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슴으로 읽는 영화들은 화려한 수사를 달지 않는다. 손끝으로 맛을 내는 요리처럼 오묘한 멕시코 숙성의 독창적 영화는 바른 수양의 품새와 격결(格潔))의 기(氣)를 느끼게 한다. 내공의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영화적 말 수는 적어지고, 단순해지며. 이끼 낀 밀림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하다. 키워드와 상징을 들추어내면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달음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얻는다. 동굴에서 퍼지는 신비적 울림은 공명(共鳴)을 유도하고 그들만의 내밀한 경전에 버금가는 신비를 보여준다.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는 ‘신비적 전통’을 사숙한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Ernesto Contreras) 감독의 판타지 드라마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제33회 선댄스 영화제(2017) 월드시네마 극영화부문 관객상 수상작이다. 전 세계에서 출품한 본선 진출작 열 두 편중에서 선댄스 영화제 관객들은 이 작품을 선정했다. 독특한 시선, 창의성이 돋보이는 형식, 연출 가능성이 돋보이는 영화는 민족, 역사, 언어, 침탈, 윤리, 사랑, 화해 등에 걸친 소주제들을 영화에 투사시켜 배심(陪審)을 제공한다.
사십대 초반에 제24회 선댄스영화제(2008)에서 <블루 아일리즈>로써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관심을 받은바 있는 에르네스토 감독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소화해내며 제작・감독・각본・편집 작업에 참여해오고 있다. 영화적 소재를 차별화시키면서 자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발표한 많지 않은 다른 연출작 <은밀한 계절, 봄>, <기적>, <테일즈 오브 멕시코>도 멕시코 영화의 특정미학을 담고 있다.
마이클 앱티드 감독의 <넬>(1995)의 마법적 리얼리즘을 멕시코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강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노・장자의 느린 흐름이나 도가적 무위자연이 문명세계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듯 시대의 원시성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존중 밖이다. <넬>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호숫가 통나무집에서 문명과 단절된 채 성장한다. 어머니가 죽고 혼자 남은 넬은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다가 의사 제롬 러벨에 의해 발견되어 문명세계와 부닥치며 혼돈을 겪는다.
카를로스 콘트레라스 각본의 도움으로 감독은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의 축성을 쌓는다. 언어와 문명, 이질과 동질의 정체성에 깔린 애증, 비유적 갈등과 현재적 문제들이 정중동의 카메라(촬영감독 토나티우 마르티네즈)에 담겨 격정과 감동의 영상미를 보여준다. 대조가 공존하는 영화적 공간에는 <넬>의 유사 분위기가 멕시코의 정글로 옮겨지고, 발견자는 의사에서 언어학자로 바뀐다. 연민의 대상자는 ‘넬’에서 ‘두 노인’으로 바뀌고 ‘넬’의 원시어가 시크릴 어(語(어))로 환치된다.
젊은 언어학자 마르틴(페르난도 알바레스 레베일, Fernando Álvarez Rebeil)은 천 년의 신비를 간직한 언어인 시크릴(Zikril)어 마지막 사용자 두 사람인 이사우로(호세 마누엘 폰셀리스, Jose Manuel Poncelis), 에바리스토(엘리히오 멜렌데즈, Eligio Meléndez)를 찾아 나선다. 그는 시크릴어채록을 위해 정글의 심장부에 들어오지만 두 사람은 50년 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경계를 벗어난 은밀한 과거와 시크릴어의 운명에 관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서사를 종료한다.
바닷가에서 욕심 없이 순수한 두 청년(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과 한 소녀(마리아)가 수영을 즐기고 있다. 바다 빛깔은 투명한 블루가 아닌 원시성을 강조하는 뿌였고 누런빛이다. 짙은 정글 신들이 신비감을 불러오며 타이틀이 뜬다. 새소리와 초록이 가득한 정글을 뚫고 천천히 외딴 마을에 접근하는 자동차, 「‘라디오를 켜고 배워요’ 시간입니다. 산이시드로 주민여러분 안녕하셨어요? 미국에 가신 동포여러분 잘 듣고 계신가요?」가 해설로 흐른다. 오지로 파고드는 언어의 변주가 시작된다.
방송의 흐름과 함께 장면들은 언어를 무기로 파고드는 이질과 동질 사이의 문화와 문명을 역사의 흐름에 따른 민족의 운명과 차분하게 대비시킨다. 오지에 퍼지는 보이스 오버, 「오늘 우리가 배울 영어 표현은 여행자에게 유용한 ‘요청’ 문장 이예요. 저를 따라하세요. 1번 문장입니다. 아이 니드 어 잡, 일자리가 필요해요.」는 외래어의 유입과 현실을 유추하게 만든다. 앵무새와 대화하는 아낙은 마을에 들어서는 이방인을 맞아들인다. 새와 대화할 수 있는 시크릴어의 신비적 부분의 상징이다.
영화 속에는 시청각에 걸친 많은 상징들이 펼쳐져 있고, 예술장르의 어느 부분에서나 분석 가능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시적 상상을 자극하는 대사들, 신비감을 떠받히는 사운드, 과거와 현재・상황과 상황을 오가는 부드러운 편집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영화적 구성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장르간의 자연스러운 조화이다. 노역 배우의 표정과 움직임 자체도 수준급이다. 그들 사이의 화해를 시도하는 마르틴과 에베리스토의 손녀 주비아(파티마 몰리나, Fátima Molina) 사이의 사랑도 인상적이다.
고집불통 두 노인의 사연을 알고 있는 할머니 하신타는 “시크릴 어는 강한 힘이 있지, 사라지는 건 안타깝지만 엄한 놈이 쓰는 건 싫어.”라고 문명에 오염될 것을 우려한다. 시크릴어만 사용하는 피해자 이사우로는 마리아와의 사랑도 에바리스토(청년 역, 후안 파블로 드 산티아고, Juan Pablo de Santiago)와의 우정도 빼앗긴 채 밀림에서 은둔자의 생활을 하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하신타는 해설자의 역할을 하고, 중반부에 주비아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말로 구체적 증언을 한다.
영상으로 쓰는 소설, 명암이 구분되는 수묵 느낌의 어두운 산과 나무들, 반달이 뜬 하늘에 어두운 산이 스쳐간다. 자연의 소리에 잠들 수 없는 이른 아침, 집안을 스케치하는 카메라가 요란하다. 아침의 현관에 걸린 꽃 위로 비가 내리고 있다. 스토리를 전개하는 솜씨가 정교하다. 벽에 걸린 십자가, 기도하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마르틴에게 하신타 할머니의 죽음이 알려진다. “원래 심장질환이 있으셨거든요. 어머니는 다 내다보셨더군요. 어머니는 사실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동굴 앞까지 안내하는 며느리는 죽은 뒤에 시크릴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저 소리 안 들려요? 저건 강이 아니라 시크릴 사람들이에요. 동족이 죽으면 모두 함께 마중 나와서 이리로 데려오죠.” 동굴 밖으로 찍은 카메라 포지션이 훌륭하다. “끝없는 축하연을 벌이죠. 이상향이라더군요.” “산 사람도 있어요?” “시크릴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요. 살아있는 사람과 얘기하듯 얘기하죠. 약주라도 드시나 봐요.” 하신타의 죽음은 시크릴어 전수자가 두 명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TV에서 사틀란어의 마지막 전수자가 방송되고 있다. 방송국에서 주비아를 만난 마르틴은 할아버지를 설득할 것을 부탁한다. 마르틴은 이사우로의 녹음을 따고, 주비아는 영어방송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대조와 교차가 이루어진다. 부감으로 초록 전경이 잡히고, 회화 방송 사이에 풍경과 거친 기침을 하는 이사우로와 녹음을 따는 마틴의 모습이 들어간다. 에바리스토는 마리아와 교제 조건인 이사우로와의 단교 조건을 지키며 낡은 TV를 시청하며 무료한 나날들을 보낸다.
어느 날, 녹음을 분석하는 마르틴의 방에 주비아가 등장해서 할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을 알려준다. “새 TV면 될 거예요. TV가 낡았는데 살 돈이 없거든요. 할아버지도 내심 화해를 원하신대요. 교회, 일요일 6시쯤 교회를 가는 걸 좋아해요.” 교회를 찾아가서 마르틴은 에바리스토를 설득한다. 주비아도 “두 분이 화해하시길 바란다잫아요.”하고 설득을 하지만 에바리스토는 완고하게 거절한다. 그 후,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의 집을 찾아가 숨어서 그의 거동을 지켜본다. 미련이 남아 있음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하셨고, 그때 일은 묻어둔 채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이 묘소 곁이 아닌 이상향에서 이사우로 씨와 같이 살면 좋겠어요.”라고 주비아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새소리가 유난히 요란한 밤이 지나고, 시크릴어를 하는 두 노인이 곁에 앉아 방송을 기다리고 있다. 방송이 시작되고 두 노인이 서로 미소 짓자 주변의 모두가 행복하다. 두 사람에게 술이 제공된다. 이사우로는 마르틴에게 우피베(친구)라고하며 흡족해한다. 파티가 벌어지고 축하객은 아크릴어로 노래를 한다. 재회 영상을 같이 보는 마르틴과 주비아의 행복한 장면은 이 날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마르틴과 주비아의 주선으로 마련된 두 노인의 바닷가 산책은 격정의 청년시대를 상기시킨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분신처럼 갖고 다니던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에바리스토는 갑자기 이사우로를 밀쳐내고 의자를 들고 자리를 박찬다. 플래시 백으로 칼 든 청년이 잡힌다. 어둑한 밤, 이사리오는 에바리스토 집에 이르러 마리아의 사진을 모두 걷어 바케스에 넣고 불을 지른다. 이튿날 에바리스토는 분에 겨워 석유통과 신문지를 들고서 이사우로의 오두막으로 향한다. 이사리오 집을 밧줄로 묶고 불을 지른다. 울부짖는 이사우로는 마르틴에 의해 구출된다.
하신타의 집에 옮겨 온 이사우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폐 손상이 심각해 기침으로 잠을 못 이루고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는다. 회화적 풍경의 새떼가 스쳐간다. 임종을 앞두고 있지만 끝내 에바리스토는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들과 시크릴어를 아는 사람들이 영접하는 곳으로 이사우로는 떠나간다. 주비아가 이사우로의 죽음을 알리자 에바리스토는 울먹인다. 마르틴은 주비아에게 작별을 고한다. 에바리스토에게는 이사우로의 유언인 ‘자이데, 우피베, 우피베헤=잘 있게, 친구여, 소중한 네 친구여’를 전한다. 에바리스토는 마르틴과 포옹한다.
에바리스토는 동굴 앞에 의자를 놓고 ‘이사우로! 이사우로! 이사우로!’ 라고 외친다. “뭐가 남아서 또 불러?” “아직도 화났어?” “날 태워 죽이려 했잖아.” “그러게 사진은 왜 태워?” “맞은 게 억울해서, 여기서 당장 꺼져!” “싫어, 너를 되찾으려고 왔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아는 회한 속에 죽었어.” “사랑 고백이라도 할 건가?” “조용히 해, 남들이 듣잖아.” “에바리스토,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래, 사랑한다.” “그럼 너도 이리 들어와. 실수는 할 만큼 했잖아. 의자는 거기 둬 여기서는 없어도 돼.” 의자를 어루만지던 에바리스토는 동굴로 들어간다. 영화는 노래로 마무리된다.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간결한 대사로써 진지함을 견지하고 있고, 중후한 연기와 싱그런 연기적 매력을 보여준다. 의지의 표상인 의자와 같은 상징성에 집중하며 영화문법에 충실하다. 촘촘하게 짠 구원과 욕망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은 동성애 옹호 영화라는 비난을 잠재울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글·장석용
영화・무용평론가, 시인, 중앙대・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전공,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한국영상작가협회 회장 역임, 르몽드 영화평론상・PAF 영화평론상・한국문화예술상・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등 수상, 신일고,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서경대 대학원 등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이태리 황금금배상・다카영화제・네팔 인권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대종상・청소년영화제・예술실험영화・시나리오작가협회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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