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르 디플로>) 1월호에 수록된 기사 중 독자 에세이를 쓰고 싶던 주제는 바로 ‘지식인 현장 부재, 대학에 갇힌 비판사상’이었다. 서구에서 전후 세대를 분명하게 갈라놓은 계기가 ‘68혁명’이었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386세대’가 치열한 사회 인식 및 투쟁의 과정을 거쳐 ‘87년 6월 항쟁’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르 디플로> 1월호에서 ‘부르디외는 없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서 한국 사회에 적용해 이해하려 할 때 언급할 수 있는 것이 ‘386세대’라고 판단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386세대’가 아니다. 그들이 대학 생활을 할 때 태어나 현재 30살이 되었다. 직접적인 관계가 아님에도 감히 이 주제로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 사회의 정치체제를 군부정권에서 (형식적으로는) 민주정부로 이끌었던 세대이자, 동시에 현재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의해 ‘철저하게’ 바뀌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중추적 위치와 역할을 담당하는 세대 또한 그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7년 한 신문에서 흥미 있는 주제로 연재된 기획 기사가 있었다. 그것은 ‘지식인의 죽음’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2007년의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란 어떤 사람들(1)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주제를 통해 고찰한 기사다.(2)
‘저항’의 전파자에서 ‘지적 노동자’로
나는 사학과 일반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다. 내가 다니는 학과는 ‘두뇌한국21’(BK21)에서 선정된 학문 분야가 아니라서 BK21에 선정된 다른 대학에 비해 대학원생 입학률이 떨어지는 편이다(이 사업이 지원하는 프로젝트에서 배정한 장학금이 대학원 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학문적으로 지도받고 싶던 연구자의 학교를 온 것에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지만, 대학원생으로 사는 데 필수불가결한 학비 문제는 쉬이 무시할 수 없다. BK21은 1998~99년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학문 후속 세대 지원을 위해 시작된 제도다. 학술진흥재단이 학계에서 영향력이 급속히 커진 것은 BK21 사업과 학술지에 평가를 매기는 ‘학술지 평가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유일한 기관인 학술진흥재단은 현재까지 이 분야의 많은 석·박사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다.
문제는 연구 지원의 촉매제로 작용해야 할 이곳의 사업이 역설적으로 연구자들의 연구 경향을 ‘통제’하는 곳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4년마다(정확하지 않지만) 갱신하는 BK21 지정 대학에 대해 학술진흥재단은 ‘백화점에서 고가 핸드백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로 빙의해 각 대학의 프로젝트를 ‘꼼꼼하게’ 따지기 시작한다. 각 대학은 포장지 상태, 메이커 선호 여부 등을 재는 소비자에 따라 학술진흥재단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결국 BK21에 지정되고 아니고를 떠나 대학원의 입학률이 영향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 작동 원리가 ‘철저하게’ 진행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학문적 비판성과 별개로 경제적 측면의 문제를 ‘담보’로 각 학교의 연구 계획과 경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지식’은 ‘호구지책’일 뿐인가
또 다른 지원사업인 ‘학술지 평가 사업’도 비슷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보따리장수’라고 일컫는 박사급 연구자들에게 ‘전임직 교수’는 매력적인 자리다. 그런데 전임직 혹은 연구교수로 채용되기 위해 필요한 주요 경력이 바로 다량의 논문, 그것도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에 게재된 논문이어야 한다. 비판적인 관점으로 ‘현상’을 인식하는 연구자를 표준규격에 걸맞은 논문을 다량으로 생산하는 ‘지적 노동자’로 변화시킨 것이다.
<르 디플로> 1월호 기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토가 언급된다. “‘참여’ 전문지들의 편집위원회가 대중에게 전달할 저항적 글을 고르는 과정에서 학술지의 자문위원 같은 ‘반열’의 이름들만 찾아내려고 한다면, 과연 모든 비판 사상들이 선별의 체를 통과할 수 있을까? 물론 박사 교육을 거친 학위 취득자들은 견고한 분석 방법, 폭넓은 지식, 그리고 비판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나 박사과정에서는 이와 동시에 품위와 우월성을 지향하는 교육을 받으며, 책임 전가의 성향도 얻게 된다.”(3)
개인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학술진흥재단의 문제가 <르 디플로>가 말하는 ‘요람으로 기능’하는 ‘대학’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학업을 유지하는 데 경제적 요인이 불가결한 부분이라고 볼 때, 자본에 종속되는 문제를 단순히 그 지식인, 지식인이 속한 집단의 ‘양심’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BK21이 시작된 시기가 김대중 정부라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부채 국가의 정상화를 위해 ‘신자유주의’적으로 한국을 ‘리폼’(Reform)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까지 오면서 들은 많은 이야기는 ‘그거 먹고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핀잔이었다. 인간과 사회를 이야기하고, 세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비경제적’ 활동으로 치부됐다. 이런 상황에서 나름의 고민을 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은 연구자들이 모인 대학에 대해 지금의 한국 사회는 자신들 입맛에 맞는 지식을 생산하도록 몰아붙이는, 학술진흥재단으로 명명된 ‘마름’을 두었다. 이 마름은 장학금이라는 ‘소작지’를 걸고 대학의 학풍을 조정하려고 한다.
‘지식인’의 길은 멀고 험하다
몇 해 전으로 기억한다. 문화방송에서 기획해 방송한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 중에 ‘한국의 진보’ 편이 있었다. 3부작으로 기획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386세대로 일컫는 당시 대학생들이 ‘광주민주항쟁’을 겪은 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토대’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학생들은 경제개발의 주역이면서도 저임금과 인간 이하의 생활을 영위한 노동자에 주목했다.
사회의 변혁 세력으로 활동했던 그들이 주축이 된 현재 한국 사회에서 ‘88만원 세대’라는 단어가 등장한 기막힌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통시적 접근에서 1980년대나 현재나 자본주의는 다양한 얼굴을 띠고 여전히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지식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인 사람들에게 ‘계급적’ 동질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기든스의 표현을 빌려 ‘제3의 길’을 준비해야 할까, 아니면 레닌의 표현을 빌려 ‘프롤레타리아에 결합한 자코뱅 당원’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앞서 물어보자. 과연 우리는 ‘자본’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각주>
(1) 필자가 ‘386세대’를 ‘지식인’과 혼용해서 쓰는 이유는 그 세대 전체의 의미를 부각시키기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많은 지식인이 ‘386세대’이기 때문이다.
(2) 이 기사들은 <지식인의 죽음>(후마니타스·2008)으로 묶어 출간했다.
(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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