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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위기 맞선 독자와의 연대
민주주의 위기 맞선 독자와의 연대
  • 세르주 알리미 | 프랑스판 발행인
  • 승인 2009.10.06 11: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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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izon]
‘르 디플로’, 더욱 충실한 저널리즘 추구할 터
독자 자발적 재정 참여만이 미디어 미래 보장

오늘날 언론사 편집국들을 황폐화하고 신문 가판대를 한산하게 만들고 있는 암담한 경제 태풍이 도래할 것이라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20년 전부터 경고해왔다. 하지만 원인을 분석했다고 영향까지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역시 그러한 악천후의 결과를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 다른 언론사들보다 강도는 약하고 방식도 다르지만 말이다. 즉, 생존이나 독립성이 위태롭지는 않으나 발전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한 상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래를 밝히고 ‘사상전쟁’에 온전히 참여하며 새로운 독자에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께 도움을 청한다.

섬유, 철강, 자동차 산업… 그리고 이제는 언론의 차례다. 선진국 노동자는 생산기지의 개발도상국 이전에 따르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자도 독자가 인터넷으로 넘어감에 따라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이를 두고 그저 하나의 경제모델이 또 다른 경제모델에 밀려나는 것뿐이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바퀴는 굴러가게 마련”이라며,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며 한숨지으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다. 자동차는 대체 불가능한 공공재가 아니라 상품에 불과하다고들 말한다. 다른 곳에서 다른 식으로 생산할 수 있으며 다른 교통수단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크게 심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언론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진정성 없는 거대 미디어의 구독 호소

언론은 공적 토론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를 꺼내들 수 있다. 존립성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 언론은 폐쇄 직전 공장의 노동자보다 훨씬 손쉽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아울러 사람들이 대의에 동조하도록 의례적인 문구만 내뱉어도 된다. “신문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민주주의도 조금씩 죽어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어처구니가 없다.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신문 가판대에 가보면 수십 종의 신문들이 자취를 감추더라도 민주주의가 타격받지 않으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지구상 수십억 명의 노동자가 고용에 따른 임금 제공 말고는 자신의 일자리 보존을 위해 굳이 다른 덕목을 끌어대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론들이 괜한 우려를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언론 산업은 몇 년 전부터 기울고 있다. 저널리즘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뒤틀리고 신음해왔다. 대부분의 정기간행물들이 광고 수주와 돈벌이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던 20년 전이라고 해서 기사 내용이 찬란했던가? 미국에서 ‘권력 감시’가 절정을 이뤘던 워터게이트 시절에 비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개닛> <나이트라이더> <다우존스> <타임스미러>와 같은 거대 언론들이 20배에 달하는 수익을 기록하던 시절은 어떠했던가?(1) 그런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30~35%에 달하는 연간 마진을 올리던 때라고 해서 이들의 저널리즘이 과감하고 창의적이며 독립성을 지키며 전개됐던가?

프랑스의 경우, 언론재벌인 라가르데르와 부이그가 엄청난 돈을 주무르며 <TF1>의 경영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당시 과연 비평적 정보가 최우선시됐던가? 민영 방송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해 천박함의 경연을 벌이면서 고분고분한 소수의 방송인들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공하던 시절은 또 어떤가? 그런데 이제는 수많은 언론사 대표들이 폭풍우 앞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는, 예전 같으면 ‘젖먹이 엄마 국가’라 경멸적으로 부르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정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며 손을 내미는 형국이다. 물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현재의 고난을 일정 부분 자초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그들의 것과는 다른 언론관을 지속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독자에게 우선적으로 호소하려 한다.

거대 언론사 ‘탈선’이 독자 무관심 초래

미디어가 겪고 있는 고충에 대해 상당수 국민이 무관심한 이유는 그들이 적어도 한 가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 강조가 결과적으로는 미디어 소유주들의 이익 추구에 방패막이 구실을 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대안 미디어 사이트 ‘카운터펀치닷컴’(counterpunch.com)의 공동 창설자인 알렉산더 코크번은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지배력을 가진 신문들이 사회·정치 상황 개선을 위한 노력을 가로막거나 훼방놓고 있다”고 평가했다.(2) 점점 희귀해지는 언론사 주도의 취재 및 보도들은 ‘조사 저널리즘’의 탈을 쓴 픽션일 따름이며, 다른 지면들도 각종 사건·사고, 유명 인물 동정, 소비·날씨·스포츠 섹션, 문인들의 친목 도모 소식 등으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갈수록 수준이 낮아지는 인력들이 그저 통신사가 제공하는 속보를 복사해서 붙여넣는 행태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대학교수인 로버트 맥체스니의 말을 들어보자. “정부가 언론의 국제관계 기사 비중을 갑자기 줄일 것을 요구하는 시행령을 마련하고 현지 연락사무소를 폐쇄하며, 인력 및 예산을 대폭 삭감하도록 강요한다고 상상해보라. 대통령이 각종 미디어에 명령을 내려 집권 세력이 연루된 스캔들을 취재하는 대신 인기인들과 가십에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한다고 한번 상상해보라. 이러한 상황이었다면 저널리즘 교수들은 진작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대학들은 항의시위 때문에 휴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리는 민간 이해집단들이 이와 거의 유사한 결정들을 내리는 현 상황에서는 별달리 주목할 만한 반응을 찾아볼 수 없다.”(3)

맥체스니 교수는 이러한 자신의 정신생태학적 훈련을 확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늘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니 하는 말인데, 광고 수입으로 먹고살며 이익 극대화에 여념 없는 소수의 초대형 기업들을 우리의 주요 정보 제공자로 삼자고 도대체 언제, 어느 기회에, 어떤 중요 선거를 통해 결정했던가?”

1934년 프랑스 급진당의 지도자였던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자신들의 측근을 권좌에 앉히며 언론을 장악해 여론에 개입하는 200개 가문”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로부터 75년이 지난 지금, 유사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의 수는 20개도 안 되지만 그 범위는 지구 전역으로 확대됐다. 머독, 볼로레, 베텔스만, 라가르데르, 슬림, 부이그, 베를루스코니, 시스네로스, 아르노… 새로이 등장한 세습봉건 세력은 종종 정부의 권력을 능가하곤 한다.(4) 만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이들 중 어느 한 곳에 의존해 있었다면 과연 라가르데르의 출판계 장악이나, 아르노의 직원들에 대한 처우, 볼로레가 아프리카에 소유한 농장에 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까?

저널리즘 말살 주범은 언론 그 자신

세르주 쥘리는 자신이 창간한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지분을 에두아르 드로실드가 인수한 후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혔다. “에두아르 드로실드는 내가 직무를 중단할 뿐만 아니라 아예 신문사를 떠나는 조건하에 재정 참여를 수락했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5) 주주가 데려온 세르주 쥘리의 후임자가 오늘날 언론 자유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작금의 모든 문제가 저 몹쓸 인터넷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저널리즘을 말살한 것은 인터넷이 아니다. 저널리즘은 이미 오래전부터 구조조정, 편집 마케팅, 서민층 무시, 갑부 및 광고인들의 언론 장악 등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걸프전(1991)에 참가한 연합군이나 코소보 사태(1999) 당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지껄이던 허튼소리를 널리 퍼뜨린 것은 인터넷이 아니다. 게다가 1989년 미국 저축대부조합의 몰락을 알리고 그로부터 8년 뒤 신흥국가들의 패주를 짐작하며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부동산 버블을 예측하는 데 실패한 거대 미디어들의 무능력을 인터넷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벨기에의 아동성범죄자 우트로 사건이나 파리 수도권 지하철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범죄를 맹렬히 비난하는 것 또한 인터넷의 몫이 아니다. 정말로 ‘언론을 살리려’ 한다면 믿을 만하며 독립된 정보 전달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공적 자금이 쓰여야지 이것이 가십이나 유포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주주의 경제활동과 이른바 ‘유연한 두뇌’ 장사는 다른 곳에서 재원을 찾아야 한다.(6)

인터넷에 가해지는 비난들을 보면 지식 습득과 정보 전달 방식에 대한 타당한 우려 이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 논평을 장악한 몇몇 거물들의 권위가 끝나가는 데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이들은 봉건적 권력을 누리면서 영지를 차지하고 각종 직함들을 쥐락펴락했다. 장관직과 명예를 줬다 뺏었다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부랴부랴 대충 써낸 저서나 미사여구로 장식한 논단에도 사람들은 하나같이 열렬한 칭송으로 호응해줬다.(7) 군데군데 몇몇 무엄한 신문들이 포위당한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이 이 논객들의 키보드를 가져가버린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겠다. 급작스런 언론계의 판도 변화에 따른 혼란에서 본지도 예외가 아니다. 1996년부터 2003년 사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가판대 판매는 이후 지난해까지 크게 후퇴했다. 구독자 수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총 판매 부수는 실질적으로 위축돼 본지가 <르몽드>의 계열사가 된 1994년 당시 수준까지 떨어졌다. 물론 73개국에서 발행되며 약 200만 부의 판매 부수를 기록하는 국제판(1994년 이탈리아판이 시초)과 본지 인터넷 사이트의 수십만 독자까지 합한다면 전반적인 인지도는 현저하게 개선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독자와 수입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판매 부수와 구독자 수는 본지의 주요한 두 가지 재정상 주춧돌이다.(8) 네티즌은 본지의 영향력에는 기여하지만 정작 그 존립에는 별다른 구실을 못한다. 그들 중 이 두 수입 창출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은 표를 제대로 구입한 승객들이 지급한 비용으로 전 여정에 걸쳐 무임승차하는 불법 여행객들과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해 많은 신문들은 독자의 취향을 예측해 콘텐츠를 맞추는 방안을 택했다. 그 방향은 진작 알려진 대로다. “그들은 짧은 기사 및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뉴스를 선호한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생활의 편리를 더해줄 정보를 찾는다. 머리기사만 대충 훑어보는 데 그치는 만큼 국제 정세에 대한 장황한 글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RBS 그룹에 속한 브라질 일간지 <제로호라>의 배포 담당부서는 120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당일 신문에 관한 의견을 조사했다. 오후 1시에 마르셀로 레흐 편집장에게 제출된 보고서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요리와 부동산에 관한 더 많은 특집기사를 실어주길 바라며, 헤즈볼라나 지진에 관한 기사는 별로 원하지 않는다.’”(9)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신문을 찾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는 사회적·국제적 질서를 이루는 주요 장치들을 까발려봤자 충분한 반향과 정치적 연계가 부족해, 결과적으로는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고, 본지가 겪고 있는 독자 이탈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는 독자가 ‘그래서 제안하는 게 뭔데?’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지금은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는데?’라는 질문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의 경우 본지에는 별로 해당 사항이 없었다. 워낙 각종 제안과 생각할 거리가 지면에 넘쳐났으니 말이다(제3세계 부채 탕감, 국제기구 개혁, 금융거래 대상의 토빈세, 은행 국유화, 일부 자본 수입에 대한 ‘조세 단두대’, 연대경제 및 비상품성 영역의 개발 등).

<르 디플로>의 미래는 바로 여러분

확실한 것은 대안 세계화가 퇴보하면서 우리가 다른 언론사들보다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됐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의 지적 헤게모니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으나 토론의 틀은 급속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비판만으로 불충분할 뿐 아니라 제안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이다. 사회질서는 ‘해체’하기만 하면 저절로 재구성되는 텍스트가 아니다. 많은 사상들이 현실 세계에 조금씩 흠집을 내고는 있지만 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본지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 세상사가 우리의 공통된 희망에 걸맞게 흘러가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 때문에 맥이 빠진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어찌됐든 우리는 어떤 확신을 바탕으로 본지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여러분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다. 지금으로서는 가격을 올릴 계획이 없다. 빈곤국가에서 낮게 책정된 금액도 그대로 유지할 방침이다. 새로운 국제판 발간도 도입 단계에 우리에게 판권료를 지급하는 조건만을 내걸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젊은 층을 공략하며 본지의 지적·정치적 가치를 전수하는 데에도 힘쓸 것이다. 아울러 기자·연구원·군인들에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분쟁, 위기, 대안운동, 실험적 활동에 대한 대대적인 보도와 취재를 더욱 많이 의뢰할 방침이다.

우리가 앞으로도 발전을 계속하려면 여러분의 재정적 참여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가판대에서 본지를 더 꾸준히 구입하거나 정기구독을 신청할 수도 있고, 잠재적 독자에게 구독을 권유하거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친구들’ 협회에 가입하는 등 여러분이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은 다양하다. 그리고 얼마 전 도입된 새로운 장치도 있다. 본지에 기부금을 낼 경우 납부액의 66%를 세금에서 감면해준다. 은행들을 돕는 데 사용되던 공적 자금이 마침내 이들의 비리 조사에 쓰이게 된 셈이다.

다른 신문들과 비교하면 본지의 적자액(2007년 33만 유로, 2008년 21만5천 유로)이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문화 진흥에 동참하려는 열의로 불타는 한가한 은행가라도 이러한 손실을 선뜻 메워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전 직원이 주주일 뿐만 아니라 독자 또한 지분의 일부를 보유하면서 재원이 부족한 도서관과 교도소를 위해 연대 구독을 신청해주며 발행인도 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본지와 같은 신문이라면 어느 은행가도 내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은 단순하다. 세계로 향한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에 지속적인 재정 지원을 하며, 잠비아 광부들과 중국 해군, 라트비아 사회를 다루는 데 2개 지면을 할애하는 이가 과연 우리 말고 누가 있겠는가? 본지라고 해서 결점이 없지는 않지만, 필자들이 여행을 하고 취재를 하며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보고 듣도록 장려한다는 점은 인정해주었으면 한다. 본지를 만드는 기자들은 세기의 만찬에 초대받은 적도 없고 제약업계의 로비나 포장회사들의 사정을 두고 타협하지도 않으며 거대 미디어들과 모종의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 거대 미디어는 타 언론사의 새로운 기법은 나오는 족족 따라 하고 자신들의 이른바 ‘북 리뷰’를 독자의 쉼터처럼 꾸미면서도 정작 유례없는 세계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줄기차게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 사실 이는 본지의 독창성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 셈이기도 하다.

그 대신 우리는 다른 곳에 수많은 공모자들을 두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친구들’ 협회가 존재하는 덕분에 우리는 편집의 독립성을 강화할 수 있으며 우리가 다룬 주제들을 중심으로 매달 수십 건의 토론회도 개최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신문이 제대로 진열되도록 신경써주며 이따금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하는 가판대 상인들이 있고, 학생들에게 본지를 소개해주는 교사들이 있으며,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를 활용해 정론을 펼치면서 이따금 본지 지면에도 등장하는 대안언론이 있다. 그 밖에 수많은 호기심쟁이, 할 말은 하는 몇몇 기자, 성질 괴팍한 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 주인공, 바로 여러분이 있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1972년부터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미국 워싱턴 DC의 민주당 본부(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의 정황이 드러나면서 이로 인해 1974년 8월 공화당 소속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1975∼89년 <뉴욕타임스>의 연간 이익은 1300만 달러에서 2억6600만 달러로 급증했으며, 같은 기간 <워싱턴포스트>의 경우 1200만 달러에서 1억9700만 달러로 늘어났다. 1989년 <개닛>은 3억970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나이트라이더>는 2억4700만 달러, <다우존스>는 3억1700만 달러, <타임스미러>는 2억98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하워드 커츠, ‘언론을 멈춰라’, <워싱턴포스트> 전국 주말판, 2009년 5월 3일자.
(2) 알렉산더 코크번, <더네이션>, 2009년 6월 1일자.
(3)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 뉴욕, 2008년 1~2월호 인용.
(4) 프랑스 제2의 부호로 LVMH 그룹 회장이자 경제일간지 <레제코> 소유주인 베르나르 아르노는 2008년 5월 자신의 아들 앙투안 아르노를 <레제코> 그룹 ‘편집 독립성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앙투안 아르노는 과거 루이뷔통 홍보담당 이사도 역임한 바 있다.
(5) 세르주 쥘리, 장프랑수아 칸, 에드위 플레넬, ‘기자들을 믿어야 하는가?’, 모르디퀴스출판, 파리, 2009년, p67.
(6) 1984년 10월에 이미 클로드 쥘리앙은 프랑스 언론 매출의 10%에 해당하는 국가 언론지원금을 비영리회사들에만 지급할 것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통해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회사들에게 “돈벌이 및 배당금 분배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게 하며” 이들의 이익을 “공익사업에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같은 정관을 택하는 신문사들은 모리배의 탐욕을 부추기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7) 인터넷 사이트(www.monde-diplomatique.fr/dossier/BHL)의 관련 기사 모음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기만’ 참조.
(8)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판 발행에 따른 2008년 로열티 수입은 총매출의 3%에 해당하는 35만 유로였다.
(9) ‘더 많은 미디어, 더 적은 뉴스’, <이코노미스트>, 런던, 2006년 8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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