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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변해가는 것을 향한 밀려나는 자의 응시- 지아장커 ‘세계’, ‘스틸 라이프’론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변해가는 것을 향한 밀려나는 자의 응시- 지아장커 ‘세계’, ‘스틸 라이프’론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8.03.2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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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것이 서글픔을 짓는 풍경- 당신은 유령입니까

 
지아장커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사라지다’와 ‘살아지다’는 말은 접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도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져가는 장소들이 선재한다. 가난한 노동자들과 청년들을 둘러싼 환경의 압도적인 변화, 혹은 끊임없이 재구축되는 삶의 조건을 먼저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낯설게 변해가는 세계 내에서 그저 오늘을 버텨내는 인생들을 현미경으로 바라보게 한다. 때론 양자가 프레임 내에서 서로에게 이물감을 안기며 교직한다. 이때의 이물감은 전경에 놓인 무기력한 인물들과 후경에 놓인 낯선 풍경들 사이로 고이는 아이러니를 일컫는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놓여 있다. 낯설게 들어선 풍광이 대체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적응을 강요받는 인생들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세계>의 타오(자오 타오 분)와 타이셍(첸타이셍 분), <스틸 라이프>의 산밍(한산밍 분)과 셴홍(자오 타오 분)은 그 질문들 곁에서 겨우 살아가는 인생, 아니 살아지는 인생의 표상이다. 지아장커는 그들을 내세워 세계화, 현대화, 자본화, 도시화, 산업화를 향한 욕망으로 흥건한 중국의 민낯을 날카롭게 회의한다. 
 
 먼저 <세계> 속 타오와 타이셍은 베이징에 위치한 세계공원에서 각각 무희와 경비원으로 살아간다. “하루만에 전세계를 구경하십시오”라는 홍보문구가 붙은 그곳은 에펠탑과 노트르담 성당, 런던 브릿지와 같은 선진국의 상징물과 제3세계의 경이로운 문화유산이 ‘세계를 품은 중국’이라는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곳이다. 변화에의 강박을 확산시키며, 맹목화 된 미래상을 향한 속도를 부추기는 곳이다. 여기서의 ‘시뮬라크르’는 타오와 타이셍의 생활패턴을 규제하는 인공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이나 들뢰즈적 개념이 아니다. 정확히 보드리야르의 논리를 불러 세운다. 그러니까 세계공원은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시뮬라크르가 되는 기이한 ‘코드화’의 현장이다. 이 상상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닌, 단지 실재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여 보여주는 시뮬라시옹의 질서(1), 그 자체다. 추측컨대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를 낙관하는 중국인의 욕망은 그 황홀한 모사의 세계를 떠받치는 초석이다. 
 
 그러나 지아장커는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 된 그 거대한 욕망 앞에서 ‘세계 속의 중국’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 생채기를 낸다. 이를테면 타오와 타이셍의 일터이자 보금자리인 세계공원은 실재와 무관한 이미지들이 중국인의 허술한 비전과 타협하는 곳이다. 세계공원 방문객의 내면을 추론하면, 그곳의 이미지들은 곧 합리적이지 않은 상상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 다음 단계에서 사실성, 혹은 현실감 자체가 휘발될 테지만, 상관없다. 현실감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을 번민하는지 정확히 모른 채, 번민하는 타오의 다음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종일 여기 붙어있자니 유령이 될 거 같아”. 그렇게 보면, 타오와 타이셍의 거처는 유사 낙원에 대한 환상을 낳는 헛것들이, 유령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볼모로 잡는 곳이다. 
 
 한편 <스틸 라이프>는 한층 더 사라진 것에 대한 연가, 사라질 것에 대한 비가라는 인상을 준다. <스틸 라이프>의 진정한 주인공은 산샤라는 공간, 그 자체다. 이곳은 삼협댐건설정책에 따라 16년 간 공사가 진행된 곳이다. 이후 불과 2년 만에 2000년의 역사를 지녔던 산샤의 마을과 문화가 물에 잠긴다. 물론 <스틸 라이프>는 이곳으로 틈입한 두 인물의 동선을 따르며 전개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산밍이라는 사내는 16년 전 사라진 아내와 딸을 찾아 산샤를 방문하고 셴홍은 2년 전부터 소식이 끊긴 남편을 만나러 이곳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산밍과 셴홍이 견뎌온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은, 곧 산샤와 그곳을 정처로 삼은 자들이 감당해 온 어떤 ‘사라짐’의 시간과 일치한다. 
 
 그렇게 지아장커는 산밍과 셴홍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산샤댐 주변의 아름답고도 기이한 풍경과 교차시킨다. 그는 장소의 역사가 스스로를 자기실현(self-realization) 해낼 수 없을 때, ‘장소의 혼’(2)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환경과 더불어 자기를 정체화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정위를 잃는다는 것, 정위의 체계를 잃고도 ‘상실했다’는 느낌 이상의 반성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영화 속에서 강제로 ‘소멸/사멸’에 이른 것들의 목록을 떠올리게 한다. 산밍과 셴홍은 대체된 풍경, 이식된 환경, 조작되거나 조장된 구호들 사이, 바꿔 말해 ‘헛것’들의 안과 밖을 배회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강요된 두 가지 태도는 ‘기억하기’와 ‘적응하기’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태도 역시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하다. 산샤댐 주변 곳곳에 적힌 표식 ‘수심 156.50 미터’는 지금 이 자리 역시 조만간 허물어질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수몰을 기다리는 모든 사물의 표정을 안고서 두 사람이 정물화(still life) 속 작은 오브제로 한없이 왜소해질 때, <스틸 라이프>는 풍광으로 오는 질문이 된다. 
 
 맨 마지막에 남은 생각을 서두에 옮겨 적자면, 두 영화는 변해가는 것을 향한 밀려나는 자의 응시, 바로 그것이다. 이 진술을 더 소상히 해명하기 위해 ‘사라지다’와 ‘살아지다’를 표상하는 영화 속 이미지들이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옮겨볼 것이다. 슬픈 ‘헛것’을 좇는 자들과 그들을 유령처럼 만드는 공간에 대해, 그 공간에 기입된 폭력의 흔적과 성격에 대해 이야기해볼 것이다. 무엇인가 사라졌다고 해서 반드시 잃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살아진다고 해서 삶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몸의 기억과 마음의 감각에 대한 지아장커의 교설이다. 지금부터 지아장커가 원했으나 당신이 혹여 지나쳤을지 모르는 그 특별한 순간들을 다시 음미해보기로 하겠다.
 
모사적 세계, 허위로운 생활: <세계>
 
 영화 초반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연출자인 지아장커의 이름과 영화제목이 점멸할 때의 쇼트가 바로 그것이다. 고정 카메라로 찍어 스틸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쇼트는 프레임 왼편에서 한 허름한 남자가 쓰레기 등짐을 지고 등장하며 시작한다. 화면 후경에는 세계공원 내 명소인 에펠탑이 보인다. 그리고 인공 호수와 그 곁을 지나는 모노레일이 중경에 자리한다. 그는 아마도 몰려드는 관광객이 호수에 버린 쓰레기들을 수거하는 일을 하는 남자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세계공원이 생기면서 발명된 노동의 한 형태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음산한 분위기와 배경 음악은 그를 아렌트가 말한 “노동하는 동물”, 그저 노동만 남은 인물로 각색한다. 필요의 충족에 얽매여 소통과 연대를 위한 세계에서 추방(3)된 자의 인상이 있다는 말이다. 이 쇼트를 좀 더 설명하면, 그는 프레임 가운데로 힘겹게 걸어오는가 싶더니 잠시 멈춰 선다. 역광으로 찍힌 탓에 그의 얼굴 표정의 윤곽은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모사적 세계가 조장하는 꿈(에펠탑)이 저만치 있다는 것이고, 그 배면의 허위성을 용인할 때 생계가 보장되는 삶이 더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멈춰 설 때 그는 에펠탑 쪽에서 고개를 돌려 버린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게 하는 그의 윤곽없는 얼굴은 그 자체로 푼크툼으로 다가온다. 현대 중국인의 꿈에서 밀려난 자가 보여주는 이상한 응시가 그 어두운 얼굴 안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 응시로부터 ‘사라진 것’과 ‘대체된 것’ 사이의 긴장이 흘러나온다. 그저 살아지는 삶의 서글픔이 흥건해진다. 이러한 인상은 <세계>의 정서를 단번에 집약한다.  
 
 <세계>의 배경이 되는 공간들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환기시킨다. 먼저 영화의 주무대인 세계공원은 이집트 문명의 상징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에서부터 뉴욕 맨하탄의 고층 빌딩까지 축소된 비율로 자리하고 있다. 이 공간은 중국과 베이징의 화려한 미래에 대한 꿈을 분출한다. 밤이면 세계 방방곡곡의 전통 복장을 한 무희들이 화려한 쇼와 퍼레이드를 벌인다. 실재를 잊게 하는 허구적 이미지들이 방문객에게 출처가 불분명한 자부심을 선사하는 곳. 그처럼 세계공원은 세계를 보듬은 중국의 지금과 미래를 소비하게 할 뿐, 이곳의 과거를 떠올릴 틈을 주지 않는다. 
 
 공간의 과거에 대한 상상은 세계공원 밖을 잡은 몇몇 쇼트들로부터 주어진다. 이를테면, 타오와 함께 화려한 무대 위를 누비는 웨이는 재개발을 기다리는 듯한 베이징 외곽의 주거지역에 산다. 그곳의 풍경은 도시화, 현대화 과정에서 지역 간 발생할 수 있는 시간적 이격감, 혹은 장소와 함께 인간이 뿌리 뽑힐 수 있다는 불편함을 안긴다. 어쩌면 베이징은 그러한 ‘무장소화(placelessness)’(4)현상의 폭력을 전력으로 감당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를 더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이미지는 일터로 가는 건축 노동자들의 긴 행렬이다. 펀양에서 올라온 타이셍의 친구들도 그 행렬 사이 어딘가에 묻혀 자기 노동에 합당한 돈을 쥐려 한다. 
 
 종종 그들의 배경으로 프레이밍되는 건축 현장 이미지, 아마도 초고층 빌딩이 들어설 것 같은 공간의 이미지는 언캐니하다. 예컨대, <세계>에는 기초적인 콘크리트 타설 작업만 끝난 건물 기둥들이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여기에는 이미 사라진 것과 아직 대체되지 않은 것 사이의 긴장이 정확히 고인다. 그 잿빛 풍경을 천천히 트래킹하는 카메라는 일차적으로 베이징 외곽의 이미지를 손질하는 현대화, 자본화, 도시화의 속도를 지켜보게 한다. 더 나아가서는 베이징의 경관을 괴롭히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의 문제를 감각시킨다.  
 
 그렇게 보면 <세계> 속 공간배경들 사이의 낙차는, 각각의 장소에 뿌리내린 베이징 시민들의 삶, 유의미하게 얽힌 그들 간의 경험과 정체성의 맥락들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세계공원이라는 기이한 매혹의 장소가 있다. 서로 다른 나라, 전혀 다른 시간대의 역사와 문화를 불러 모은 것은 아마도 현대 중국(인)의 욕망일 것이다. 물론 우린 이곳이 베이징 정주민과 관광객들의 오락적 향유를 위해 테마에 따라 연출된 공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지아장커는 이 환상적인 이계공간을 자꾸 기이한 현실, 그 자체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번안한다. 주인공인 타오와 타이셍의 입장에서는 생계를 위한 노동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 크고 작은 장애를 만나는 공간이지 않는가. 문제는 세계공원에서의 삶에 익숙해져버린 영화 속 인물들이 공간의 불균질함을 ‘불균질하다’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도덕하거나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기우는 자기 삶을 두고 마땅히 지녀야 할 성찰적 자세를 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세계> 속 주요 인물들은 가장 먼저 그들 자신의 꿈과 불화한다. 그리고는 다른 인물과의 관계, 공간과 맺는 관계가 어그러져 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예컨대 타오는 세계공원에서 일하는 내내 안정된 정체감을 전유하지 못한다. 남자친구 타이셍에게 “바람피면 죽여버리겠어”라고 말하는 그녀는 마음의 정처를 찾아 하염없이 유랑하는 기표다. 모사적 세계에서 유령처럼 흘러 다니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는 어제까지는 인도 무희였다가 오늘은 스튜어디스 역할을 하고, 다시 게이샤 복장으로 수다를 떨다가 아프리카 여인이 되어 방문객 앞에 서는 삶에 익숙하다. 그렇게 그녀는 모사적 세계가 요청하는 허위로운 삶과 그 아래로 가라앉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타이셍은 여권과 신분증 등을 위조하는 일을 부업으로 하면서 세계공원의 경비를 서고 있다. 그는 영화 중반 이후 타오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데, 그 상대 여자는 남편과 자식을 둔 칀이라는 여자다. 그들은 모사적 세계 내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를테면 그녀는 패션잡지에 나오는 명품 옷과 가방 등을 베껴서 소위 ‘짝퉁’을 만들어 팔며 생활하고 있다. 중국의 청년들이 끊임없이 찾는다는 짝퉁과 그것에 붙은 허위로운 기호 가치에 기생하는 삶. 그녀는 그런 생계의 방식에도, 은밀히 지속되는 불륜에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 그처럼 타이셍과 칀은 가상적으로 복제되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 유사 사랑의 현실감을 전시하는 관계다.  
 
 러시아에서 건너와 세계공원에서 일하게 된 안나 역시 모사적 세계를 경유해 그녀 자신의 꿈에서 멀어져가는 인물이다. 그녀가 타오에게 밝힌 소소한 희망사항은 돈을 모아 시집간 여동생이 사는 울란바토르에 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하며 여동생이 가르쳐 줬다는, 마음속에 간직해 왔다는 노래를 꺼내 부른다. 그리고 얼마 후 안나는 세계공원을 등진다. 타오와 안나가 다시 만난 장소는 음습한 가라오케 화장실이다. 타오는 세계공원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의 “오늘 저녁 파티에서 재미 보자”라는 문자에 대한 응답으로 재력가가 연 파티에 와 있는 상태다. 타오가 기대한 재미가 무엇인지 불분명하지만, 안나가 거기에 있는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뭘 쳐다 봐. 짐작했으면서”라고 타오에게 말 거는 그녀는 지금 꿈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몸을 파는 유령이다. 
 
 역시 세계공원에서 일하는 니우와 웨이의 결혼식 피로연 파티 장면도 인상적이다. 영화 속에서 니우는 웨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규제하려 했고, 웨이는 그의 집착을 증오하거나 경멸하며 매번 다퉜다. 급기야 니우는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점프컷을 통해 그들의 결혼 발표가 공지되고, 결혼 피로연 파티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비약적 진행이 이상한 것은, 그들 관계에 해결되거나 해명되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명은 생략된다. 뭔가 허무해서 허위로운 결혼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피로연 파티의 순간에 타오는 타이셍의 휴대폰에서 칀에게 온 문자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어. 안 잊을게. 칀”을 발견한다. 타오가 그 문자를 보기 직전, 파티에 함께 한 많은 동료들이 결혼식을 올릴 다음 순번 커플로 타오와 타이셍을 지목했던 터였다. 이때 우리는 세계공원이라는 거대한 모사적 세계를 배회하는 허위로운 정서적 구조물들을 매만지게 된다. 진실을 흉내내는 노동과 행위, 감정과 언어들이 인물 간의 관계망을 타고 폭력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이 거기에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으로부터 밀려나면서도 성찰적 응시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아매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타이셍의 고향 친구인 그는 베이징으로 넘어와 건축 현장에서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야근 수당을 더 벌기 위해 스스로 혹사당하는 삶을 선택해 벌어진 일이다. 그의 사고와 죽음, 그리고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쓴 유서는 <세계>의 이미지텔링에 감춰진 전언을 단박에 확인시킨다. 유서에 개조식으로 건조하게 나열되는 문자는 사람 이름이고, 숫자는 그에게 진 빚의 규모다. 마지막 줄은 ‘학교 앞 국수가게 3위안’이다. 지아장커는 차가운 베이징 병원의 벽면에 이 글자들을 새겨 넣은 후, 자본화의 속도에 상대화 된 인간의 가치,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퇴락한 관계망을 돌아보게 한다. 이때 지아장커는 아매를 애도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유서의 글자가 사라진 후에도 우리가 그 암전과 같은 차가운 벽을 더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외화면에서 들리는 친구 산라이의 울음소리, 그러니까 펀양 출신으로 건축현장에서 아매와 같이 일을 하며 이제 겨우 사투리를 고친 그의 울음소리는 각별한 감정을 주문한다. ‘살아지다’라는 단어가 망각시킨 어떤 공포가 그 날카로운 소리에 스며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세계>의 공간들은 현대 중국인들의 욕망 아래 묻혀 외면당하고 있는 위험인자를 은연중에 누설한다.   
 
 <세계>의 마지막 씬은 가스중독으로 인해 생사를 알 수 없는 타오와 타이셍이 서로를 향해 나누는 초월적 목소리를 전시한다. 암전 상태의 프레임 위로 들이치는 자막과 소리는 그들을 거기까지 내몬 어떤 ‘변화’ 혹은 ‘변화의 속도’를 감각시킨다. 그들은 생사의 경계까지 밀려난 이후에야 오직 ‘적응’을 위해 살았던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응시한다. 우리의 시각을 닫은 세계(암전)에서 나눈 그들의 대화는 우리에게도 몸의 기억과 마음의 감각을 요청한다. “우리 죽은 거야?”라고 타오가 묻자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타이셍이 대답한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말한 ‘시작’은 이미 타오와 타이셍의 몫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사적 세계가 전염시킨 허위로운 생활에 중독된 후 진짜 ‘헛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서글픔만은 아닌 다음 순간을 이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수거되(지 않)는 기억, 철거되(지 않)는 인생: <스틸 라이프>
 
 영화가 시작되면 배에 탄 중국 인민들의 꾸밈없는 모습이 다큐멘터리처럼 배열된다. 그들을 훑던 카메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춰 선 자리에 앉아 산샤를 건네 보는 한 사내가 있다. 16년 전에 자신을 떠난 아내와 딸을 찾아 이곳에 이른 산밍이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풍광을 담은 대응쇼트에는 협곡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 산자락에 덕지덕지 세워진 건물들이 고요하다. 우린 그 쇼트들에서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고, 평온하면서도 위태로운 양가적 감정에 젖게 된다. 그 감정의 진짜 아버지는 ‘사라진 것’과 ‘사라질 것’이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동시에 웅변하는 사태다. 그렇게 지아장커는 산밍의 응시를 물려받는 조건으로 우리를 산샤로 들여보낸다. <스틸 라이프>는 급격한 변화 앞에서 망설이는 캐릭터처럼 산샤를 보여준 후, 그 같은 환경 속에서도 ‘살아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산샤에 내린 산밍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사내에게 붙잡혀 창고와 같은 공연장으로 끌려간다. 곧바로 마술사의 공연이 시작된다. 돈을 만들어 보이겠다던 그의 손에서 백지 종이 뭉치가 유로화로 변한다. 곧이어 산밍의 눈앞에서 유로화는 중국돈으로 탈바꿈된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앉아있는 산밍에게 마술단 일행이 다가와 강제로 공연 관람비를 내놓으라 한다. 아무 말 없이 산밍이 내놓은 것은 칼이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 마술 공연은 외지인인 산밍의 산샤에 대한 첫인상이면서 지아장커의 산샤에 대한 흥미로운 첫 해석이다. 지금 산샤에서 사기 마술과 같은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전언 말이다. 마술이라는 행위가 눈속임을 통해 비현실 혹은 초현실을 시연하는 것이라면, 그와 유사한 충격을 안기는 장면들이 몇 번 더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중반에는 애타게 과거를 복원하려는 산밍의 머리 위로 UFO가 지나가기도 한다. 셴홍은 그녀만의 자리에서 그 UFO를 목격한다. 이런 장면도 있다. 기억 속 남편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질 무렵, 셴홍의 배경으로 기이한 건축물이 로켓처럼 발사되기도 한다. 그렇게 지아장커는 안개 낀 산샤의 풍경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113만명의 이주민을 발생시키고도, 아직도 건물을 부수는 해머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상황이 말이 되느냐고 묻는다. 2000년의 역사가 스민 사람의 자취를 2년 만에 수몰시켜 버리는 선택이 충격적인 마술이고 납득할 수 없는 초현실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들 배후에서 지아장커는 이 끔찍한 변화를 아무렇지 않게 견딘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는 입장을 들킨다.
 
 ‘변해가는 것’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사라진 것’과 ‘대체된 것’ 사이에 작동하는 욕망을 더 세심히 파악해야 한다. 가령 산샤의 변신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중국 10위안짜리 인민화에만 남은 산샤 그림과 현실 속 산샤의 차이를 만든 욕망을 가늠해야 한다. 화폐에 남겨진 산샤의 옛 모습은 현대화, 산업화의 맹목적인 압력을 추측케 한다. 그리고 돈에 의해 지워진 여기의 산샤와 돈 안에서만 기억되는 그때의 산샤의 역설적 처지는 산밍과 셴홍의 현실로 다시 번역된다. 
 
 16년 전, 관습에 따라 3천 위안을 주고 아내를 샀지만 산밍에게 아내는 가격표가 붙은 상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 말미, 산샤는 그녀의 아내에게 가격표를 붙인 후 그에게 쌓인 그리움의 시간을 포로 삼아 흥정을 한다. 뒤늦게 알게 되는 정보에 따르면, 아내의 오빠는 빚 때문에 그녀를 팔아버렸고, 그녀는 노예처럼 배 위에서 생활해 왔다. 산밍이 그 사실을 알고 아내를 찾아냈을 때, 사실상 아내의 주인 노릇을 하는 늙은이는 그에게 3만 위안을 요구한다. 산샤의 문화를 무너뜨린 집단적 욕망과 아내에게 가격표를 붙이는 늙은이의 욕망은 사실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셴홍은 2년 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한다. 산밍이 산샤에 자리를 잡은 후 주중엔 철거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주말에는 아내를 찾았던 것과 달리 그녀는 산샤 내에 거처를 마련하지 않는다. 남편이 일했던 공장은 폐쇄를 기다리고 있고, 남편 친구를 따라 방문한 장소들 주변은 계속 허물어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결국 그녀는 남편에 대한 감정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2년을 건너온 기대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간 남편은 산샤에서 젊은 여자와 동거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그 급속한 변화는 산샤의 지난 2년을 적확하게 대유한다. 이 맥락을 이해할 때, 남편과 산샤로부터 완전히 뒤돌아선 그녀의 등에 고이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유념할 것은, 셴홍의 남편에 대한 최후의 결정과 산밍의 아내에 대한 마지막 선택이 전혀 상반되는 것 같지만, 유사한 함의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설명하기 전에, 흥미로운 씬 하나를 언급해야 한다. 영화 초반 배를 타고 산샤로 진입할 때 산밍이 올려다 본 다리가 있다. 협곡 사이를 연결하는 그 거대한 다리 근처 전망대를 셴홍은 방문한다. 벌써 날이 저물어 남편을 만날 것이란 기대가 닫혀가던 무렵의 일이다. 다리를 건설한 관계자는 회사의 야심작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한 손님 앞에서 다리의 모든 불을 켜고 화려한 야경을 보여준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전망대 위에서 블루스를 추고 있다. 변화가 강제되는 환경 안에서도 행복한 생활을 낙관하는 산샤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 민감하게 살펴봤다면, 셴홍이 남편을 만나 이혼을 요구하는 한낮의 쇼트에서도 블루스를 추는 다리 위의 사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결별을 각오하는 대상은 새 여자를 만난 남편과 산샤만이 아니다. 산샤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을 단숨에 부숴버린 거대한 욕망도 그에 포함된다. 더 나아가 낙관과 기대, 희망으로 봉합되는 그들의 블루스와도 그녀는 어울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셴홍은 돌아오지 않기 위해 완전한 떠남을 선택하는 인물이고, 산밍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잠시의 떠남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둘 다 되찾고픈 이에 대한 기억을 안고 들어왔지만, 셴홍은 산샤를 통과하면서 남편에 대한 기억을 수거해 가지 않기로 하고, 산밍은 아내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수거해가기로 한다. 유념할 것은, 이러한 선택이 모두 윤리적 주체화의 결과라는 점이다. 산밍은 3만 위안을 달라는 배 주인에게 1년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그 1년의 시간동안 그는 고향에서 다시 광부가 되어 열심히 돈을 모을 것이다. 외관상 보면, 생활 근거지가 산샤의 철거현장에서 고향 광산으로 바뀌는 것일 뿐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양자의 차이는 없어 보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한 아렌트의 개념에 따르더라도, 산밍은 생존과 사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노동’을 하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정합되지 않음에도, 산밍이 보내게 될 1년을 ‘행위’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분명 산밍의 개인적 욕망과 필요를 위한 노동이지만, 그 실천이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스틸 라이프>의 세계에는 빚 때문에 여동생을 파는 사람, 받아야 할 돈을 대신해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람, 집과 추억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개발’과 ‘발전’을 낙관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산밍의 노동은 수거되지 않는 기억 앞에 정직한 길을 걷는 일이다. 철거될 수 없는 삶에 예의를 갖추는 태도로서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향후 1년은, 아렌트가 말한 “다원성의 조건”(5)을 실천하는 ‘행위’의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셴홍은 씬이 바뀌고, 남편을 찾는 동선이 바뀔 때마다 매번 물을 들이키는 여자다. 그녀는 그렇게 해갈되지 않을 결핍을 지닌 자의 표상이다. 남편 곁의 젊은 여자는 산샤, 곧 현대화와 산업화의 꿈이 낙원을 보장하는 현장과 접맥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셴홍의 떠남은 남편과 산샤가 내보이는 가치질서에 뿌리내리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통한다. 에드워드 렐프는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으로,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가지는 것으로, 특정한 대상과 가치를 향해 정신적・심리적 애착을 포기하지 않는 결단으로 파악한다.(6) 셴홍의 ‘떠남’, 즉 남편과 산샤에 뿌리내리지 않겠다는 의미는 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녀의 ‘떠남’ 자체에 이미 윤리적 주체화의 선택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녀가 남편과 산샤의 기억을 수거해 버리기로 한 것은, 자기 삶이 외부 조건에 의해 철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주체적 저항일 수 있다. 
 
 <스틸 라이프>를 <세계>와의 비교 속에서 이야기하면, 지아장커의 전언에 좀 더 확실한 태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그 태도를 말하는 영화적 형식도 훨씬 더 유려하다. <스틸 라이프>에 등장하는 마크로 불리는 청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영웅본색> 속 주윤발이 “우린 모두 옛날을 그리워하지”를 되뇌며 돈을 태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흉내내곤 한다.(<영웅본색> 광동어판에는 주윤발 이름이 ‘마크’다) 주목할 것은, 첫째, 영화 속 주윤발이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사용한 돈이 위조지폐라는 것이고, 둘째, <스틸 라이프>에서 담배가 하층 노동자들 간의 연대와 노동의 건강성을 증언하는 오브제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산샤의 마크는 위조지폐 안에 깃든 욕망을 호기롭게 불태우는 행위를 선망한다. 이로써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에 유의미한 해석을 가하는 이상한 안티 히어로가 된다. <영웅본색>에서 매혹적인 마초남을 연기한 주윤발은 “믿어. 내가 바로 신이니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신이야.”라고 자신만만했음에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말수적은 산샤의 노동자들과 달리 건강한 활기를 보여주던 <스틸 라이프> 속 마크도 결국 산샤의 철거 현장에서 벽돌에 깔려 죽는다. <영웅본색> 속 마크의 죽음이 의리를 저버리는 세계에 대한 대답이었다면 <스틸 라이프>에서 산샤의 물 아래로 수장되는 마크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질문은 <스틸 라이프>에서 매우 미학적인 촬영과 편집을 통해 여러 번 주어진다. 그 중 한 쇼트만 말하면, 산밍이 그의 아내와 철거 중인 건물에서 마주 보는 장면이다. 죽은 마크가 산밍에게 건넨 바 있는 토끼 모양 사탕을 이번엔 아내가 산밍에게 건넨다. 그때 산밍은 사탕의 포장을 풀고 절반을 베어 무는가 싶더니 남은 절반을 아내에게 건넨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높이를 맞추고 쭈그려 앉아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부서진 건물 벽 틈으로 보이는 먼 풍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비현실적으로 허물어진다. 이 비현실성은 16년 동안 떨어져 지냈던 산밍과 아내의 서로를 향한 교감이 산샤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상기시킨다. 아내는 어떻게든 1년 안에 3만 위안을 만들어 와 자기를 데려가겠다는 산밍의 각오를 들었던 터다.(그 전에 아내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을 찾아 온 산밍에게 “중매서줄까요?”라고 말했었다) 산밍의 입장에서는 무모하거나 불가능해보이기까지 한 목표를 안고 산샤를 떠나기 전 아내와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다. 죽은 마크를 실은 배가 산샤의 물 위로 미끄러져 떠나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도 단번에 이해되는 지아장커의 정돈된 대답이 아니다. 영화가 언어를 배제하고 심미적 이미지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질문이다. 
 
 아직 <스틸 라이프>의 진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안개에 휩싸인 산샤의 풍경, 이미 철거 중이지만 완전히 철거되지 않은 집과 건물이 이룬 풍경 등은 설정・재설정 쇼트 이상의 언어성을 갖는다. 그런데 그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고, 평온하면서도 위태로운 느낌은 결국 이 이미지의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산샤를 떠나던 산밍은 다른 노동자들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 이후 홀로 멈춰 선다. 그리고는 철거 중인 건물 사이에 놓인 외줄을 건너는 사람을 바라본다. 이 ‘바라봄’은 그 다음 순간의 다른 ‘바라봄’을 위한 것이다. 산밍은 그 외줄타는 사람에 대한 인상을 갖고 마지막으로 산샤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 쇼트는 <스틸 라이프>의 맨 마지막 장면이다. 
 
 ‘외줄타기’에 임하는 사람은 비좁은 줄 하나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길은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미 선재하는 요구 밖으로 나간다는 건 곧 완전한 배제로서 죽음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산밍이 외줄타는 행위를 바라본 후 해머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산샤의 풍경을 두리번거린다는 것이다. 이 ‘두리번거림’은 배 위의 중국 인민들을 잡을 때, 노동자들이 둘러 앉아 차와 국수를 먹고 담배를 피울 때 천천히 패닝하던 카메라가 가졌던 태도에 대한 적확한 해석이다. 그 순진한 사람들, 변해가는 삶의 조건 위에서 노동으로 답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해석 말이다. 
 
모노레일과 외줄 위의 당신들 
 
 그렇다면 <스틸 라이프>에서 산밍이 바라 본 ‘외줄타기’는 <세계>에서 타오의 출근 수단이 되던 모노레일에 대한 더욱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된다. 두 영화에서 중국이 닿아가려는 미래상은 세계화, 현대화, 자본화의 길 뒤에 있다. 도시화, 산업화를 위한 실천 저 너머에 있다. 죽기 전 아매가 쓴 유서와 죽은 마크를 태운 배는 그 상상적 미래상을 향한 중국의 가열찬 전진. 바로 그 행위와 욕망에 대한 편지다. 
 
 지아장커는 개발, 발전에 관한 논리에 경도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나면, 그 맹목성의 노예가 되기 쉽다고 말한다. 먼저는 자기 정체감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 순간엔 윤리적 주체화의 길을 찾지 못한 채 마치 헛것을 좇는 유령이 되기 쉽다고 말한다. <세계>의 세계공원은 문화 향유의 현장이면서 문화 이식과 파괴의 현장이란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틸 라이프> 속 산샤의 건설 현장은 환경 정비와 삶의 질 개선의 흔적이면서 유적 파괴와 불안정한 삶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 역설로부터 오는 질문들은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는데, 우리 공동체가 그저 살아지는 일상에 의심이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당신은 변해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당신은 대체된 세계에 적응하고 있는가. 이제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지아장커와 그의 영화를 두고 대화를 나누기 원한다면, 이 단순한 질문들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스틸 라이프>에는 <패왕별희>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경극 배우들이 식탁 위에 둘러앉아 무표정하게 게임기를 조작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 풍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낯설고 불편한 긴장은 <세계>와 <스틸라이프>에서 ‘대체된 공간-견디는 인물’이 연루되는 순간, 혹은 ‘낙관적 미래-참담한 현실’이 불화하는 순간에 반복되었던 것이다. <스틸 라이프>에서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거의 매번 등장하는 노래하는 소년은 그런 류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니 그 이상의 심미적 효과를 견인한다.이를테면 유약해 보이는 그 소년이 부르는 가요는 잠깐의 위로의 의미로 삽입된 게 아니다. 멈춰서 기억할 ‘무엇’에 대한 청각적 압력이다. 그들 장면에서 공동체의 속도에 중독된 우리도 각자의 기억을 좇아 노래를 따라 부를 이유를 찾아봄직하다.
 
 지아장커가 영화를 찍기 위해 세계공원과 산샤라는 공간을 선택한 순간, 배우가 감당해야 할 연기의 반이 끝났다고 본다. 감독이 해야 할 연출의 반 이상이 해결됐다고 본다. 그만큼 그는 공간의 상징성을 파악할 줄 알고 그것을 이용해 중국인의 ‘지금 여기’에 대한 영화를 완성해낸다. 이때의 중국인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노동을 경험하는 인간이다. 사실 ‘경험’을 관념으로 이해한다면, 감정과 사유로 내려앉은 감각대상에 대한 기억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변화하는 물질적 공간을 감당해가야 할 우리의 바람직한 출발은 윤리적 ‘기억하기’가 시작점이어야 한다. 이는 베르그손의 주저 이름이 ‘물질과 정신’이 아니라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인 이유이기도 하다. 
 
 정도 차가 있겠지만, 우리도 기억을 강제로 각색하고,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 무소불위의 욕망을 이고 선 세계에서 이미 밀려나는 중인 인생이거나,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인생일 수 있다. 이제 ‘적응하기’가 과제로 남았다면, 윤리적 ‘적응하기’를 위해 지아장커가 만든 이미지와 동행해도 좋겠다. 강조해서 말하면, <세계>와 <스틸 라이프>는 욕망에 의해 철거되는 마음의 집들을 심미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한번 철거되면 수거하기 어려운 기억들을 윤리적으로 마주하게 하는 저력이다. 지아장커가 변해가는 것을 향한 밀려나는 자의 응시를 통해 주문하는 태도, 우리도 지니고 있을 몸의 기억과 마음의 감각에 대한 요청은 그런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글: 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영화평론가.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1) 장 보드리야르, 하태완 역,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5, pp.40-41.
(2) 크리스티안 노벅-슐츠, 민경호 외 역, 『장소의 혼: 건축의 현상학을 위하여』, 태림문화사, 2001, p.25.
(3)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6, p.175.
(4)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6, p.175.
(5) 한나 아렌트, 앞의 책, p.35.
(6) 에드워드 렐프, 앞의 책,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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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영화평론가)
안숭범(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