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말을 걸어올 때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길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 영화 초반 정원의 내래이션
우린 이미 죽은 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상태에 놓여 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 상태의 연장을 우린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평범한 삶이 유지된다는 건, 영원한 소멸에 대한 ‘망각’을 습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연인들 간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는 멜로드라마는, 죽음(혹은 ‘죽음에 준하는 상황’)이 관계 안에 틈입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영화 속 인물 중 누군가는 완전한 이별에의 대처를 요구받고, 우린 그 불가능한 요청 앞에 선 그와 함께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운명을 향해, 제 길을 가는 시간에 대해 그도 우리도 저항할 수단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모든 문제는 사랑이라는 충만한 신비 때문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에 따르면 사랑이란, 상대를 의심없이 존속해야 할 존재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영원에의 약속’과 결속된 상대가 죽음으로 소멸된다는 건 끝내 동의되지 않는 절망이다.(1) 다시 역설적인 말을 하면, 그 ‘받아들일 수 없음’의 강도와 지속성에 의존해 살아남은 자의 내면 안에서 사랑은 비의적으로 연장된다. 존재의 일부가 붕괴했음에도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허진호는 <8월의 크리스마스>(이하 ‘<8월>’)에서 <봄날은 간다>를 거쳐 <행복>에 이르기까지, 그 겹겹의 역설을 성찰하는 예민한 시선을 보여준 바 있다. 그 시작은 <8월>이었다. 사랑의 감정도 다루기 힘들지만, 죽음은 ‘존재에의 존속’에 대한 우리의 노력을 최종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불가피한 사태다. 정원(한석규 분)은 정확히 그 이중구속의 상황 앞에서 죽음이 걸어오는 말을 듣고 있다. 무의미한 삶에서의 탈출(사랑)과 비존재로 소멸되는 운명에의 귀속(죽음) 사이에서 처음 경험하는 고독과 다투고 있다.
<8월>은 매우 정직한 멜로드라마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편지>나 <약속>과 다른 결을 가진다. 피차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준용한 듯 보이지만, <8월>에서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파국으로 들이닥치는 극적 소재가 아니다. 영화는 이전부터 죽음과 동행해 온 한 사내가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태도를 전시한다. 그래서 <8월>은 죽음을 이용해 사랑을 둘러싼 정서를 폭발시키지 않는다. 특별했던 관계의 형성과 소멸 사이에서 인물들의 자기의식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지금부터 멜로드라마로서 <8월>의 ‘다른 결’을 음미하기 위해 정원을 향해 죽음이 걸어온 말들을 다시 들어보기로 한다.
너무 늦은 깨달음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너무 늦은 깨달음 앞에서 망연자실하는 순간을 맞곤 한다. 심지어 관객보다도 결정적 정보를 늦게 알게 된 주인공의 비탄을 결말의 정조로 활용한다.(2) 이 역시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속한다. ‘뒤늦은’이란 수식어는 대게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을 암시한다. 운명의 권능을 역설한다.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스토리텔러는 그 순간의 각별한 체험을 종국의 어느 지점에 숨겨 놓고, 정교한 사전 작업을 기도한다.
그런데 허진호는 <8월>의 시작부터 실존적 깨달음을 궁리하는 존재로 정원을 묘사해간다. 그는 엄마의 죽음으로 생긴 빈 자리를 응시하며 아버지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건너다본다. 끝까지 병명은 알려지지 않지만, 그의 육체는 세계와의 이별에 대한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온다. 그래서 <8월>의 슬픈 정조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천천히 점증한다. ‘뒤늦은 깨달음’의 주인은 정원과 우리가 아니라 순전히 다림(심은하 분)의 몫이다. 그리하여 서사 내 상징적 위치를 고려하면, 그녀의 이름은 김다림이 아니라 ‘기다림’이라 해도 무방하다. 오로지 그녀만, 죽음에 근접해가는 정원의 생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정원의 텅 빈 사진관 곁을 맴돌며 첫사랑의 완성을 기다린다.
그처럼 <8월>은 ‘너무 늦은 깨달음’의 순간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이를테면 다림의 ‘너무 늦은 깨달음’은 정원의 ‘너무 이른 깨달음’과의 대조 속에서 고통이 배가된다. 정원의 감정이 선명히 읽히는 쇼트들 안에는 죽음을 암시하며 흐르는 시간이 두드러져 보인다. 예를 들면 정원은 장례식장에 가서 한 죽음의 ‘이후’를 오래 지켜보는 인물이다. 수산시장에서 활어가 회칼에 죽어나가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 쇼트에는 자신의 가까운 미래를 가늠하는 정원의 아픈 시선이 있다. 정원의 내면을 끊임없이 할퀴는 종말의 얼굴을 가진 시간이 있다. 정원과 다림의 만남 장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이스크림도 유사한 성격을 내보인다. 단순하게 말하면, 8월의 아이스크림은 오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 없어질 누군가의 삶을 환유한다. 물론 그 삶과 동일한 유통기한을 가지는 누군가의 사랑을 유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종반, 정원이 어지러움을 참으며 서울랜드 벤치에서 다림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은 그러한 수사적 독해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기대에 부푼 데이트의 순간에, 다림과 정원의 후경에서 다가오던 웨딩 촬영 커플은 곧이어 프레임 밖으로 매몰차게 벗어난다. 결국 <8월>은 정원과 다림,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의 바람대로 귀결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일상이 펼쳐지는 중 정원은 종종 병원을 찾고 그때마다 굳어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급기야 그를 응급실로 보낸 후, <8월>은 임박한 모든 것의 소멸을 숨기지 않는다. 이제 정원은 아무도 찾지 않는 병실에서 영원히 혼자가 되는 삶을 미리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정원은 죽음에 접근하는 시간을 느끼면서 ‘너무 이른 깨달음’에 합당한 태도를 실천해 간다. ‘무한성의 결핍에서 오는 유한성의 절망’(키에르케고르)을 ‘자기 이해’를 위한 동력으로 바꿔 간다. 영화 후반, 정원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에도 다림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포기한다. 카페 유리창 저 너머엔 여느 때처럼 주차 단속을 하는 다림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림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카페 유리창을 쓸어보는 것으로 그녀를 단념한다. 그는 그렇게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다림)을 추억으로 돌리려 한다.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감정에 거리를 둔 채 그저 향수하려 한다.
<8월>이 ‘다른 결’의 멜로드라마라는 주장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유영길(<8월>을 찍고 그는 영화 속 정원처럼 죽는다)의 카메라다. 그가 만든 영상들은 언어적 설명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 정원의 실존적 상태를 적확하게 증언한다. 예컨대 그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자연광의 느낌까지 포착하면서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죽음의 뉘앙스를 전한다. 어떤 작위적 움직임이나 과장적인 조명의 도움도 없이, 우리는 그가 만든 정갈한 이미지 안에서 ‘현존재의 시간성’(하이데거)과 조우한다.
<8월>을 빛나게 하는 여러 쇼트들이 있지만, 정원에게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삶의 보편적 현실태로 인격화되어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영화 중반, 정원의 사진관에 대가족이 사진을 찍으러 들어온다. 이때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할머니는 “아이고. 아들이 해준 건데 쓰는 게 낫지”라면서 안경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촬영 후, 아들은 독사진 한 장을 더 찍자며 할머니만 프레임 내에 홀로 앉힌다. 언어화되진 않았지만, 영정사진에 대한 요청과 승낙이 순간적으로 이뤄진다. 그때 할머니 저편에 따로 모인 자녀들이 나눈 대화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한 낙차를 전시한다. 지금 할머니는 죽음 이후 지상에 남겨질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프레임 밖에서 자녀들은 아파트 분양과 평당 가격 등을 화제로 수다를 떨며 할머니를 다른 세계로 밀어낸다. 죽음 앞에 선 단독자의 공허가 할머니의 표정을 짧게 간섭한다.
그날 저녁, 정원은 술을 사달라며 정원에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 다림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나 밤은 깊어가고 사진관 밖으로는 비가 쏟아진다. 그때 텅 빈 사진관을 찾아온 사람은 다림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영정사진을 찍었던 대낮의 그 할머니다. ‘사랑의 시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걸어 들어온 ‘죽음에의 예감’. 고운 한복에 단정하게 머리까지 매만지고 온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 앉아 아들이 선물해줬다는 안경을 벗는다. 이제 정원과 할머니 사이, 그들의 얼굴과 얼굴 사이에 카메라 외엔 아무 것도 없다. 한 죽음과 다른 죽음, 한 고독과 다른 고독이 서로를 건네 보며 짓는 위로의 미소가 서로를 향한다. 그날 정원은 아버지의 담배를 몰래 꺼내 피운 후, 천둥치는 밤을 견디지 못한 채 새벽까지 괴로워한다. 급기야 늙은 아버지 방으로 건너가 그 옆에 누워 잠을 청한다.
린다 윌리엄스는 멜로드라마가 ‘너무 늦은’과 ‘때마침’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파토스와 행위의 변증법을 성사시킨다고 말한다.(3) <8월> 역시 정원과 다림의 반복적인 엇갈림과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을 교차시키며 그러한 관습을 실천한다. 그런데 다림과의 약속이 어긋난 자리를 대체하는 ‘죽음을 암시하는 시간’과 그것의 인격화 된 형상들은 <8월>의 ‘다른 결’을 웅변한다. 허진호의 데뷔가 특별했다고 기억하는 이들 중 일부는 그 ‘다른 결’의 뉘앙스를 감지한 것이라 믿는다.
순수에의 향수
남녀의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는 최종적인 어긋남 이후에 도착하는 비애감을 견딜 수 없게 한다. 부당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의 고통에 우리를 결속시킨 후 동정과 연민의 파토스에 휩쓸리게 한다.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그 비극은 영원히 상실한 고향으로서 어머니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어머니의 자리를 결코 메울 수 없다는 서사적 판결문 때문이다. 죽음은 이상적(이라고 믿어지는) 연인을 만나더라도 그와 합일될 수 없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확인시키는 절대 권력이다. 그의 무의식에 깃든 근원적 나르시시즘이 상대로부터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최종심급이다. 이처럼 멜로드라마를 보는 일은, 반복 충동의 완전한 해소, 곧 오이디푸스 궤적의 평화로운 종결이 불가능하다는 선언문을 슬프게 읽어 내려가는 과정이다. <8월>에서도 죽음이 정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린 ‘여성’이란 말 앞에 ‘Th̸e’를 붙인 라캉의 논리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다림은 죽어가는 정원에게 다시 ‘역설적’ 기표로 갈라진다. 그녀는 순수에의 간절한 향수이면서 영원히 상실된 순수를 환유적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표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시적으로 보면 <8월>에는 일시적이나마 ‘환유적 대체’가 성사되(는 듯 하)면서 의미론적 섬광이 일어나는 순간이 존재한다. 영화 초반 정원의 사진관에 지원(전미선 분)이 찾아온다.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오랜 시간 짝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자녀 둘을 두고 있다. 그런 그녀가 고향에 내려온 배경엔 남편의 계속되는 노름과 폭력이 있다. 지원이 사진관을 들르기 전, 정원의 여동생은 “오빠, 아직도 지원이 좋아해? 그거 생각나? 옛날에 오빠 학교 다닐 때 책에다가 지원이 사진 껴놓고 다녔잖아?”라고 묻는다. 그때 그는 마당을 향해 수박씨를 뱉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지원이 “왜 아직 결혼 안 했어?”라고 묻는다. 그녀 앞에서 정원은 “너 기다리느라고”라고 호방한 웃음을 흉내 낸다. 우리에게 그 대답은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날 정원을 찾아와 지원이 건넨 말의 핵심은, 사진관 정면 진열대에 놓인 자기 얼굴이 나온 흑백사진을 내려달라는 요청이었다. 불가능한 순수에의 향수를 끝내달라는 요구였다.
영화 마지막 신은 지원의 사진이 걸려 있던 자리에 다른 사진이 대신 걸려 있는 것을 보여준다. 정원을 환희의 세계로 이끌었던 다림의 미소가 거기에 있다. 지원에서 다림으로 사진 속 얼굴이 바뀐 것은, 정원의 내면에서 일어났을 환유적 대체의 흐름을 적확하게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행위는 정원과 다림의 사랑을 모두 지켜본 우리의 열망과 맞닿아 있다. 추측컨대 사진 교체 작업은 정원의 사후에 그의 늙은 아버지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그 앞 신에서 정원은 다림을 향한 마음(다림이 나온 사진, 다림을 향해 쓴 편지)을 자신의 편지함에 깊숙이 감추기 때문이다.
그 절제의 신을 좀 더 소상히 부연하면, 첫 쇼트는 다림과의 첫 만남을 향수하는 정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정원은 사진관 안에서 창 밖 가을 플라타너스 아래를 조용히 응시한다. 그 이유는 8월의 어느 더운 날 그녀가 그 나무 아래로 처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다음 쇼트에서 정원은 열띤 사랑이 시작될 무렵 찍은 다림의 사진을 편지함에 넣어버린다. 그 사진은 공교롭게도 지원의 얼굴이 나온 사진 앞에 포개어진다. 다림에게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도 다림의 얼굴 사진 곁에 가지런히 정리된다. 그렇게 그는 8월부터 시작된 생의 마지막 불꽃을 누구에게도, 심지어 다림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정원이 죽고 난 후, 사진관 진열대에 걸린 다림의 사진은 정원의 편지함을 누군가 열어봤다는 걸 전제한다. 정원이 다림에게 쓴 편지를 읽고, 다림의 사진에 깃든 내밀한 감정을 누군가 확인했다는 걸 의미한다. 정원의 늙은 아버지가 해낼 수 있는 정원에 대한 최선의 애도작업. 물론 이 애도작업은 ‘애도에 대한 애도’를 포함한다. 끝내 완수하지 못한 정원의 다림에 대한 애도(혹은 자기 안에서 포기된 정원의 사랑에 대한 애도)를 애도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궤적 안에서 해명되는 사태는 아니지만, ‘환유적 대체’가 성사된 듯 보이는 또 다른 장면도 있다. 다림의 사진과 그녀를 향한 편지를 가슴에 묻던 정원은 그 신 마지막 쇼트에서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는다. 그때 정원은 비오는 밤 홀로 사진관을 찾아 온 할머니의 자리로 간다. 그 할머니가 앉았던 의자 위에 앉아 지상에 남길 마지막 표정을 연습한다. ‘죽음에의 예감’이 ‘죽음에의 수용’으로 대체되는 그 순간, 우리는 죽음 앞에 선 단독자가 침묵으로 전하는 밀어를 듣게 된다. 엷은 미소를 내보이는 정원의 얼굴은 잠깐의 프리즈 프레임 이후 곧바로 그의 장례식장 안으로 옮겨진다. 그 서글픈 잠깐의 정지, 사진적 순간은 인생의 덧없음을 ‘찰나’의 감각으로 표지한다.
이제 마지막 신을 더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 속 모든 인물에게 자기 몫의 숙명을 나눠주며 흐르던 시간은 초원사진관에 겨울을 데려온다. 아들에게 물려준 사진관을 다시 물려받게 된 늙은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자 그 텅 빈 프레임 안으로 한 숙녀가 걸어 들어온다. 소녀티를 완전히 벗은 다림이다. 다림은 지원의 얼굴이 걸려 있던 자리를 차지한 한 사진을 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지난여름의 자기 얼굴을 타인인양 마주한다. 평범한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따라 감정의 비약을 의도한다면, 거기서 그녀는 눈물을 떨구며 아픔으로 끝난 추억을 소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씩 웃고 쿨하게 뒤돌아선 후 차분하게 사라진다. 그때 외화면의 외재음향으로 정원의 목소리가 입혀진다. 이때의 언어들은 사랑하는 다림에게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 속 한 대목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후의 정원이 내뱉는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렇게 <8월>은 담담해서 더 애절한 유령의 목소리로 끝난다. 이 엔딩 장면에서 우리의 내면에 스미는 멜랑콜리(4)는 너무 금욕적이어서 관능적인 쾌감이 된다. 그 언젠가 잃어버린 절대적 사랑의 그림자로 다가온 소녀, 그 순수하고 서툰 아름다움을 향한 절제된 배웅이 거기에 있다. 그녀를 결국 신기루로 받아들이기로 한 정원은 결국 홀로 영원한 결핍이 된다. 우리는 <8월>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무’의 세계로 돌아간 정원과 소녀에서 숙녀의 세계로 진입한 다림 사이에서 저마다의 순수를 향수하게 된다.
산문적 삶을 넘어
멜로드라마는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평범한 지속의 시간을 찢는 특별한 순간에 의존한다. 에드가 모랭은 우리의 일상적 삶을 산문적이라고 표현한다. 반복되는 상황과 사건들로 형성되는 우리의 일상적 루틴은 일정한 길이로 나열되는 긴 문장들처럼 안정적이다. 그에 반해 사랑이란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는 힘이며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현실에서 시험되는 과정은 산문과 시 사이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멜로드라마에서의 사랑, 곧 평범성에 머물지 않는 시적인 감정은 평범한 경험세계에서 오래 지속 가능한 실체가 아닌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는 그 주제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8월> 역시 산문적 삶과 시적인 삶 사이의 대화와 길항을 가시화한다. 우리는 <8월>에서 정원의 직업이 왜 사진사여야 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 분)의 직업이 왜 소리 녹음가(사운드 엔지니어)인지를 궁금해 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찰나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것을 붙잡아두려는 사람이다. ‘시적인 것’, 혹은 그 순간의 신비를 ‘지금 여기’에 연장하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문적 삶을 뚫고 ‘시적인 것’으로 들이닥친 그것을 읽어야 한다. 정원과 상우의 ‘이미지-행위’(필립 뒤바), ‘소리-행위’에 개입된 그들의 의지와 감정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결국 멜로드라마란 각별했던 순간을 추억하는 자와 추억할 수 없는 자, 추억하지 않는 자 사이의 거리를 활용하는 장르다. 다림의 환한 미소가 수줍게 빛나는 사진은 정원이 죽기까지 간직한, 어쩌면 죽음 이후로 데려간 ‘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살아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의 형상이었기에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영화 중반, 밤늦도록 다림과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정원은 군대 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초소에서 방귀 냄새가 났는데 군인들은 아무도 자기가 뀌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무반에서 다른 군인이 과거에 그 초소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애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곳에서 한 군인이 자살한 적 있다는 것이다. 정원이 우스갯말로 전한 이 에피소드는 정원과 다림의 연애과정을 집약한다. 방귀 냄새는 찰나에 사라질 수 있지만, 그 순간을 믿는 자에게는 실체를 가진다. 그렇다면 초소를 떠나지 않는 군인 유령에 대한 정보는, 죽은 이의 흔적이 살아남은 이 안에 현존하는 사태에 대한 알레고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궁금증 중 하나도 그 알레고리와 관련된다. 정원과 함께 한 시간의 흔적이 다림의 마음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은 것일까. 그렇게 보면, 정원이 찍은 다림의 사진과 정원이 들려준 군인 유령의 방귀 냄새는 산문적 삶을 흔들어 깨우는 순간의 신비를 환기시킨다.
<8월>은 한 사람이 죽거나 죽음에 준하는 수준에 이르는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따라 애도에의 요청으로 나아간다. 우린 죽은 정원을 기억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경유해 ‘순수에의 향수’를 넘어 ‘상징화를 통한 애도’로 나아가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멜로드라마는 관객이 알고 있는 것을 등장인물로 하여금 너무 늦게 깨닫게 하거나 끝까지 파악하지 못하게 하면서 비약적인 긴장을 파생시킨다. <8월>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정원의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나날에 대해 다림은 우리보다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죽음에 근접한 정원이 병원에 입원한 줄 모르는 다림이 사진관 유리창을 깨뜨릴 때, 슬픔은 우리의 몫이 된다.
그 유리창은 죽음을 예감한 정원이 타인에게 세워둔 마음의 경계면이었다. 다림은 “나 들어가도 되냐구요?”라는 수줍은 질문과 함께 그 경계면 안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존재였다. 그러나 다림은 정원의 죽음으로 생긴 실재의 구멍을 메우는 추모의식에 제대로 동참할 수 없다. 다림을 향한 정원의 마음에 합당한 상징화 작업을 위해서는, 그녀가 정원의 내막을 더 소상히 알았어야 했다. 그렇게 허진호는 죽은 정원을 향한 적실한 상징화 작업을 영화 밖 우리에게 전가한 후, (다림 스스로는 잘 모르지만) 정원의 초인적 배려를 거쳐 숙녀가 된 다림을 놓아준다.
죽음과 동행하기
죽음에 임박한 정원이 병원에 실려 간 줄 모르는 다림은, 정원의 사진관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벌써 여름은 지났고 이제 그녀의 표정에는 가을의 수심이 가득하다. 타지로 근무처를 옮기게 된 다림은 정원에게 그 소식을 전할 수 없어 전전긍긍한다. 발령지로 옮겨가는 날, 그녀는 결국 마음이 담긴 편지를 사진관 문틈 사이에 꽂아둔다. 그런데도 이후에도 한참이나 소식이 없자, 어느 밤 다림은 사진관을 몰래 찾는다. 아직 그 자리에 꽂혀 있는 편지를 발견하고는 이번엔 빼내려 한다. 그런데 변색되기 이전의 감정이 담겼을 그 편지는 사진관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버린다.
바로 그 다음 신은 <8월>의 서사 전체를 압축하는 셔례이드를 가진다. 병원 병상에서 잠을 자던 정원의 표정에 미소가 비치는 쇼트. 다림과의 행복한 8월이 정원의 꿈속에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고, 달콤한 배경음악의 갑작스러운 중단과 함께 그는 현실로 돌아온다. 마음을 덥히던 여름은 지나갔고, 이제 다림과의 추억을 정리해야 한다. 그 다음 신에서는 그러한 운명의 요구가 더욱 선명한 청각적 기표로 들이닥친다. 가을을 병원에서 보낸 정원이 겨울의 초입에 사진관으로 되돌아온다. 쌓인 우편물 더미에서 다림의 편지를 발견한 그는 조용히 지난 계절의 그녀 마음을 읽는다. 다시 엷은 미소가 얼굴에 스칠 무렵, 이번엔 괘종시계 소리가 프레임을 뒤흔든다. 정원은 편지를 접으면서 그녀 쪽으로 자꾸 자라는 마음까지 함께 접는다. 그처럼 <8월>은 죽음을 현실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정원의 추운 계절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여기서 죽음을 수용해 온 정원의 지난 모습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그는 병원에 다녀온 날이면 홀로 남겨질 늙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비디오테이프 재생순서를 적거나, 사진 현상기 작동법 순서를 적었다. 그는 가까이 온 죽음과 미리 동행하면서 남겨질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성실히 실천해 온 셈이다. 사진 현상기 작동법을 적은 날 밤, 그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자기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오열한다. 늙은 아버지가 숨죽여 우는 그 소리를 듣고 그의 방문 앞에 선다. 이때 카메라는 아들의 방문 밖에 선 아버지의 실루엣만을 보여준다. 그의 실루엣에서 읽히는 건, 침묵으로 부동하는 절망과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자의 자기 다짐이다. 죽음과 동행하는 아들을 위해 지녀야 하는 어떤 ‘절제’가 거기에 있다. 늙은 아버지가 정원에게 취하는 그 태도는 <8월>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성찰과 공감의 거리를 대변한다.
결국 <8월>의 스토리텔링은 ‘시적인 것’으로 다가온 한여름의 사랑이 추운 겨울을 견디며 이어질 수 있는지를 지켜보게 하는 실험이다. 장르론적 관점에서 유다른 개성은 아니다. 연인간의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는 시간의 흐름에 변색되지 않는 사랑을 실험하곤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수지 분)이 나눈 서툰 첫사랑도 그 해 겨울을 넘길 것인가에 대한 실험극이었다. 서연은 ‘건축학개론’ 수업을 들으면서 서로의 첫사랑을 시작할 무렵, 정릉의 비밀스러운 집 안에 화분을 갖다 놓는다. 화분에 꽃을 심은 후 설렘의 태도로 다음 봄을 기다려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서로간의 오해를 풀지 못하고 겨울의 초입에 사랑을 잃는다. 첫눈 오는 날 빈 집에서 만나자던 약속도 허무하게 종결된다. 홀로 눈을 맞으며 서연은 그 빈 집에 들르는데, 이때 카메라는 서연이 가꾸고자 했던 화분의 꽃이 죽어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지난 계절을 달궜던 사랑의 다짐이 그 화분을 클로즈업한 셔레이드에 이르러 아프게 무너져 내리는 셈이다.
<8월>에서 다림의 대사를 복기해보면 정원은 8월에 태어났고, 생의 마지막 해 8월에 다림을 만나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오래 갈 수 없으리란 예감을 딛고 다가와 예감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도처에 편재하는 숱한 사랑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구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산문적 삶을 멈춰 서게 하는 기적의 섬광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8월>을 지나친 이가 있다면, 다림에게 달려가는 대신 죽음이 걸어오는 말을 경청하며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는 자리로 나아간 정원의 순간을 권한다. 우리 안의 불안을 일깨우는 인물(에토스)과 행동들의 배치로 완성되는 이야기 구조(미토스)가 완벽하게 정합하는 이 비극의 찰나에서 당신도 당신대로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낭비되는 쇼트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갈했던 <8월>과 <봄날은 간다>와 같은 작품을, 그 절제된 초심을 허진호에게 다시 부탁하고 싶다. 누군가는 그 같은 기대 속에 산문적인 삶을 버텨내면서, 다림의 쿨한 미소까지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1) 구인회, 『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 한길사, p.276 재인용.
(2) 존 머서·마틴 싱글러, 변재란 역, 『멜로드라마-장르, 스타일, 감수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p.147.
(3) 존 머서·마틴 싱글러, 변재란 역, 『멜로드라마-장르, 스타일, 감수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p.172 재인용.
(4) 멜랑콜리에 대한 해설은 다음 책 참고. 줄리아 크리스테바, 김인환 역, 『검은 태양』, 동문선, 2004, pp.15-16.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영화평론가.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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