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에는 괴물이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흔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범인, 그리고 이를 추적하며 범인을 만들어내려고까지 하는 두 형사, <마더>의 도준(원빈), 그리고 도준을 감싸고 돌며 점차 기괴해지는 도준 엄마(김혜자)의 모습에서 괴물을 읽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에 이르러 비로소 괴물의 모습을 한강에 드러낸다. 물고기이며 물고기가 아닌, 환경파괴에 의한 희생물이면서 인간을 공포에 떨게 하는 가해자(?) 괴물. 그렇게 본다면 <설국열차>의 열차는 인류를 격리하는 동시에 이들을 동력원으로 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무기질의 괴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괴물’은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지만, 위험적 요소, 인간에게 얼마간이라도 위해를 가할 수 있고, 가하는 대상이라는 괴물의 일반적 관념을 그대로 유지한다. 영화 <옥자>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괴물’의 이미지를 이어가면서 거대한 시스템으로서의 괴물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거대한 몸집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을 주는 옥자. 너무나 착해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는커녕, 오히려 실험실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하는 옥자. 낸시/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돼지”라 부르고, 동물해방전선(ALF)의 단장 제이(폴 다노)는 “소중한 생명체”, “동물”이라 부르는 옥자. 그러나 둘 모두 옥자가 무엇인지 충분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 두 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옥자야!” 외치며 서울과 뉴욕을 누비는 미자. 그녀의 모습은 괴물로서의 옥자를 보여주면서도 도대체 우리 현실에서 왜 괴물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한다.
영화 시작, 화려한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루시 미란도는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그에 비해 훨씬 많은 육질을 제공하는 GMO 돼지를 양산하기에 이른다. 대지어머니의 선물, 사랑스러운 생명체 등등의 수많은 수식이 이 돼지에게 붙는 이유는 그 실용성에 있다. 애초에 이 새로운 ‘슈퍼돼지’는 보다 효율적인 육류 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 식품이다. “등심, 안심, 삼겹살, 목살! 이게 이놈 팔자여.” 라고 외치는 미자의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또한 옥자의 ‘도구-목적성’을 알고 있다. 이 돼지는 옥자라는 이름보다 등심이나 목살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적합하게 태어났다는 것. 미자에게 금돼지를 내밀며 “지금부터 이게 옥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옥자의 가치는 실용성, 효율성에 기대고 있으며 옥자의 수단적 가치가 곧 존재가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 미자는 옥자와 산에서 함께 살며, 사냥과 채집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미자와 옥자의 관계는 친구, 가족, 동지 등으로 불리는 어떤 원형, 조화로운 공동체의 모습이다. 고기가 되기 위해 인공적 조작을 거쳐 태어난 옥자는 산이라는 자연 생태계의 일원이면서 인간 공동체의 역할도 충분히 감당해낸다. 감나무와 계곡 웅덩이에 자신의 ‘몸을 던져’ 미자에게 감과 매운탕 거리를 주고, 미자를 충실히 따르는 옥자. 활용성뿐만 아니라, 인간 미자와의 교감이 가능한 옥자는 동반자의 역할도 충분히 해낸다.
ALF는 미자와 비슷한 관점으로 옥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미자를 자신들의 세력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미란도 코퍼레이션이나 ALF는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윤리적, 감정적인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우위임을 밝히는 그들의 언행과 달리 생태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인간과 동물을 용도로 사용하는 모습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용도로서 옥자를 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사실상 별 다를 바 없다. 일종의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ALF의 입장에 미자가 설 수 있었기 때문에 옥자를 구할 동력을 얻게 되지만, 유머러스하게 표현된 이들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두 ‘이즘’간의 싸움이다. 옥자를 차지한다는 것이 곧 이들이 상징하는 관점, 그리고 이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일환인 셈이다.
영화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옥자는 반려동물로서 자리매김한 듯 보인다. 그러나 미자는 옥자를 친구처럼, 하나의 인격체와 같이 대하지 않는다. 이 둘의 관계에는 어떤 미묘한 거리가 생겨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미자가 옥자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거나,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어딘가에 갇혀 고기가 되기를 기다리는 옥자의 동종을 목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자가 끝내 옥자를 ‘구매’하는 행위는 미자를 위시한 생태주의가 낸시 미란도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에게 내미는 제휴와 협정이다. 자본주의의 방식을 통용하는 대신, 승리의 상징인 옥자를 차지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자신 논리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옥자의 생명을 구한다는 형식을 서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전 협정을 맺고 되찾은 옥자는 미자에게 승리이자 패배의 상징이다. 옥자와의 미묘한 거리감은 이에 기인한다. 이것은 현재 자본주의를 대체할 더 나은 이념이 없다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의 사유와 상상력의 한계, 인류 사회의 한계가 갖는 슬픈 문제 해결방식의 피날레다.
미자는 옥자를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환원하는 데 동의했고, 이것은 곧 옥자가 고기라는 것, 적어도 고기라는 용도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이자 먹거리인 생명체, 우리는 이를 통틀어 ‘가축’이라 부른다. 영화에서 희봉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별다른 저항 없이 옥자를 내주려 했던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옥자와 새끼 옥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편안해 보해지만 체념에 가까운 그런 것이다. 그네들은 돌아와 한국의 어느 산골에 산다. 그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유지하는 것 뿐이다. 우리들이 알면서도 GMO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적응해야 하듯이 말이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암묵적으로 동조해야만 한다. 한줌의 똥을 누고 목마를 타고 떠나버린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는 인간의 자기유지 시스템이 버티고 있는 한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결국은 모두 한가로운 담론놀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옥자는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 역시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으므로.
글: 이 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