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개를 데리고 공원에 갔다가 그 사람을 또 만났다. 나이는 40대 초반으로 단정한 머리에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는데 공원에서 늘 소주를 마신다. 아침에 공원 벤치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여러 번. 추석 전날에도 소주병 두어 개가 어김없이 그의 옆에 있고, 그 기세에 장악되어 정자는 온전히 그의 차지다.
처음 보는 할머니가 전화로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걸으며 (들려서) 듣다 보니 며느리 욕이다. 추석 같은 명절엔 대개 가족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부부갈등, 형제갈등, 부모ㆍ자식갈등 등 많은 갈등이 목격되지만 명절 갈등의 최고봉은 단연 고부갈등이다. 고부갈등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에서 비롯하는데, 갈등의 전선에서 맞닿은 건 통화하는 저 할머니처럼 여성이다.
전래의 명절 중에 가장 큰 명절은 사실 설과 추석이 아니라 대보름과 추석이다. “개 보름 쇠듯”을 비롯하여 대보름과 관련하여 많은 속담이 있듯이, 추석에도 관련한 많은 속담이 있다. 그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란 속담은 추석의 풍요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세시풍속사전에는 “팔월 추석 때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밤낮을 즐겁게 놀듯이 한평생을 이와 같이 지내고 싶다는 뜻의 속담”이라고 한다. 사전 집필자는 유래에 관한 옛 문헌을 인용한 뒤 “이때는 오곡백과가 익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다. 또 즐거운 놀이도 많고 과일도 풍성하고 각종 놀이도 있어 아이로부터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즐겁게 지낸다”라고 적었다.
사전의 이 항목 필자가 아마도 나와 같은 남자가 아니었을까. 여자 필자였다면 조금 다르게 쓰지 않았을까. 여자들은 더러 추석을 노동절로 표현한다. 매우 정확한 표현이라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나에게 추석은 배 불리 먹고 뒹구는, 조금은 귀찮은 명절이었지만, 그 음식과 저간의 정황을 갖추는 데 들어간 어머니의 노동에 대해서는 지금에서야 눈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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