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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 그리고 저항의 로큰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저항의 로큰롤
  • 토마 소티넬
  • 승인 2016.09.30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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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리에르와 나>, 2015 - 골나즈 아프라즈

재즈는 늘 특정 정치의식과 연관돼있는 반면, 록과 그 하위 장르는 진보적 이상향보다는 돈을 추구하는 장르라는 인식이 한층 강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록과 정치 간의 관계는 일원적으로 볼 수도 없고 일관적이지도 않다. 또한 록 음악은 영미권이 주도하던 음악 시장에서 변방에 밀려있던 소외 음악들을 새롭게 조명하게끔 했다.

1989년 닐슨 만델라 생일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무대에서는 록 콘서트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록이라는 장르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표현수단보다 긴밀하게 역사와 연결돼 있는 듯하다. 물론 노래 한 곡을 녹음하면 며칠 안에 공연을 조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록 음악은 대중성과 유연성을 갖춘 장르다. 뿐만 아니라 록 공연은 다른 분야와 쉽게 접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록 음악이 태생적으로 정치와 연계돼 있던 음악 장르는 아니다. 1960년대에 정치운동과 손을 잡은 이래 이런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1968년 버클리와 베를린, 파리 등지에서 학생들의 바리케이드를 수놓은 이후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나 1971년 아일 오브 와이트 페스티벌 등), 각종 페스티벌 무대에서 각광받던 록 음악이 정치운동 세력과 맺고 있던 관계는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68년 5월 혁명을 일으킨 좌파운동 세력의 분열과 맞물려 하위 장르로 잘게 쪼개지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저항 분자가 완전히 말소된 것은 아니었다. 창의적이고 정치적인 문화적 반발 요소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리고 이는 때때로 한 번씩 사회로 표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묶어 ‘얼터너티브 록’이라 칭한다. 
이후 전 세계 국경이 들썩이면서부터는 인권운동가와 악덕업주가 같이 공존하기도 하고, 빈국에 대한 오만한 관심과 반 인종차별주의가 공존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음악의 반경도 넓어진다. 교류 네트워크가 확대된 것은 국경 개방의 실질적인 이점이라 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주의가 사그라지던 시기, 미국 남부에서 태동한 음악 장르인 로큰롤은 원래 정치권과 신중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브라운 아이드 핸섬 맨(Brown-Eyed Handsome Man)’의 척 베리를 비롯한 블루스 선배 가수들의 선례에 따라,(1) 흑인 아티스트들은 간접적으로만 자신들의 삶에 대해 다뤘다. 그리고 백인 뮤지션들의 경우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의 리듬을 만끽하며 악마에 신들린 음악을 선보이는가 하면(제리 리 루이스), 당대의 ‘필요악’ 같은 느낌의 노래를 불러대기도 했다(엘비스 프레슬리). 1950년대 청소년들의 반항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건 에디 코크란이다. 그는 주로 아이젠하워 말기의 주변 분위기에 반발하는 음악을 보여줬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등장은 영국의 전후 시기가 끝났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등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향수와 전후 기근 시기가 종료됐음을 알리면서 노동자 계층을 기반으로 한 쾌락주의의 승리를 나타낸다. 1964년 선거에서 비틀즈 곁에 있는 해럴드 윌슨 전 총리의 사진은 리버풀 출신 청년 네 명의 정치적 성향을 알려준다기보다, 노동당 출신 정치인의 승리를 보여준다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록 음악이 본격적으로 정치색을 입게 된 건 로큰롤과 민중가요 사이의 만남이 이뤄졌을 때다. 사실 한 쪽은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된 완벽한 쇼 비즈니스 산업에 속해 있었고, 다른 한 쪽은 해묵은 옛 전통에 불과한 장르였다. 미국의 경우,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는 대공황과 뉴딜 정책 때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쿠바 사태와 베트남 참전으로 촉발된 평화 및 시민권 수호 운동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같은 젊은 가수들에게 정치적 발언의 토대를 제공했다. 1965년까지의 음악 형태는 뉴딜의 민중가수 기수였던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의 음악과 같은 형태였다. 미시시피 주의 블루스나 애팔래치아의 발라드가 대표적으로, 기타나 하모니카, 베이스 등의 악기를 딱딱하게 연주하고, 전원풍의 멜로디가 주를 이루는 형태였다. 
하지만 그 후 밥 딜런은 일렉트릭 음악으로 전향한다.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무능이나 경멸의 소치일 수도 있지만, 대다수 아티스트들은 그 어떤 정치적 입장이든 거리를 두려는 성향이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거친 사운드와 어두운 가사에서 히피족의 낙천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그룹과 그 후예들은 모든 정치적 참여 활동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핑크 플로이드, 예스 같은 록그룹과 마찬가지로 -이유야 상반되지만 - 이 분야의 뮤지션들은 록 음악에 재즈나 클래식 음악과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려 했다.
하지만 록음악이 한 세대의 정치적‧정서적‧서정적 표현으로 자리 잡은 역사적 순간의 정점이었던 우드스톡 페스티발 이후에도, 록의 정치 지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록 음악은 항상 현실과 멀어지는 반어적 시선에서 정치적 선동과 선전으로 이행해갔다. 오히려 (“가난한 소년은 록그룹 활동을 하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네. 잠든 런던에서 거리의 투쟁가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라는 가사를 선보이던) 롤링스톤스 쪽에서 컨트리 조 맥도날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뮤지션 쪽으로 지각 변동이 이뤄진다.
1970년대 말, 영국의 펑크 음악이 대두되면서 현실참여 성향의 아티스트 진영에는 새로이 젊은 피가 수혈된다. 그 중 대표적인 그룹인 섹스 피스톨즈는 ‘노 퓨쳐(No future)’ 담론을 내세우며 록 음악 특유의 파괴적이고 전복적인 성격을 되살린다. 이들의 뒤를 이어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 담론을 펼치는 그룹들이 등장하는데, 그룹 ‘더 클래쉬’도 그 중 하나다. 이 그룹은  ‘런던 콜링’이란 앨범으로 위기의 시대, 영국의 생활상을 그대로 담아낸다. 폴 웰러의 그룹 ‘더 잼’은 보수진영과 잠시 결탁했다가 이내 곧 결별한다. 영국에서는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 운동이 펼쳐졌는데, 반 인종주의 NGO ‘SOS Racism(인종차별SOS)’이 설립된 것도 이러한 움직임의 영향이 컸다. 주요 음악 축제 자리에서도 배지를 달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거의 항상 1세대 혹은 2세대 이민자들이 눈에 띄는 프랑스 얼터너티브 록그룹들은 베뤼리에 누아르의 극단주의에서 멀어져 마노 네그라, 네그레세스 베르트 등의 보다 완곡한 화법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다들 쇼 비즈니스의 관행에서는 등을 돌리되,(2) 어느 정도 실리적인 노선을 따라간다. 우선 반인종주의의 기치를 내세우는 이들 록 그룹은 좋든 싫든 교외 지역 대중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는데, 애초에 음악적 원동력이 돼준 세력이 바로 이들 교외 지역의 대중이었기 때문이다.(3)
또한 영미권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얼터너티브 록그룹 역시 공연의 기술적재정적 자금 마련을 위해 다국적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대형 레이블 업체들은 과거의 선례에서 얻은 교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들 록그룹에 대해 (롤링 스톤즈의 데카 레코드처럼) 검열이나 단속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곡의 내용이야 어쨌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음반의 판매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얼터너티브 록그룹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과 스스로 깔아 내리려하던 제도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무단 점거 세력이나 실업자, 일용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들 록 그룹은 정부와 음반사의 협박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포용할 수 없는 소외 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메인 무대에서 활약하며 록 음악의 담론을 만들어내 정치권 및 제도권의 개입을 이끌어낸 인기 그룹도 있었다. 미국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나 영국의 ‘스팅’이 이에 속하는 전형적인 스타 그룹이다. 이들은 과거 존 레논이 그랬듯 인기가 절정에 이르자,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시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스프링스틴은 거의 공화당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룹 최고의 히트작이었던 ‘Born in the USA’ 앨범(1984)은 레이건의 승리를 기념하는 배경음악인 듯도 하다. 하지만 베트남 참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쓰인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그룹의 대다수 노래들과 마찬가지로) 감독 올리버 스톤의 대중적인 평화주의에 훨씬 가까웠다. 1988년 대선 때 ‘부시 투표 반대’를 호소한 스프링스틴은 스팅, 피터 가브리엘, 트레이시 채프먼, 유순두(Youssou N'dour)등과 함께, 같은 해 국제사면기구가 주최한 세계 투어에 참여한다.
아티스트들은 인종주의 반대나 인권 수호, 환경의식에 대한 고취 등 각자 나름대로 조금 더 역점을 두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스팅은 아마존 열대 우림의 보전에 목소리를 높인 그룹이었다. 다만 브라질 정부나 현지 환경운동가와의 의견 충돌은 현실 참여수단으로서의 록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드러내준 사례였다. 물론 아티스트의 명성이 그 원인이긴 했지만, 방송국 측에선 백인 록 스타와 정글에서 막 나온 원주민 추장의 결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같은 사회참여 운동으로 아티스트 측에서 이득을 얻기도 했다. 아티스트의 선행은 명성의 유지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아티스트가 생기기도 했다. 1989년 아직 수감 중이던 닐슨 만델라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개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자신의 공연에서 이 남아공 지도자 만델라의 초상화를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서방국가 전역에 공연실황을 중계하려던 휘트니 휴스턴 입장에서는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기 싫었던 것이다. 물론 애초의 공연기획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이러한 휘트니 휴스턴의 행동은 세간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물론 피터 가브리엘이 ‘So’ 앨범 수익금의 전액을 제3세계 아티스트 전용 스튜디오 건설에 할애한다고 했을 때에는 아무 비판도 제기되지 않았다.
한편 1986년 폴 사이먼은 소웨토 뮤지션들과 녹음 작업을 위해 남아공으로 갔을 때, 국제연합(UN)이 인종차별국인 남아공에 대한 제재의 일환으로 이 국가와의 경제 및 문화교류를 금지한 조치를 위반한다. 당시 만델라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사이먼에게 공연중단을 호소하며, 흑인격리 지역 보푸타츠와나의 카지노 도시 선시티에 모습을 드러낸 린다 론스태드 및 로드 스튜어트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러나 소웨토에서 일부 제작된 앨범 ‘그레이스랜드’ 발매 후 이뤄진 순회공연으로 몇 가지 모호했던 부분이 일거에 사라진다. 폴 사이먼이 미리암 마케바와 트럼펫연주자 휴 마사켈라에게 장시간 무대를 할애하고, 정작 자신은 무대 뒤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의 공연은 전적으로 남아프리카 음악에만 할애된다. 그의 투어와 맞물려 유럽에서는 조니 클레그가 크게 인기를 거뒀고, 그 결과 아프리카 음악은 제3세계 음악과 더불어 세계 대중음악의 어엿한 한 장르로 자리 잡는다. 앤틸리스 제도의 자메이카 혼자 힘으론 이뤄내지 못한 쾌거였다.
1970년대 초반에 레게음악은 이미 서구음악 세계에 강렬한 기억을 심어줬다. 이에 따라 자메이카의 리듬과 음색은 이제 록음악의 한 언어로 분명히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대부분 영국의 이민자거나 원주민 출신인 자메이카 그룹들은, 밥 말리를 제외하고 모두 신속히 변방으로 밀려났다. 아마도 자메이카의 토속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라스타파리안 이데올로기가 산업문명 속의 도시인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공산이 크다.
상황은 아프리카 음악이나 라틴 아메리카 음악도 마찬가지다. 서글픈 람바다의 사연은 방송(TF1) 및 음반사(CBS), 음료(오랑지나) 등 다국적기업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제작자들이 (볼리비아와 브라질 등) 남미권 국가의 유산을 어떻게 갈취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현지의 산업이나 법제로는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람바다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권리 보호에 취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번, 이노, 피터 가브리엘, 폴 사이먼, 케이트 부시 등 서구의 록 뮤지션들이 이들에게 보인 관심은 예술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록 음악의 쇄신을 위해서는 장르 간의 끊임없는 결합이 이뤄져야 했다. 1950년대, 록은 흑인격리 지역이나 미국의 소수 백인들에게서 그 추진력을 찾으려 애를 썼다. 이후에는 늘 그랬듯 신흥국가들이 원자재를 제공했다. 그러나 음악은 산업 분야와는 다르다. 서구의 대중음악은 문화의 보존과 약탈 사이에서 기존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이를 확산시키면서 음악적 풍요를 도모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던 분야에서 상호교류를 시작했다는 점은, 록 음악이 전 세계의 문화생활에 기여한 중대한 공로다.   



글·토마 소티넬 Thomas Sotinel
기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Cornel West, ‘Le jazz, gardien de la conscienc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3년 11월호.
(2) François Goethals, ‘La Grande misère des musicien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9년 8월호. 
(3) Paul Moreira, ‘Le rock, creuset pour une intégrati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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