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인종주의에 대한 ‘레지스탕스(저항)’의 새로운 정의에는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급여를 받던 공산주의 예술가의 벽화를 제거해야 한다는 과제도 포함되는 것일까?(1) 캘리포니아의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이 규탄하는 빅토 아노토프의 <워싱턴의 생애> 벽화 13점이, 발표 당시에는 명백히 반인종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혁명적 작품’으로 인식됐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질문은 어이없어 보인다. 총면적 15㎡인 이 작품은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고결한 선언에 담긴 위선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는 지난 6월 25일 열린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1936년 설립 당시부터 조지 워싱턴 중학교의 벽을 장식해온 아노토프의 벽화 13점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아노토프는 학교 명칭에 걸맞게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기리기는커녕, 무람없게도 워싱턴이 노예를 부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말살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생을 마감한 공산주의자인 아노토프가 구상한 미국건설 신화를 무너뜨리는 대형 벽화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은, 인종차별적이고 분노에 찬 트윗을 날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었다. 오히려 트럼프에게 가장 전투적으로 저항하는 적들이 그를 대신해 선동하고 있다.
13명으로 구성된 ‘심사실행단’이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의 결정을 해명하고 나섰다. 심사실행단은 아노토프의 회화가 “노예제, 집단학살, 식민 지배, 천명(개신교 식민지 개척자들이 미 대륙을 ‘문명화’하는 신성한 임무를 띠고 있다는 생각), 백인 우월주의, 억압 등을 찬양한다”라고 언죽번죽 설명하며 벽화 철거 결정에 힘을 실었다.
이런 해석은 용납할 수 없다. 아노토프가 심취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에서는 절대로 선의를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결정을 하게 된 좀 더 납득할 만한(그렇지만 우려되기는 마찬가지인) 다른 동기를 들어야 했다. 원주민의 시체를 발로 밟고 있는 식민지 개척자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를 비롯한 <워싱턴의 생애>가, “학생들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충격을 준다”라고 본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점을 문제로 삼는다면, 우리는 노예제와 집단학살을 기억할 것인지, 망각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담은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구성원들은 <워싱턴의 생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현실적이든 비유적이든, 잔혹한 장면을 접할 일이 많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도 충분히 폭력적이고 충격적이지 않은가?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 중인 이 벽화 논란은 정체성 정치를 극단으로 끌고 갈 미국 내 일부 좌파를 규합하고 있다. 하지만 ‘미덕을 추구하는 전위부대’를 자처하는 이들이 무척 기괴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이미 성공적으로 전파한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각자는 이 점에 유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글·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번역위원
(1) Evelyne Pieiller, ‘Artistes, domestiqués ou révoltés? 예술가들, 길들여졌나 아니면 반항하는가?’ 특집기사 중 ‘Quand le New Deal salariait les artistes 뉴딜 정책이 예술가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던 시절’, <마니에르 드 부아>, 148호, 2016년 8~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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