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는 책을 도끼에 비유했다.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독서란 고정관념을 부수는 행위다. 이 비유는 광고인 박웅현의 책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다. 맞다. 책은 도끼다. 그런데 책만 도끼인가?
영화도 도끼다.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을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음악도 도끼다. 중3 때 동네 음반 가게에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을 처음 접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문화예술 매체란 본질적으로 간접경험이다. 그 경험의 강도에 따라 고정관념도 깨지기 마련이다. 책뿐 아니라 모든 인문학과 예술이 도끼다.
그렇다면 왜 책인가? 요즘 나의 화두다. 성균관대 앞 책방 ‘풀무질’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대학가에는 한때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많았다. 삼삼오오 책도 읽고 술도 먹고 토론도 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1986년 문을 연 풀무질도 학생운동의 아지트였다. 90년대까지는 장사가 잘됐다. 그러나 이후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하나둘 사라졌고 지금 서울에는 풀무질과 ‘그날이 오면’, 딱 두 곳만 남았다.
풀무질도 폐업 위기였다. 26년째 책방을 지켜온 은종복 대표는 ‘책’ 정신을 계승하는 청년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나는 1월 책방을 찾아갔다. 3월부터 인수인계를 시작했고 6월 정식으로 넘겨받았다. 망한 책방을 살리겠다고 들어왔으니, 그만한 포부가 있어야 했다. 게다가 나의 본업은 가수다. 책도 도끼지만 영화도 도끼고, 음악도 도끼라면 굳이 내가 왜 책방을 하는 걸까?
일본어나 중국어로 책은 本이다. ‘뿌리 본’. 한국어로는 드물지만 ‘사본’, ‘원본’, ‘제본 등의 단어에서 이 ‘뿌리 본’을 쓴다. 다시 말해 한자문화권에서 “책은 뿌리다.” 이 명제 속에 ‘책’이라는 매체의 특별함이 담겨있다.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책은 뿌리다. 첫째, 책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아주 뿌리 깊은 매체다. 둘째, 책은 문화예술 전체의 뿌리와도 같은 근본 매체다. 책이란 무릇, 창조적 파괴를 하는 ‘도끼’이기 전에, 역사적 맥락을 지탱하는 ‘뿌리’인 것이다.
오늘날 매체의 범람 속에서 책의 위치를 생각한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잠식하고 있다. 음악에서는 바이닐(LP), CD, 카세트테이프가 가고 스트리밍의 시대가 왔다. 영화에서는 비디오, DVD, 블루레이를 거쳐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도래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속한 ‘밴드 양반들’도 더 이상 CD를 만들지 않는다. 콤팩트디스크란 어차피 20세기 말 현상일 뿐이다. VHS 없이도 영화는 무궁히 발전하고 있지 않나. 기술에 따라 저장매체가 바뀌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책은 예외다. 아날로그 매체로서는 매우 잘 버티고 있다. 책은 단순히 특정 세기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인류 역사 그 자체다. 선사와 역사의 구분은 문자 기록의 유무에 달렸다. 가죽, 돌, 거북이 등 껍질, 나무 등에 글을 새기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이런 재질도 여러 장을 꿰어서 저장했다면 ‘책’이라 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면서 책의 역할은 훨씬 커졌다. 어떤 고대 문명도 책을 통한 기록과 통제 없이는 존립할 수 없었다.
활자의 발명은 책의 생산성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없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며, 종교 개혁 없이는 계몽주의와 시민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책의 파급력이 극대화된 덕분에 근대문명이 탄생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책은 문명사의 궤적을 고스란히 함께한 저장매체다. 벽화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문화예술 매체 중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다.
역사가 긴 만큼 책과 씨름한 인류의 기억도 방대하다. CD는 기껏해야 20~30년의 추억을 유발한다. 책의 추억은 2,000년 이상이다. 공자, 플라톤, 성경을 책으로 읽는 것은 문명의 뿌리에 바로 다가가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여태껏 그 책들을 읽고, 고민하고, 다른 책들을 써낸 무수한 인간들과 공통분모를 갖는 것이다. 칸트와 마르크스와 함석헌과 노는 것이다. 얼마나 유서 깊은 취미인가. 내가 책, 특히 종이책을 신앙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적 연속성 때문이다.
물론 오래됐다고 해서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다. 종이책도 언젠가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책은 음악, 영화 등과 비교했을 때 단위당 소비 시간이 길고, 소비하는 동안 해당 매체를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디지털 기기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기술의 발전으로 전자책이 종이책의 감촉과 감성을 능가하게 되면, 종이책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터이다. 그때는 CD와 카세트를 버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속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매체가 바뀌면 그것을 둘러싼 인류의 과거 경험으로부터도 멀어진다.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으로 읽을 때 카프카와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원래 창작자가 염두에 둔 매체로 작품을 소비할 때 감동도 커지는 법이다. 셜록 홈스를 베네딕트 컴버배치로 만나는 것도 좋지만, 책으로 읽을 때 비로소 아서 코난 도일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찬가지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서 복음서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는 요한과 누가와 마태오를 접근하기 전에 멜 깁슨을 거치는 행위다. 원작자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저자가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꾹꾹 읽으라고 쓴 작품은 그렇게 소비하는 게 제일 긴밀하고 즐겁다.
마키아벨리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문가에 그날 입었던 진흙과 진창으로 더럽혀진 옷을 벗어두고, 위풍당당한 궁정풍의 옷을 입었다.” 그가 존경하는 고대의 선생들과 책으로 대화하려면 궁전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드레스 코드’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독서란 시간여행이자 궁극의 현실도피였다. “그곳에 머무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않고,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며, 빈곤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네.” 지금 내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기 위해 르네상스식 옷을 입는 것은 과분한 드레스 코드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랬듯이, 나도 책상 앞에 앉아 불을 켜고 책장을 뒤적이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대가의 숨결을 느끼면서 말이다.
마키아벨리의 ‘그곳’은 궁정풍의 옷을 입고 입장하는 서재였지만, 대다수 현대인에게 ‘그곳’은 멀티플렉스 영화관 혹은 컴퓨터 앞일 것이다. 사실 종이책을 위협하는 것은 전자책과 오디오북이 아니다. 영상매체가 활자매체 전체를 밀어내고 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었을 환경에서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영상을 본다. 신세대들은 간단한 정보검색도 유튜브로 한다. 교과서 대신 인터넷 강의, 수필 대신 브이로그, 평론집 대신 리뷰 영상을 본다. 문화를 구축하는 일반 논의가 구전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글보다 말의 전파력이 세졌다. 애초에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와 예수는 말로 설파했지만, 그 말이 권력을 얻은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이후 문자 매체의 헤게모니는 공고했다. 그런데 지난 세기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구두 매체가 득세하더니, 유튜브에 이르러 판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바야흐로 영상 제작이 활자인쇄만큼 간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영상이 보편화돼도 그것이 문화 전반을 지지하는 기본 매체라고 볼 수는 없다. 문화의 뿌리는 여전히 책이다. 조지 마틴의 책이 있고 나서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과학자들은 여전히 논문을 쓰고 법관들은 여전히 법서를 읽으며, 소설가들은 여전히 자판을 두드린다. 책이라는 뿌리 위에 인문학과 예술과 과학이라는 기둥이 우뚝 서면, 음악과 미술과 연극과 시 등의 가지들이 뻗쳐나가고, 그 끝에 맺힌 여러 작품을 우리가 맛보는 것이다. 인터넷과 대중 매체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나와도, 그 기저에 깔린 가장 중요하고도 거대한 담론은 책이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가장 권위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
과연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책을 읽지도 쓰지도 않는 세상이 올까. 책이라는 뿌리는 생각보다 이 땅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흔들린다면 그 뿌리가 내린 작은 정원 하나라도 지켜야지. 정성으로 가꾸어서 다시 자라나길 기다려야지. 책방 풀무질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다.
글·전범선
고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영국에 가서 옥스퍼드에서 역사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락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에서 ‘전범선’을 맡고 있다. 2014년 1집 앨범 ‘사랑가’로 공식 데뷔해 2015년 2집 앨범 ‘혁명가’, 2017년 3집 앨범 ‘방랑가’를 발표했다. 사회과학인문서점 풀무질의 새 오너이며, 독립출판사 두루미의 대표다. 얼마전 허정숙이라는 사회적 여성해방운동가의 글을 모은 책을 출판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