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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유럽의 가장 오래된 이슬람
발칸, 유럽의 가장 오래된 이슬람
  • 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게스렝
  • 승인 2016.09.0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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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안달루시아까지,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1천년 넘게 살고 있다. 무슬림들은 오스만터키의 정복 덕택에 발칸에 정착한다. 이후 발칸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온전한 공동체를 구성하지 못한 채 제국의 신민으로 살게 된다. 이들은 오랫동안 터키 제국에 충성을 다했으나, ‘터키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반대로 주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선 터키인들로 간주됐다


2015년 10월 말 헝가리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이슬람은 유럽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슬람은 또 다른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던 규범들 전체와 관련돼 있고, 단지 우리 대륙에 수입됐을 뿐이다.” 
이런 단언에 대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의 긍정적 답변이 주의를 끌었다. 최고 종교지도자인 후세인 카바조비치는 유대교와 기독교 역시 유럽 밖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남동유럽의 고위 무슬림 성직자들은, 발칸 지역에서의 유서 깊은 이슬람 역사를 강조하면서, 원래 이민에 의해 형성된 서구 공동체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이슬람의 오래된 뿌리내림을 강조하는 것은, 발칸에 가장 오래 전부터 살아온 사람들의 권리가 가장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발칸 민족주의의 원지성(原地性)과 연관이 있다. 또 이슬람의 뿌리내림을 강조함으로써, 이슬람교를 이상한 집단으로 간주하는 이슬람 혐오증에도 반향을 일으킨다. 좀 더 미묘한 세 번째 층위의 담론은 발칸의 이슬람이, 아랍 세계·아프리카·아시아에서 나타나는 이슬람과 문화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칸의 이슬람이 가상의 유럽 정체성과 가장 잘 양립할 수 있다고 은근히 암시한다.
유럽에서 이슬람의 긴 역사는 8세기부터 시작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알안달루스 시기(Al-Andalus, 711~1492년)와 시칠리아 수장국 시기(948~1091년) 이후 이슬람은 오스만터키의 정복 덕택에 발칸에 정착한다. 몇몇 이야기에 따르면, 터키 군대가 트라키아(발칸반도 동부지방)의 에브로스 강을 건너기 이전에도(1371년), 이슬람 순회 수도승들은 기독교화 되거나 보고밀파와 같은 이단들에게 자주 유혹 당했던 지역 주민들을 개종하면서 이미 발칸 반도를 휘젓고 다녔다. 15세기부터는 오스만터키의 행정조직들이 설치됐고, 그로인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 주민들에게 이익이 됐다. 오스만터키 제국은 결코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개종을 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특히 세금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술탄은 보호를 해주는 대신에 비(非)무슬림 주민들에게 특별 세금을 받았다. 비무슬림 주민들은 소유권에서 제약을 받았으며, 민간이나 군대의 높은 지위에 접근할 수 없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개종이 신속히 그리고 대규모로 이뤄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16세기부터 대부분의 엘리트층이 개종을 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 현상을 보스니아 교회의 특수한 성격을 통해 설명하는데, 보스니아 교회는 보고밀파나 카타르파의 이원론(좋은 신과 나쁜 신을 믿고, 미사· 성사·십자가들을 거부한 종파의 중심교리)에 가까운 ‘이교도들’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런 보스니아 교회에 대해 교황 오노리우스 3세(Honorius III)는 1225년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보고밀파가 남긴 흔적들을 강조함으로써 보스니아 사료 편찬자들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오스만터키의 침입과 같은 외재적 요인의 결과라기보다는 민족적 특수성에 기인한 산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그 연관관계를 정확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개종의 신속성은 특히 가톨릭이나 그리스정교 조직의 연약성에 의해 설명된다.(1) 이슬람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뿐만 아니라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쉽게 기반을 다진 것은, AD 395년, 로마 제국의 분할선을 따라 서양과 동양의 기독교 세계 사이에 역사적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알바니아 지역에서는 개종 현상이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코소보의 상당수 마을에서는 알바니아 사람들이 비밀리에 기독교 의례를 실천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무슬림이라고 선언했다. 재산을 소유하고 물려주는 남자들은 무슬림이었지만, 어린애들에게 신앙의 기본 골격을 가르쳐주는 여성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코소브스카 비티나지역에서 오스만터키 제국의 최초 개혁 칙령인 ‘하티 샤리프 데 귤하네(장미관의 고귀한 칙령)’에 의해 1839년 선포된 종교적 관용 때문에 역설적으로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했다. 그때까지 무슬림 행세를 했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자유롭게 가톨릭 신앙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배교(背敎)는 곧바로 탄압을 촉발시켰다. 그리하여 비나크와 스투블라마을 주민들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추방당했다.(2) 세르비아나 알바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의 회고적 예측을 넘어,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이 이상한 혼합주의가 코소보의 복잡한 정체성을 해명해 주고 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에서는 강력히 조직되어 있었던 그리스정교가 술탄에 의해 ‘보호받는 공동체들’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섭상대가 될 수 있었다. 세르비아 스테판 네마냐 왕자의 아들인 셍 사바는 1219년부터 비잔틴 총주교로부터 자율교회(총주교의 명령을 직접 받지 않아도 되는 대주교 교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오스만터키의 정복 이후인 1557년, 세르비아 교회의 자율성은, 술탄업무를 대행하는 대재상 메흐메트 파차 소콜로비치의 동생 혹은 사촌인 마카리예 총주교에 의해 복권됐다. 소콜로비치 대재상 역시 보스니아-세르비아 국경 근처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런 사실들에 의해 그리스정교의 다양한 민족적 특성이 설명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무슬림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무슬림들은, 언어적이거나 ‘민족적인’ 특수한 공동체 조직들에 연결되지 못한 채, 제국의 신민이 됐다. 이런 이유로 무슬림들은 오랫동안 터키 제국에 충성을 다했고, 심지어 기독교 주민들의 민족주의에 반대했다. 기독교 주민들은, 전체 무슬림들이 알바니아어 혹은 슬라브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터키 사람들’로 간주했다.
오스만터키의 저명한 탐험가 에브리야 셀레비가 “묘사하기에 불가능할 정도로 멋진 도시”인 베오그라드를 1660년 방문했을 때, 그는 무슬림들의 집이 1만 7천 채도 안 되고 10여 개의 모스크(이슬람 사원)만을 보유한 그 도시의 예술작품들 앞에서 경탄한다.(3) 1575년 건립됐으나 현재는 2004년 3월 반(反)알바니아 폭동 때 심각하게 손상된 바이라클리 모스크만 남아있다.(4) 1804년 최초의 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나고 곧 이어 그리스의 폭동이 이어지자 오스만터키 제국이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고, 발칸반도의 무슬림 주민들의 정착공간이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인들’이 오스만터키 제국에서 떨어져나간 영토에서 신속히 축출됐던 때는, 1815년 세르비아의 2차 폭동이 벌어진 후였다. 반면에 아직 오스만터키 통제 하에 있었던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터키인들이 축출된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그리스정교로 개종시키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몬테네그로가 점차적으로 커지자, 무슬림들이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5) 1820년부터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은 지역들에서, 무슬림들은 이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 ‘전쟁국가’에서 벗어나 ‘이슬람국가’에 합류하기 위한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난민 물결을 만들어낸다. 19세기 발칸반도에서 민족주의 국가들이 점차적으로 성립하게 되자 결과적으로 대규모 주민 이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됐다.
알바니아지역 민족정체성의 형성은, 대부분의 알바니아지역 주민들이 무슬림 종파였기 때문에, 그리스정교가 따른 모델을 모방할 수 없었다. ‘알바니아주의’는 ‘오스만터키주의’와 뒤섞여 있다. 알바니아 민족주의 주창자들은, ‘전체의 조국’인 오스만터키제국에 대한 충성과 ‘개별적 조국’인 알바니아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중의 충성을 옹호했다. 18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과 유럽 내 오스만터키제국의 영토분할을 인정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된 이후, 오스만터키제국의 알바니아 영토 전역에서 온 귀족들은 1878년 6월 10일 코소보의 프리즈렌에 집결하여, 오스만터키제국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통합되고 자율적인 지역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표방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문제’는 강대국들에 의해 무시됐다. 프리즈렌 연맹은, 종교적 분파를 넘어서, 근대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최초로 표명한 것이었다. 알바니아 역사가들은, 수니파 이슬람의 역사개념과 시아파와 수피파가 공유하는 역사개념 사이에 단절이 시작된 시점인 680년의 케르발라 전투에 대한 긴 서사시 <케르벨라야(Qerbelaja)>의 저자 나임 프라셰리(1846-1900) 같은 ‘민족주의 르네상스’ 창시자들이 벡타시(벡타시는 이슬람의 수피파 운동에서 파생된 신비주의 종교를 믿는 신도이고 벡타시즘은 이 종파를 가리킴)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벡타시즘은 이처럼, 수니파 이슬람과 구별되고 민족국가의 존재를 강조하는 ‘민족 신앙’이 된다.
제 1차 발칸 전쟁이 끝난 후인 1912년, 오스만터키제국은 자국의 마지막 유럽 영토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술탄의 군대는 불가리아·그리스·몬테네그로·세르비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후퇴하지만, 알바니아 사람들은 1912년 11월 28일 해안도시인 블로러에서 자신들의 독립을 선언한다. 코소보와 마케도니아의 무슬림이 대다수인 지역들에서 몇몇 ‘터키 고위 관료들’은 발칸 연맹의 군대와 대치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무슬림들은 망명의 길을 택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 터키 내무장관은 4십만 명 이상의 난민을 수용했다고 말했다. 이 분쟁들에 의해 1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발칸반도의 무슬림의 집단이주는, 1923년 로잔 협정에 의해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주민교환이 결정되면서, 이 두 전쟁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도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와 터키 사이에 협정이 체결돼, 마케도니아, 코소보 혹은 노비 파자르 행정구역의 무슬림 20만여 명이 이주를 하게 됐다. 이주민들은 특히 이스탄불의 바이람파사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남동유럽에서 무슬림의 지리적 정착은, 종교 상호간의 동거가 모든 곳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전쟁과 주민 이동에 의해 끊임없이 재편성되어, 결과적으로 영토들의 점진적 동질화를 낳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발칸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거대 공동체들이 살아왔던 근동의 수많은 지역들에서도 20세기 말까지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내전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의 모든 국가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새로운 공산주의 정부들은 종교들을 박멸해야 할 정신박약의 징표로 간주한다. 전쟁 후 첫 10년 동안 예전의 고위성직자들이 쫓겨나고 더 타협적인 인물들로 교체됐다. 공산주의의 생산수단 공유화에 의해 전통적인 무슬림 엘리트들이 몰락했고, 또 한편으로 베일 착용을 금지하기 위한 ‘교육정책’이 실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불가리아, 루마니아 그리고 1968년까지 알바니아)과 ‘이단적인’ 유고슬라비아 간에는 곧바로 변화의 차이가 발생한다.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최초의 공식모임이 열린 비동맹운동에 티토 원수가 가담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아랍 국가들과, 우선적으로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와 가까워지게 된다. 당시에 유고슬라비아의 무슬림들은 귀중한 대사들로 간주됐다. 유고슬라비아 대학생들이 이집트, 이라크 혹은 시리아로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다. 이로 인해 새로운 모스크들이 생겨난다. 1969년 티토 정권은 무슬림들의 보스니아를,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세르비아·마케도니아와 마찬가지로,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민족으로 인정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반드시 신앙인이 될 필요가 없이, 민족적 의미에서 ‘무슬림’이 될 수 있게 됐다.(6)
사라예보의 가지후스레브벡 이슬람 교육기관의 학생 수는 1960년대에 끊임없이 증가하고, 반면 종교 언론에 대한 압력은 줄어든다. 심지어 1977년에 사라예보에 이슬람 신학대학이 들어서는데, 이 신학대학은 유고슬라비아 이맘 단체의 창설을 용이하게 하면서 외부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이중의 목표를 가지고 설립된다. 티토 정권은 사라예보에 거주하는 레이술 울레마(이슬람 최고 종교지도자)가 이끄는 중앙집권화 된 이슬람 공동체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사라예보는 유고슬라비아 무슬림들의 수도가 되는데, 코소보나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어 사용자들의 수도이기도 하다.
티토정권 하에 실시된 무슬림 간부들의 관료화는 상당부분 오스만터키 시대의 유산이었다. 이런 관료화는 모든 일탈을 방지하고, 종교적 실천에 대한 국가 통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알바니아 세계에서 특히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슬람 수피파 수도승들의 신비주의 경향도 이런 관료화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슬람 수도승 최고 성직자 단체(Zidra)가 1974년 창설됐고, 이 단체가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이슬람의 유일한 신비주의 조직을 대표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나치의 동의를 얻어 1941년 창설된 ‘젊은 이슬람 운동’에 뿌리를 두고, 이슬람 제도의 경직성, 엘리트 지식인들의 서구화를 비판하고 본래 이슬람의 신화적 순수함으로 돌아가려 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범(凡)이슬람 운동’은 혹독하게 탄압받았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충격에 의해 표출된 범이슬람 운동은 1978년 선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끄는 가톨릭교회의 갈수록 강력해지는 반공산주의 운동에, 그리고 그리스정교 사원에서 깨어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대한 반향이었다. 범이슬람 운동의 주요 인물은 훗날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이 되는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로, 그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이슬람 선언>을 발표 직후인 1983년 체포됐다. 반공산주의 발상이 담긴 그의 저서는 파키스탄을 이슬람국가의 모델로 삼으면서, 신앙과 정치의 융합을 주장했다.
역으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반종교적 억압이 완화된 적이 없었다. 이 국가들에서 무슬림들은 공산주의 체제들이 민족주의적으로 진화됨에 따라 특히 소외당했다. 불가리아는 1984년부터 포마크(Pomark)족과 롬(Roms)족 같은 터키 소수민족들을(7) 강제로 동화시킬 목적으로 민족주의적 ‘재생’ 정책을 실시한다. 그로 인해 1년 동안 85만 명의 이름이 ‘불가리아식’으로 개명됐고, 30만 명에서 40만 명의 무슬림들이 1989년 터키로 이주한다. 로잔 협정에 의해 그리스 영토로 남게 된 서쪽 트라키 지방은 무슬림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소외시킨 또 다른 실례다. 무슬림들의 소유권 접근이 제한됐고, 시민권은 종교규범들에 의해 규제됐다. 반면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몇몇 지역들은 1989년까지 외국인들에게 접근 금지구역이었다.(8)
또 한편 엔버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는 1967년 ‘지구상 최초의 무신앙 국가’를 선포하여 모든 종교적 실천을 금지하고 잔인한 탄압을 실시했다. 신부, 이맘(회교사원 사제), 이슬람 수도승 설교자가 사형을 당하거나 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1991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후, 모든 종교 조직들은 무(無)로부터 재건돼야 했기에 외부의 도움을 얻어야만 했다. 그래서 1990년대에 성경과 코란은 알바니아의 중요 수입 품목으로 등장했고, 알바니아는 새로운 ‘포교의 땅’이(9) 됐다. 그 후 이 조그만 나라는 급진주의 사상들의 영향력 확대 투쟁의 장이 되고 있는데, 급진주의 사상들은 아랍-페르시아의 걸프만 국가들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 이맘들에 의해 대부분 전달된다. 반면에 터키의 종교담당청과 밀접히 연계된 이슬람 공식 조직들은 좀 더 전통적인 접근을 옹호한다.
유고슬라비아의 이슬람 공동체는 유고슬라비아라는 공동 국가의 파열에 저항하지 못했다. 각 지방이 민족적 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1993년 무스타파 세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레이술 울레마(최고 종교지도자)’가 됐고,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발칸 이슬람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주의 행동당(SDA)’과 밀접히 연계된 무스타파 세릭은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이슬람화하는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전쟁의 현실(1992년-1995년)에 부딪혀, 데이튼(Dayton) 평화 협정에 의해 인정된 인종적·종교적 실체로의 국가분열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좌절됐다.(10) 결과적으로 재이슬람화는 다수가 보스니아인들인 주(州)들에서만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았다.
이런 틀 내에서 정치·종교 조직들은,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거나 ‘엘 무자히딘(보스니아 무자히딘)’이라는 국제여단 진영에 참가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온 외부 이슬람 자원봉사자들을 허용해 왔다. 국제 살라피스트 파에서(이슬람 근본주의자) 갈라져 나온 국제여단 진영은 때때로 절충주의 색깔을 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슬람의 특이한 실천방식과 지역 무슬림들의 ‘느슨한 태도’를 아주 곱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백 명의 국제여단 투사들이 여기에 터를 잡았고, 적어도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전까지는 별 문제없이 보스니아 시민권을 획득하고 선교활동을 전개해 왔다. 2001년 9월 11일은 이 나라에 주둔한 국제연합군이 이슬람 네트워크를 공격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에 이런 지하드주의자들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이, 특히 이 분쟁을 취재한 언론에서, 오랫동안 은폐되거나 축소됐다. 보스니아 사회에 지하드주의 교리가 깊숙이 침투한 사실도 마찬가지로 은폐되거나 축소됐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급진 사상이 ‘본질적으로 관용적이고 온건한’ 이슬람의 틀 속에 자리 잡지 못할 것이라고 조금은 조급히 추정했다.
사실 예전의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에서 실천되는 이슬람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라는 표시를 달고 있다. 사회주의는 이슬람으로 하여금 근대성에 맞는 특별한 타협점을 찾게 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이슬람 조직들의 규범적·규칙적·조직적 능력뿐만 아니라 조직들의 신학적·정신적 합법성은 아랍 국가에서 온 젊은 이맘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들, 소셜 네트워크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근본주의 설교들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고, ‘경험된 신앙’이 자주 모스크보다는 페이스북의 폐쇄된 그룹들 속에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특히 마케도니아와 코소보에서 이슬람 공동체들을 분열시키는 폭력적 분쟁들은 상당부분 전통 모델에 집착하는 나이든 이맘들과 걸프 군주국들에서 수입된 교리의 영향을 받은 젊은 광신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세대 간 분쟁들이다. 그것은 근대적 이슬람에 대한 두 가지 비전 사이의 분쟁이다. 하나는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에서 널리 통용됐던 비전이고, 또 하나는 세계화에 의해 생겨난 새롭고 ‘글로벌한’ 비전이다.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공산주의 시기 이후에 이슬람 공동체를 재건하기 어려운 여건 때문에 근본주의 설교자들이 큰 기회를 얻고 있다 .  


글·장아르노 데랑스Jean-Arnault Dérens 
로랑 게스렝 Laurent Geslin 
두 사람은 <Le Courrier des Balkans> 뉴스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다. 


번역·고광식
파리8대학 언어학박사. 주요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3> 등이 있다.
 
(1) 존 파인 주니어(John. V.A. Fine Jr.), <중세 후기의 발칸, 12세기 후반에서 오스만터키 정복까지의 비판적 개관>, 미시건대학 출판사, 안 아버, 1987년.
(2) 거 두이징스(Ger Duijzings), <코소보의 종교와 정체성 정책>, 허스트, 런던, 2000년.
(3) 위대한 탐험가 에브리야 셀레비(Evliya Çelevi, 1611년-1682년)는 <세야하트나메(Seyahatname)>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모험이야기를 출간했다.
(4) 이 폭동은 코소보의 반(反)세르비아 박해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다.
(5) 나탈리 클레이에(Nathalie Clayer), 자비에 부가렐(Xavier Bougarel), <남동유럽의 무슬림. 오스만터키제국에서 발칸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카르탈라, 파리, 2013년.
(6) 이 보스니아(Bosniaques)라는 명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 중에 공식적으로 변경됐다. 무슬림들이 보스니아크(Bosniaques)가 되고, 보스니아 사람들(Bosniens)이란 용어는 보스니아 무슬림,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그리고 또 다른 소수민족들을, 즉 보스니아라는 국가 내에 사는 모든 주민들을 가리키기 때문이었다.
(7) 포마크족은 불가리아의 로도피(Rhodopes) 산악지대에 많이 사는 이슬람화된 슬라브족이고, 불가리아 롬족 대부분은 무슬림 전통을 따르고 있다.
(8) 조엘 달레그르(Joëlle Dalègre),<그리스의 트라키아: 주민들과 영토>, 라르마탕, 파리, 1997년.
(9) 미란다 비커스(Miranda Vickers), “알바니아, 포교의 땅 그리고 알바니아인들의 신앙”, <발칸통신>, 2006년 11월 22일.
(10) 테이튼 평화 협정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라는 국가를 스릅스카(Srpska)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이라는 두 개의 실체로 분할하고 있고, 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자체도 다수가 보스니아인 이거나 크로아티아인인 10개의 주(州)로 나눠져 있다.



어휘해설

벡타시즘(Bektachisme)
하시 벡탁 벨리(Haci Bektac Veli, 1209년-1271년)에 의해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서 설립된 이슬람 종파. 이 종파는 이슬람에서 유일하게, 철저히 중앙집권화 되어 있다. 1927년부터 알바니아의 티라나에 근거를 둔 세계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의 할아버지’라는 의미의 ‘크리우에지시(Kryuegjysh)’가 그 수장이다.

보고밀주의(Bogomilisme)
복음서에 근거하여 평등하고 금욕적인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여 10세기에 불가리아에 출현한 기독교 종파. 이 종파는 발칸반도 대부분으로 퍼져나갔다. 공인 가톨릭의 입장과 대치되는 보고밀 종파는 귀족들의 특권에 진저리내는 농민계급의 원한을 집결시켰다. 타르노보(Tarnovo) 공의회에 의해 1211년 이단으로 간주된 보고밀 종파는 기독교의 성사를 거부했고, 좋은 신과 나쁜 신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데르비쉬(Derviche, 이슬람 수도승)
페르시아어에서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가난한 자’, ‘거지’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신비주의 종파 교도들을 가리킨다. 이 종파 교도들은 여럿이 추는 예술 춤의 달인들로 알려져 있다.

밀레트(Millet)
오스만터키제국 하에서 법적 보호를 받았던 비무슬림 종교단체다. 근대 터키어로 ‘밀리에트(Milliyet)’는 ‘민족’을 의미한다.

나크시반디(Naqshbandi)
중앙아시아의 부하라(Boukhara)에서 탄생한 바하우딘 나크시반드(Bahâuddin Naqshband, 1317년-1388년)에 의해 설립된 이슬람의 수피 종파.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충돌 때문에 나타난 신비주의 종파.

레이술 울레마(Reisu-l-ulema)
교리 박사들인 울레마(uléma)들의 수장. 유고슬라비아의 종교적인 계율 실천에서 다양한 민족주의 이슬람 공동체들은 각각 한 명의 레이술 울레마의 지시를 받는다.

살라피즘(Salafisme)
초기 이슬람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코란의 직역주의 해석을 주장하는 운동. 아랍 반도에서 탄생한 이 종교 근본주의는 모든 개혁을 거부한다. 

수피즘(Soufisme)
아주 다양한 움직임에 의한 신비주의 이슬람으로 엄격한 수니파 이슬람 지지자들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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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게스렝
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게스렝 <르쿠리에 데 발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