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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에세이 당선작] 아빠의 사이즈
[이달의 에세이 당선작] 아빠의 사이즈
  • 윤마디
  • 승인 2017.02.03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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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100입어, 105 입어?

아빠의 웃옷을 산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더운 여름이면 얇은 옷은 100으로, 날이 추워지면 안에 다른 옷들을 껴입어야 하니 낙낙히 105로.

한번도 아빠 옷? 100사! 해본 적이 없고 아빠의 사이즈는 언제나 계절에 따라 줄타기를 했다.

아주 어렸을 적 생각이 난다. 손가락을 접어서 내 나이를 말할 때였다.

그때 우리가족은 아주 시골에 살았는데 그보다 더 시골 공터에 가끔 부도난 양복브랜드가 재고처분을 하러 장을 열곤 했다. 요즘으로 치면 버스정류장에 붙은 “눈물의 폐업!”, “공장에 불이 나서…”와 같은 떨이 장. 아빠는 “야~ 캠브리지 여기가 원래는 아주 비싼 브랜드야! 그런데 부도가 나서 우리 같은 사람도 이렇게 싸게 살 수 있다” 하며 일요일 오후쯤 낡은 지프차를 타고 그 먼지 나는 시골길을 달려갔다. 무슨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 마냥 반갑게.

그런 장에는 보통 평범한 사이즈는 다 빠지고 인기 없는 사이즈만 남아있는 법이다. 행거에는 고동색 빛바랜 재킷들이 길게 걸려있었는데 아빠는 그것들 중에서 고르고 고르다 어깨뽕이 반 뼘씩 크더라도 색이 얼추 비슷한 빛바랜 상하의를 골라서 맞춰 입었다.

요즘 아빠는 시골길 대신 공짜지하철을 타고 동묘에 곧잘 다녀온다.

“오늘 글쎄, 갔더니 이게 만오천원이야, 만오천원. 아니 옛날에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거 입어보지도 못했어. 근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 디자인을 안 입으니까. 이제 우리 같은 사람도 입게 된 거야. 어때 괜찮지? 나한테 딱 맞을 것 같아서 어디 한 번 줘보슈 하고 입어봤더니 나한테 딱 맞는 거지!”

그럼 그날은 어디 한번 줘보슈가 아빠의 사이즈인 것이다.

아빠의 사이즈에 대해 생각한다.

아빠의 사이즈는 100이나 105가 아니라, 싼 옷. 아주 떨이로 세일하는 옷. 남이 입다 버린 무더기옷 속에서 목 뒤에 브랜드상표가 붙어있는 옷. 억지로 구색이나 맞춘 옷을 입거나, 아직도 옛날에 못 입어서 한이 맺힌 옷을 찾아 입는 남자.

왜 아빠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본인의 신체사이즈를 갖지 못할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내 정해진 자리를 따악 금 그어서 차지하지 못하고 늘 빼앗기고 마음 졸이며 맨바닥에서 칼잠 자는 사내를 생각한다.

49년 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나서 똥오줌을 할머니 등위에서 눈 사내.

형에게만 계란 프라이를 해준 게 서러워서 다락방에서 울다 잠든 사내.

인간에게 총구를 겨눌 수 없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교련대신 고등학교를 포기한 사내.

늘 오후 세시쯤에는 두꺼운 시멘트 벽과 까만 철문 사이 작은 사각형에서 구타가 이어졌고 어금니가 빠질 것 같은 스트레스에 치약을 턱에 바르고 자던 사내.

차가운 교도소 시멘트 벽을 당장에라도 깨뜨릴 것만 같이 천둥이 치던 밤. 그 양심수 사내 옆으로 살인 강도 강간 절도범들이 병아리처럼 모여들던 밤. 그 밤의 한가운데 있던 사내를 생각한다.

아빠의 젊음은 그렇게 한 번의 전쟁과 두 번의 쿠데타, 그래서 다시 두 번의 감옥에서 뒤섞였을 것이다. 양심수의 양심도 그 진흙탕에 무던히도 패대기쳐졌을 것이다. 두 번의 감옥을 나왔지만 그 질겨지고 악 받친 양심만으로는 세상도 감옥이었을 것이다.

두 주먹으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까만 철문을 나올 때쯤에는, 그 주먹도 다 으스러져 있었을 것이다.

저번 여름날 하루는 전세집 사기를 당해서 쫓겨난 막내딸 월세방을 보러 올라오셨다. 하루 동안 여러 집을 다녔지만 남은 적금과 방 평수 사이에서 우리는 결국 저울질을 끝내지 못했다.

해가 지고 저녁으로 간 삼계탕 집에서 얼마 전 아빠의 친구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빠가 지지난 여름 경비 일을 그만뒀을 때 이러다 자다가 죽겠다 싶어서 그만뒀다고 했는데 이번 아파트에다가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는 걸 보니 아마 비슷한 심정이겠구나 싶었다.

아빠의 귀에는 습진이 있었다.

그 사내는 머리가 희게 세어서도 밤이 되고 달이 가늘어지면 경비실에서 칼잠을 잤다.

왜 “우리 같은 사람”은 죽을 만큼 일해야 되는 걸까? 정말 죽을~만큼?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자기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찾거나 자기 성향에 맞는 삶을 살아볼 엄두가 없을 것이다. 일평생 찬 바닥에서 칼잠으로 밤을 지새운 사내들에게는 내 것을 고르는 일들이 엄두조차 못 낼 사치로 다가올 것이다.

난 그 “우리”가 아니지만 여튼 아빠가 말하는 “우리 같은 사람”은, 공짜로 밥 먹을 사람은 아니니 웬만한 힘든 일은 기꺼이 감수하는 편이다. 품삯이 적더라도 내가 정직하게 몸 팔아서 하루를 보냈음에 보람을 느끼고 까만봉지에 저녁찬거리를 사올 수 있음에 만족하는 편이다.

장바구니에 간식으로 우유와 요구르트를 담을 수 있는 사치. 주말에 가끔 공짜지하철을 타고 동묘로 나들이를 가서 천원단위 쇼핑을 하고 행복해 할 그 정도의 사치면 된다.

아빠가 동묘 가는 꼴이 싫어서 아무리 번듯한 옷을 진상해봤자 그 옷들은 처음부터 자기 삶이 아니고 분에 넘치는 사치로 여겨진다는 것을 난 손가락을 못다 접는 나이가 되어서 이해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를 관찰하느라 아빠의 삶에 그닥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빠의 "우리 같은 사람"을 존중해주고 싶다. 그의 젊은 날 진흙탕을 구른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최소한 그 사람의 어디 줘보슈 사이즈를 위해서라도 동묘는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한다. 동묘가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작은 사치를 주는 곳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아빠는 아직도 작은방에 남이 쓰다 버린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그 틈에서 칼잠을 잔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 월급을 타서 아빠에게 선물했던 파크랜드 양복은 막상 옷장에서 곰팡이가 슬고 있다.

 

글·윤마디

행복은 마디마디에. 길고 긴 산길 속에서 비 쏟아지는 날 정수리부터 온몸으로 비를 맞는 나무들의 기개를 보고 압도당할 수 있다면. ​눈 내리는 날 나무 가지마다 피어난 싱싱한 눈꽃을 맛볼 수 있다면. 볕 따가운 날 샘물을 찾아 동무와 발 담글 수 있다면. 행복은 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르는 길 마디마디에 있음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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