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합병, 우크라이나 침공, 인터넷을 통한 가짜뉴스 살포 등 러시아와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자 서구의 언론매체들은 반복적으로, 어쩌면 강박에 가까울 만큼 러시아를 표적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지식과 문화를 전달하는 공영방송에서까지 이런 흐름을 따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독 공영채널 아르테(Arte)는 고집스럽게도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흐름에 편승하기로 했다.
프랑스-독일 합작 공영방송 채널인 아르테(Arte)는 노르웨이에서 제작된 18부작 드라마 ‘오큐파이드(Occupied)’를 방영했다.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이 드라마에서,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가져갈 목적으로 (유럽연합의 동의를 얻어) 노르웨이 영토를 점령한다. 극 중 유럽연합도 제 역할을 못 하지만 어쨌든 침략, 조작, 위협, 살인을 저지르는 주체는 다름 아닌 러시아다. 하지만 “악역이 누구인지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라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실제로 주 노르웨이 러시아 대사도 드라마의 제작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 대사가 완성작에 대해서도 과연 만족스러워했을지 의문이다. 이 드라마는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러시아에 협력했던 극 중 노르웨이 총리의 모습이 나치에 협력했던 비드쿤 크비슬링(노르웨이의 정치가)이나 필리프 페탱 등과 비교되는 만큼, 러시아와 나치(실제로 과거 노르웨이를 점령한 바 있는)가 꼭 닮은 평행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까지 방영된 ‘오큐파이드 시즌 2’에서는 최근에 일어난 크림 반도 합병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다만 드라마 제작자들은 “현실과의 평행선상에 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의견을 밝혔다.
이런 ‘현실과의 평행선’을 보여주기 위해 아르테는 중국과 한 태평양 섬나라 간의 갈등이나 미국과 쿠바, 프랑스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전개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신(新)냉전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는 엔터테인먼트의 장에 ‘이상적인 악역’인 러시아를 내세우는 편이 더 쉬울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2018년 1월 16일 저녁 아르테에서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런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픽션이 아닌 화제가 됐던 최근의 이슈가 다뤄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당선으로부터 1년이 되는 때에 미국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푸틴vs.미국’(영어 원제는 ‘푸틴의 복수’)이 방영된 것이다. 아르테의 프로그램 진행자는 보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이 다큐멘터리에 쏟아부은 막대한 노력과 높은 완성도에 대해 감탄하며, “최초로 버락 오바마 정부 인사들과 중앙정보국(CIA) 정보원들에게 발언권을 준 것”이라고 자신 있게 평가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평생의 모욕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면서, “러시아의 수장과 미국의 민주주의 사이에 거대한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국영방송인 러시아텔레비전(RT)이 흑백논리와 조작방송으로 비난을 받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던 그 날만큼은 아르테가 RT를 앞서고만 셈이었다.
다큐멘터리는 “1999년 12월 31일, 우리의 역사가 시작됐다”며 서두를 연다. 이날은 보리스 옐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총리이자 과거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대원”이었던 푸틴에게 정권을 이양한 날이다. “과거의 스파이”면서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세우고자 했던 급진주의자”이기도 한 푸틴의 손안에서 많은 것들이 무너져갔다. 언론은 정권에 종속됐고, 반대 세력은 감옥에 갇혔으며, 서구 국가들은 다시 적이 됐다. “옐친은 죽기 직전 측근들에게 푸틴을 후계자로 세운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고 말했다”고 할 정도였다.
여기서 몇 가지 내용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러시아 경제가 무너진 것은 대통령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 국민들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국회가 옐친 대통령의 ‘충격요법’에 반대하자 그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대포를 날렸다. 이후 국민투표(이 또한 조작된)를 통해 개헌을 단행한 그는 언론장악과 선거공작은 물론 미국 선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연임에 성공했다. 덕분에 옐친 대통령은 이 모든 민주주의적 업적으로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정작 본국인 러시아에서의 인기는 그보다 낮았다.
푸틴이 ‘우두머리 수컷’임을 과시해보였다?
다큐멘터리가 어둡게 그려내고 있는 푸틴의 면모도 이런 상황 속에서 생겨났다. “푸틴은 KGB 내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다고 여기며, 도처에 제거해야 할 적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2000년 6월, 미국의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푸틴 대통령은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자신이 그 공간의 우두머리 수컷임을 과시해 보였다”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설명이다. 실제로 자료 영상을 통해 푸틴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자세히 보면 클린턴보다 살짝 넓게 벌린 것뿐이다. 오히려 그는 성적 욕구를 잘 다스리는 인물로 여겨지곤 한다.
한편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색깔혁명’이 일어나고 아랍 국가에서도 혁명이 이어지자 푸틴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동일한 일이 닥치리라는 것”,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전복시키려 할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불안감이 정권 강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 특히 자신의 “동맹”이었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린치를 당하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이 소식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왔노라, 보았노라, 그는 죽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르테는 의심의 여지 없이 푸틴이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내가 지닌 직위만이 아니라 자유, 목숨까지 잃게 될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했으리라고 봤다.
그에게 보복욕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기회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찾아왔다. “푸틴의 러시아가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부를 가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러시아는 피지배 수컷들에게만 맞섰다. 버락 오바마처럼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하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만 러시아의 상대가 됐다. 미 중앙정보국의 전 국장 존 브레넌은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끌어냈다.
“어린 시절 뉴저지에서 학교에 다닐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언제나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질들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한 번 코피를 쏟게 해주면 괴롭힘을 멈추더라는 사실이다. 나는 푸틴 대통령에게도 이 코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악질들이 그러하듯 더 이상 자신이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1985년 4월 18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지 5주가 지난 그때 프랑스 공영방송 FR3에서는 정치 픽션 다큐멘터리 <맞붙은 전쟁>이 방영됐다. 내용의 핵심은 소련군이 서유럽을 침략했다는 것이었다.(1) 당시에는 노르웨이만으로는 점령지가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그로부터 33년이 지났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내 동구 국가들은 대부분 미국의 세력권에 들어갔고,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됐으며, 러시아의 국방예산은 미국의 1/10 수준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는 우리에게 “적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
(1) Paul-Marie de la Gorce, ‘“La guerre en face”: fantasmes et manipulations(‘마주 붙은 전쟁’: 판타지와 조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8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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