Holocene)에 살고 있지만, 인류세의 역설은 환경 문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을 만든 여당극은 그동안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등 극장 바깥의 사회적 이슈를 무대 위로 가져오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최근 재공연을 올린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트랜스젠더 프라이드를 잘 보여준 연극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오직 관객만을 위한 두산아트센터 스트리밍서비스공연>은 팬데믹 이후 온라인 공연을 모색하는 흐름에 대항하며 무대 위의 배우들이 마스크를 쓰고 재연과 재현 사이의 모순을 오갔다. <7번 국도>부터 수어통역, 문자통역, 화면 해설 등 배리어프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의미 있는 행보다. ‘극장’을 강조한 극단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여당극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장소를 의미화한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동물을 전면화한 연극으로, 역시 ‘씨어터’에 방점을 찍으면서 인간의 시선에 의해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 아니라 인류와 함께 지구에 살아가는 한 존재로서 동물을 무대 위에 세운다. 연극에 등장하는 동물은 아주 많지만 특히 라이카, 고라니, 비둘기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명동예술극장에서의 3시간을 지루할 틈도 없이 오직 동물-주체들의 세계로 가득 채웠다.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는 열한 명이지만 하나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배우들은 서른 개에 달하는 역할을 나누어 발화하고 움직였다. 두 명의 수어통역사는 연극의 바깥에서 추가되거나 연극을 보완하는 방식이 아닌, 연극의 중요한 일부로서 배우들과 무대 위에 함께 존재했다. 동물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실제 동물이 아닌 배우라는 인간을 통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면서, 인간의 시선을 통해 본 동물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을 배우가 발화하고 움직였다.

라이카, 1957년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세계 최초로 지구 궤도에 진입한 개. 모스크바 시내를 떠돌다가 발탁돼 각종 테스트와 훈련을 거쳐 우주공간의 생존 여부를 실험하기 위해 날아간 개. 원래 이름은 쿠드랴프카. 알비나와 무슈카를 제치고 최종 선발된, 우주로 나간 뒤 지구를 네 번이나 돌면서 고온, 고음, 고진동을 견디지 못해 일곱 시간 만에 죽었던 개. <로드킬 인 더 씨어터>에 나오는 라이카의 이야기다. 라이카는 ‘우주 실험동물’로 유명해져 수천 개의 노래, 영화, 책 등에서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극에 등장하는 라이카는 동물의 은유이기도 하지만, 라이카의 실체로서 출현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해석하고 느끼며 무엇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당사자의 언어로 발화한다. 라이카 이후에도 소련은 개 50여 마리를 우주선에 태우는 실험을 했다. 연극은 스푸트니크 5호를 타고 갔다가 하루 만에 무사히 돌아온 벨카와 스트렐카의 존재도 잊지 않는다.

매일 한 마리꼴로 죽는다는 고라니. 연극은 고라니의 죽음을 인간의 시선에서 묘사하지 않고 질문한다. “나는 왜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 차의 소리를 보지 못했는가./ 나는 왜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 차의 빛을 듣지 못했는가.”(1) 그리고 이 질문은 “당신들이 여기서 굳이 듣고 보고 있다고 믿는, 구체적이면서 감각적이고 살아 있는 듯, 때로는 핍진하고 처절한 동시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잔인하고 지독한 그 풍경의 묘사를 죽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나.”(42)라는 ‘재현’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당시, 성화 점화 때 함께 불타오른 비둘기의 이야기도 겹쳐진다. 말하자면 이 연극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질서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동물들의 고통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 재현할 수 없다면 그들을 대신해 어떻게 그 존재의 괴로움을 말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 산물이다. 그러나 재현이 아니라면 무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잘 알려져 있듯,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자, 아이, 소수자, 나무, 돌, 분자 등 비인간 이미지를 사유하는 방법으로 ‘-되기’를 고안했다.(2) 

여당극의 이와 같은 작업을 ‘동물-되기’로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닮기를 통한 모방이나 흉내내기가 아니라 이질적인 존재들의 침투와 변이, 생성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현이나 미메시스를 작동시켜 그로 인해 발견할 수 있는 유사성과 동일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발생하는 잠재성을 내재화하는 일,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그것을 감각적으로 무대화한 연극이다. 

 

언어를 초과하기 위해 응시하는 창

국립극단에서 발간한 <로드킬 인 더 씨어터> 대본의 책날개에는 “객석과 무대 사이의 환영을 인정하면서도 언어가 극장 안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 인물들의 발화를 고안한다”로 시작하는 구자혜 작가, 연출의 소개문이 실려 있다. 여당극식 화술이라고 할 만한 배우들의 발화 방식을 아직 낯설어하는 관객도 많지만, 어쩌면 그 낯설고 불편한 발화 방식이 바로 ‘언어를 극장에 머물지 않게 하는’ 전략인지도 모른다.

의도적인 끊어 읽기, 감정을 배제하고 이어지는 대화, 하나의 역할을 나눠 파편화시키는 말하기, 거기에 이번 연극에서는 안마루의 연주를 무대에서 직접 들려주는 방식까지 더해졌다. 이와 같은 비재현의 방식들은 <로드킬 인 더 씨어터>를 매끄러운 환영의 세계에 끝내 진입할 수 없도록, 그리하여 고라니가 죽는 도로, 라이카가 떠돌았던 거리, 비둘기가 날아간 하늘, 그리고 우리가 풍경으로만 여겼던 수많은 죽음의 공간들을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동물-되기’를 통해 동물에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선 자리에서 시도되는 성찰적 인식을 넘어, 동물 존재가 직면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드러내는 태도의 윤리성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 점이 구자혜와 여당극의 저력이 아닐까 싶다. 연극의 마지막에 나오는 ‘맑고 투명한 창’이 있는 펜션의 이야기, ‘인생에서 다시는 못 볼, 단 한 번의 뷰’를 볼 수 있는 한없이 투명한 유리창의 이야기는 다시 타자를 ‘보는’ 문제로 우리를 데려간다. 창문은 비와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투명한 막으로 안과 바깥을 가른다. 투명해질 때까지 닦고 닦아서 종잇장처럼 얇아져 갔으나 절대 사라지지는 않았던 그 유리창(66)에 새가 부딪쳐 죽는 일. 이 죽음에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을까. 

아무리 극장 바깥의 현실을 미메시스라는 표상 없이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연극은 연극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인간이 아무리 동물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동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우리는, 유리창 너머의 비명들을 본다. 인간의 언어를 가진 우리에게 그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극장을 나서자, 시야에 들어온 존재들의 소리가 너무 크게 보였다. 

 

 

글·양근애
문화평론가,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경계에 파열을 일으키는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1) 구자혜,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국립극단, 2021, 39면.
(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의 고원』, 새물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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