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목사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다양한 유형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모범이 되어야 할 목사가 교회를 욕보인 사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전광훈 목사는 이러한 흐름에서 단연 정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빤스'라는 '아호'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명성을 접한 나는 최근 정신의 '빤스'를 벗어버린 그의 행태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목사의 정치적 발언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소개하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의 전거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든 것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로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다가 체포되어 나치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회퍼는 현대 기독교에서 가장 많은 존경과 추모를 받고 있는 신학자이자 순교자이다. 그런 본회퍼를 '빤스' 목사님께서는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의 국가적 탄압에 대한 성명서'라는 글을 통해 "저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훼퍼의 길을 선택했습니다"라고 인용하여 본회퍼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과 특히 (이런 표시가 꼭 필요한 현실이 안타깝지만) '진짜' 기독교인들을 분노케 하였다.
목회자 신분으로 목숨을 걸고 나치와 싸워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은 본회퍼를, 사실상 반대의 맥락에서 거론함으로써 전 목사는 본회퍼에게 치욕을 안겼다. 더구나 성명서라는 글에서 일관되게 "본 훼퍼"로 적었기에, 개신교 목사라는 전 목사가 제대로 한 번이라도 본회퍼를 공부하거나 찾아본 적이 있었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주변에서 '본회퍼'를 대충 들은 사람들이 '본'을 이름으로 '회퍼'를 성으로 오인한 것을 본 적이 있기에 든 의구심이다.
물론 "본 훼퍼"로 번역한 책도 있었고, 성과 이름을 혼동한다고 해도 큰 흠결은 아니며,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달리 쓸 수도 있다. 핵심은 본회퍼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따르는가이다. 내가 보기에 전 목사는 본회퍼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정말 본회퍼의 길을 따르고자 하였다면 지금 이럴 게 아니라 과거 독재정권에서 순교자의 결기로 정권에 맞섰어야 한다. '하야'와 '단식', '순교'는 무슨 망발인가.
전 목사가 이런 충언을 접한다 하여도 오히려 자신을 변호하고 나 같은 이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책망할 듯하니 그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이 사태의 유일한 해법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전광훈이란 사람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조차 불쾌한 기분이 든다. 그의 존재는 부패한 우리 시대의 필연적 현상이란 생각이다. 동시에 어쩌면 전 목사 자체가 그동안 디트리히 본회퍼의 길과 반대로 패악의 길(본 훼퍼의 길)을 걸은 다수 기독교 교회에 내리는 신의 벌일지도 모른다는 성찰 비슷한 것도 생긴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전 목사는 '값비싼 은혜'를 모르지 싶다. 디트리히 본회퍼를 "본 훼퍼"로 값싸게 소비하는 그의 행태는, 사회적 맥락과 별개로 또는 사회적 맥락과 호응하며, 아호 '빤스'에 깊이 새겨진 그의 개인적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의 '빤스' 벗어버린 사람이 활개 치는 세상
전 목사가 '빤스 목사'로 알려진 계기는 2005년 그가 설교하며 "빤스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내 성도 아니다"는 발언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 서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그의 해명에 근거하여 그의 주장대로 억울한지 살펴보자.
전 목사는 2005년 1월19일 대구 서현교회에서 열린 청교도영성훈련원 목회자 집회에서 목사 2000명을 상대로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주제강연을 하며 "'목사가 성도의 신뢰와 존경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해당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빤스 벗으라면 다 벗어. 목사가 벗으라고 해서 안 벗으면 내 성도 아니지. 그런다고 해서 집사들에게 책임을 지우면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저런 것을 해명으로 내어놓은 것으로 보아 전 목사가 "본 훼퍼"의 길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 수긍이 간다. 목사의 직과 목회의 기능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이 확연히 드러나는데도 그것이 해명이란다. (남성)목사가 (여성) 집사에게 빤스를 내리라고 하면 빤스를 내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빤스를 내린 집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핵심은 신앙의 지표로 (목사가) 빤스를 내리라고 할 수 있으며 상대 (여성)집사는 (신앙에 근거하여) 안 내리면 안 된다. 그런 상황이 빚어졌을 때 집사에게는 책임이 없으며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아마도 목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당당한 논리이다. 뿌리깊고 만연한 성폭력 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전혀 그것에 관한 자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목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또는 자신의 지위에 기대어 여신도에게 빤스를 내리라고 하는 건 '강간 목회'와 다를 바 없다. 기독교 교리에 그런 해괴한 논리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집사의 책임이 아니라 목사의 책임이란 인식 또한 신앙의 이름으로 여성을 전적인 성적 대상화의 맥락에 놓았음을 뜻한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전 목사는 "내가 언젠가 여름에 큰 기도원 높은 강단에서 설교하다 바닥에 앉은 성도가 가슴 파진 옷을 입고 와서 위에서 보고 '젖꼭지 새카만 게 다 보여. 그런 옷 입고 오면 되겠냐'고 발언한 적 있다"며 "그 발언도 뉴스앤조이가 발언만 따서 보도하며 내가 성희롱적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여집사님들은 아무도 내 발언으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며 "'아, 이제는 교회 올 때는 파진 옷 입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아멘'을 외치고 다 같이 웃었다"고 말했다.
값싼 설교, 값싼 목회를 하는 전 목사는 "본 훼퍼"와 마찬가지로 '빤스'에도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 이런 것을 문제 삼는 이들을 오히려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전 목사가 아니다. 약탈적이고 성폭력적인 마초 목사의 이 같은 행태에도 불구하고 전 목사가 아직도 목회자로 행세하고 여전히 당당한 상황이 문제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가부장제의 억압 구조와 성폭력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에 더 암담하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인식은커녕 최소한의 가부장제적 '양심'조차 없는 전 목사가 시대착오인 "본 훼퍼"의 길을 운운한 것은 불가피했다. 드러난 "본 훼퍼"의 이면은 그가 당당하게 고백한 '빤스'임을 우리는 꿰뚫어 보아야 한다. 여성혐오의 본질은 파시즘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태도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으며 시대정신을 공격하기도 한다.
전광훈이란 개인이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든, 여성혐오에 찌들어 있든, 또는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여 단식하다가 '순교'하든 모두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한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큰 발언권을 가진 개신교의 소위 지도자로서 행하는 언행은 사회적 책임의 잣대 아래 물의를 빚지 않도록 사전에 여과되어야 한다.
그러한 여과장치가 사라져버린 채 전 목사 같은 이가 마이크를 잡고 순교 운운하며 날뛰는 세상. 즉 정신의 빤스를 벗어버린 사람이 활개 치는 세상. 여성신도에게 빤스를 벗으라는 말을 목사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고, 그런 목사가 기독교의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는 세태까지, 신이 우리를 버린 것 같아 이 세상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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