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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여성의 자기서사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주라의 문화톡톡] 여성의 자기서사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2.01.10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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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구라는 거울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1부 『나의 눈부신 친구』가 2011년에 발표된 이후 전세계 독자와 평론가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후, 4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완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45개 언어권에서 1500만부가 팔리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재봉, 「‘얼굴 없는 작가’ 엘레나 페란테, 신작을 말하다」, 『한겨레』, 2020.09.07.) 이 작품들은 미국 방송국 HBO와 이탈리아 방송국 RAI의 합작으로 시리즈 드라마로 만들어져 2018년에 시즌1을 방영하고, 2020년에 시즌2를 방영하며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2021년에 왓챠에서 시즌1,2를 독점 제공하고 있다.)

엘레나 페란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폴리 4부작’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작가의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하다는 점이 대중 독자들의 호기심을 북돋우는 측면이 있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조차 필명이며, 1999년 첫 작품을 출간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매체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는 강한 신념 아래, 작품 관련 모든 인터뷰는 메일을 통한 서면 인터뷰로 진행하고 있다. 다음으로 ‘나폴리 4부작’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지역을 배경으로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의 경제적 격차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내밀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사회의 역사적·구조적 문제를 성찰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빈부격차가 공간적으로 배분되며 국가 내 지역격차의 문제로 확대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폴리 4부작’은 릴라와 레누라는 두 여성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가장 큰 매력을 찾을 수 있다. 1부 『나의 눈부신 친구』는 두 소녀의 유년기와 사춘기, 2부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청년기, 3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두 친구의 중년기, 4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노년기를 다루고 있다. 1950년대부터 60여 년간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두 여성이 어떻게 성장하며 살아나가는가를 그려내고 있다.

사실 이처럼 ‘여자의 일생’을 그려낸 소설은 많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가 그 대표적인 작품일 것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도 어찌 보면 여자의 일생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의 일생기가, 한 여성의 삶이 기존 사회 담론 안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전형적인 삶으로 귀착되는 이야기를 남성작가의 시각으로 담아냈다면, ‘나폴리 4부작’은 개별 여성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 진짜 성장담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허구에 기초한 소설의 내용을 ‘진짜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나, 이 소설 자체의 허구적 개연성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뛰어넘는 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폴리 4부작’은 릴라와 레누 중에서도 레누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레누는 작품의 초점화자이자 주요 인물이다.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 레누가 매우 영민하고 대담해서 위험한 아이 릴라의 매력에 이끌려 두 사람이 친구가 되면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축이다. 실제로 작품 안에서 ‘나의 눈부신 친구’로 명명되는 것은 레누이다. 릴라가 레누를 보며 한 찬사인 것이다. 하지만 레누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 속에서 ‘나의 눈부신 친구’는 릴라이다. 레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제도 및 관습적 요구의 억압을 대담하게 이용하고 넘어서는 릴라를 보며 자신의 삶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근본적으로는 레누의 성장담이다.

레누의 성장은 릴라의 매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모든 성장의 서사가 첫 단계에는 조력자의 도움을 빌려 난관을 극복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조력자와의 갈등으로 조력자와 헤어진 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누 또한 릴라가 없으면 자신의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하던 시기를 지나, 릴라가 아예 사라진 후 릴라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써보기로 결심한다. 릴라의 실종으로 릴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 이 소설의 첫 장면이자, 릴라와 자신의 우정을 상징했던 인형을 소포로 받아 보면서 우정의 끈이 끊어졌음을 인지하는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 시즌2 포스터 Ⓒ왓챠
나의 눈부신 친구 시즌2 포스터 Ⓒ왓챠

2. 사랑이라는 확인

이렇게 보면 여성의 성장, 그리고 그 성장의 일대기를 쓴다는 것도 보편적인 성장의 서사에 쉽게 편입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폴리 4부작’은 여성의 성장이 사회의 전형적인 성장 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잉여들을 남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들이 경험하는 잉여는 한편으로는 일반적 입사 과정에서 의미 있는 것을 획득하지 못하는 과소(過少)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어진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과잉(過剩)이기도 하다.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를 살아갔던 릴라와 레누가 겪었던 부족함은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었다. 릴라는 빈곤한 경제적 환경 때문에 일찍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보조하는 착한 아내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릴라는 이 역할 속에 주체로서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반항한다. 대학 교육까지 마치고 결혼을 통해 상류층 사회에 안착한 레누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가로 성공한 레누는 결혼 이후 육아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생각과 언어를 정리하지 못하는 혼돈 상황에 빠진다. 하층이든 상층이든 경제적 조건과는 관계없이 이들의 삶은 가부장제에 사로잡히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참 이상하게도 이 두 여성이 자신의 삶을 찾기 시작하는 것은 열정적인 사랑을 통해서이다. 둘 모두 니노라는 자유분방한 지식인 남성을 사랑하면서 기존에 자신을 억압하던 가정에서 탈출한다. 니노는 가부장의 억압 하에 숨겨진 여성의 재능과 매력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레누는 육아에 사로잡혀 소설을 쓰지 못한다. 자신의 경험이 사회의 공적 담론 안에서는 주목받지 못하고, 그래서 스스로의 삶과 경험이 가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를 공적인 언어로 발화하지 못한다. 그런데 니노는 여성의 삶이 남성의 삶에 종속되어 있다고 여기는 레누의 입장을 지지한다. 레누는 니노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얻고, 드디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한다. 나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랑은 나의 주체성을 완성하게 한다.

이것이 로맨스를 통해 여성이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방법이다. 근대 초기부터 낭만적 사랑은 자기 주체성을 찾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을 나의 부모는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부터, 봉건적 가족 제도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고, 나의 감정과 쾌락을 우선시하는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너와 내가 다름을 인지하고,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중요한 기제이다. 근대 초기 남성 작가들 또한 낭만적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에 집중하였다. 19세기가 낭만주의의 시대였던 이유다. 20세기에 들어서 로맨스 장르를 통해 여성들 또한 낭만적 사랑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며, 주체적 개인으로 거듭난다. 여성들에게 낭만적 사랑 이야기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로맨스의 독서 과정이 바로 자기 주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의 서사는 양면적이다. 로맨스 이야기는 여성의 자기 인식과 성장을 시작하게는 하지만, 여성의 삶을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으로만 제한한다. 또한 여성의 욕망을 남성의 인정이라는 테두리 속으로 종속시킨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공고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사랑이 결혼으로 귀결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랑은 사회적 파멸이기도 하다. 릴라와 레누를 억압적인 가정에서 해방시킨 니노는 결국 자신의 사랑에 책임지지 않고 순간의 쾌락만 쫓는 바람둥이였다. 가정에서 해방되었으나, 가정이 아니면 여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사회 속에서, 릴라와 레누는 사랑을 떠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근본부터 다시 질문을 던져야 했다. 여성에게 사랑의 서사는 남과 다른 나의 가치를 처음으로 발견하는 계기는 되지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한다.

 

나의 눈부신 친구 책표지 Ⓒ한길사
나의 눈부신 친구 책표지 Ⓒ한길사

3. 나의 쾌락 찾기

그렇다면 무엇이 여성이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것인가. 18세기 후반부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같은 소수의 선각자들이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였으나, 여성의 공적인 권리 주장을 넘어 여성의 내밀한 자기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1960년대를 즈음해서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은 십대 소녀의 내밀한 욕망과 사회 비판을 도발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얌전한 소녀라는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실제 소녀의 내면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여성 스스로의 욕망을 말하려는 많은 소설들이 창작되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1960년대 초반에 ‘한국의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별명으로, 최희숙, 신희수, 박계형과 같은 여대생 작가들이 여대생들의 욕망과 고뇌를 대담하게 고백하였다.

‘나폴리 4부작’에서 레누가 발표한 첫 번째 소설도 바로 1960년대에 출간된다. 소설 내에서 서술되듯이, 첫 소설을 발표한 레누 또한 ‘이탈리아의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소개되며 평단의 관심을 받는다. 레누의 소설은 짐작컨대 ‘나폴리 4부작’과 동일한 여성의 성장담일 것이다. 레누는 자신의 경험이 첫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서술한다. 심지어는 친구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성적 경험들도 적혀 있다. 레누의 첫 성경험은 니노의 아버지이자 바람둥이 시인 도나투와의 관계였다. 니노와의 사랑이 어그러지자 레누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에게 추근대는 도나투에게 몸을 맡긴다. 육체적 쾌감에 흥분한 도나투와 달리 레누는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라는 진술은 사실 여성의 자기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성의 시각에서 묘사된 남녀의 성관계는 쾌락의 절정을 모든 인간에게 가져다줄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열정적이고 낭만적 사랑은 자기 자신을 넘어 무아의 경지를 제공하고,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갈 것처럼 여겨진다. 남성에게 사랑은 이러한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 순간적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성장 서사에서 남녀의 성관계는 ‘아무런 쾌락이 없었다.’ 레누의 소설을 읽은 여자인 친구들은 레누에게 다가와서 은근히 이야기한다.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어. 남편하고의 관계에서 아무 것도 못 느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니노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릴라조차 니노와의 성관계가 즐겁지 않았다고 말한다. 레누조차 남편과의 사랑이 즐겁지 않다. 의무적인 절차처럼 진행된다.

이런 여성들에 대해서 남성들은 쉽게 ‘불감증’을 이야기한다. 레누의 첫 소설이 출간된 이후 니노는 릴라에 대해서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레누에게 말한다. 레누는 처음에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릴라가 성관계가 고통이라는 말을 한 이후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게 된다. 니노와의 관계에서 릴라는 쾌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니노는 이를 릴라의 문제라고 전가한다.

여성 불감증의 문제는 의외로 여성 주체성 형성의 중요한 지점을 상기시킨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도 유명한 불감증 스캔들이 있었다. 근대 초기 여성 문인 김명순을 둘러싼 스캔들이다. 김명순은 초경도 시작하기 전에 성폭력을 당하였다. 그 후 그녀는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사회적 활동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녀의 사회적 삶은 문학적 인정을 받기보다는 문학적 대상으로 소모되었다. 쉽게 순결을 잃고 아무 남자와 놀아나는 타락한 신여성의 대표가 된 것이다. 남성 작가들은 김명순을 모델로 소설을 쓰면서 김명순의 삶을 부정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김동인의 「김연실전」이 그 대표작이다. 「김연실전」에서 김동인은 김명순이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그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남녀가 그저 하는 일이거니 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서술한다. 이 서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악랄하다. 첫째는 폭력적인 성행위를 여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지점이며, 둘째는 여성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하며 여성의 욕망을 소거하는 지점이다.

여성이 불감증인 이유는, 여성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신의 쾌락 발산에만 집중하는 남성에게는 아무런 반응 없는 여성이 불감증처럼 여겨질 수 있다. 남성 삽입만이 쾌락의 전부라고 여기는 남성 중심적 관계에서는 여성의 쾌락이 삽입의 영역 너머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러한 관계맺음은 여성의 존재를 단순한 구멍으로 축소시킨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라는 발화는 남성의 쾌락을 중심으로 배치된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성의 첫 번째 선언이다. 남성의 욕망만을 충족시켜주는 관계에서는 여성 스스로는 어떤 쾌락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신의 쾌락을 찾아나가야 한다. 1990년대 스위스에서 여성 투표권을 획득하려는 주부들의 투쟁을 다룬 <거룩한 분노>라는 영화 속에서도, 여성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가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쾌락을 찾는 과정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대부분의 여성은 불행하게도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무 것도 못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남성이 판단하는 여성 불감증이 아닌, 여성 스스로 발화하는 여성 불감증은 전복적이다. 남성의 성적 능력 및 팔루스 중심의 가부장제를 무력화시키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성관계 속에서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신했던 남성들은 자신이 한 번도 아내를 만족시켜 준 적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남성의 쾌락은 남성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쾌락도 여성의 것이다. 여성의 쾌락이 남성에게 종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여성의 자기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이다. 여성의 쾌락을 찾을 수 있어야지만 여성을 둘러싼 모든 관계를 재조정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남성과의 즐거운 연애도 이때에야 가능해질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즐거움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그 즐거움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소통할 때 상호 주체성에 기반한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글·이주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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