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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밖으로 탈출하는 삶을 위하여
시계 밖으로 탈출하는 삶을 위하여
  • 김지연 | 예술평론가
  • 승인 2020.06.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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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흘러내리는 시계’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황폐한 사막에 시계 몇 개가 굴러다니는 모습을 그린 작품 <기억의 영속>(1931)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시계의 형태다. 달리의 시계들은 우리가 아는 모습과 달리 녹아 흘러내리거나 뒤틀려 있다. 마치 말랑한 소재로 만들어진 것만 같다. 달리는 평생에 걸쳐 회화나 조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시계의 이미지를 재현했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조작되고 변화할 수 있다. 즐거울 때는 시간이 빨리 흐르고 지루할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달리의 작품 속에서 시계는 더이상 우리가 아는 시간을 기록하지 않고, 시간이 움직이는 속도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광기 어린 초현실주의 화가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달리의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흥미롭게도 현대 물리학의 입장과 같다. ‘시간’이라고 하면 우리는 곧바로 시계나 달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1분, 1시간, 1일처럼 우리가 아는 시간은 균일하게 구획되어 있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 하지만 사실 시간은 그렇게 자르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 순간>,66×66cm,포토콜라주,2014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에 관한 통념을 뒤집는다. 우리는 우주에 단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며 그것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여긴다. 하지만 시간에 순서나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바라본 결과일 뿐, 시간의 본질은 아니다. 진짜 시간은 우리의 지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그저 근사치의 근사치를 가늠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을 임의로 구획한 것이 시계의 눈금이 가리키는 시각이고, 달력에 표기한 날짜다. 현대미술에서도 그런 시간의 본질을 포착하여 표현한다. 박진희 작가는 진짜 시간을 표현할 수 없는 시계 대신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섰다. 시간은 잡을 수 없는 존재지만 그것이 우리의 세계를 스치고 지나갈 때 흔적이 남는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양, 나무 그림자의 넓이, 비행기가 남기고 간 비행운의 길이, 또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작성한 논문의 무게 등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것을 ‘시간이 될 수 있는 조건’, 즉 ‘시간적 자질’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시계의 뒷면은 없다. 시간은 어디에나 있으니까>(2016)라는 작품에서 벽시계를 뒤집어 버린다. 뒤집혀 걸린 시계에서 시침과 분침은 보이지 않고 태엽만 천천히 굴러간다. 시침과 분침, 숫자 따위는 어차피 시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시계태엽의 움직임이 그나마 시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시계나 달력은 시간을 완전히 기록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시간은 보는 방향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고,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할 만큼 정확한 측정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시간의 근사치를 굳이 측정하려고 하는 것일까. 시간의 측정은 사실 자본주의와 긴밀하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적당히 시간을 가늠했던 인간들은 13세기에 기계식 시계를 처음 발명하며 변혁을 맞게 된다. 흑사병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하면서 노동력이 급감했고 기계적 세계관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유럽 각국은 앞다퉈 기계식 시계 제작에 뛰어들었고, 14세기 즈음 중앙 광장을 장식한 공공 시계는 각 도시의 자랑이 되었다. 체코의 왕이 프라하 중앙 광장의 시계를 제작한 시계공이 다른 나라에서 더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까 걱정한 나머지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는 기이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시계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정미한 시계침의 움직임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기술이 발달하며 시계는 점점 작아지고 오차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시계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단일한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은 산업사회의 효율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본가들은 시간에 맞추어 노동자들을 부리고 공장을 돌렸으며 증기기관차를 이용해 정확한 시각에 물자를 실어 날랐다. 돈과 직결되는 시간은 일종의 자원이 되었고, 자원은 측량할 수 있어야만 했다. 시간을 잘게 쪼개서 구획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저 언덕 위 나무에 해가 걸릴 때쯤 만나자는 약속은 이제 12시 15분에 만나자는 약속으로 바뀌었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한 행위가 되었다.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각에 산책한 칸트의 일화는 시간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미담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근대 산업사회의 핵심 기계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다.”라는 루이스 멈포드의 말은 어찌 보면 진실이다. 시간이 자원이 되면서 그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는 자본을 가늠하는 도구가 되었고, 모두가 시곗바늘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면서 시계는 더 화려한 사치품이 되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시계가 우리를 작은 눈금 안에 가두며 삶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저해하는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이면은 거론되지 않는다. 정교한 고급 시계는 과거에도 사치품이었고, 현대에도 성공을 가늠하는 자본의 결정체로서 선망의 대상이다.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취급되는 바쁜 현대사회의 규율 때문이든, 자본을 과시하며 몸집을 부풀리기 위해서든 우리는 점점 시계 안에 삶을 가두고 있다. 

 

 

시간을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되찾는 행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된 후 단일한 시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논의하게 되었지만, 다른 시공간을 고민하거나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은 영화와 소설의 몫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 속에서 노동과 삶이 분화되는 동시에 시간도 분초 단위로 잘게, 더 잘게 쪼개졌다. 우리는 지속하는 시간의 덩어리를 가지는 대신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유례없이 멈추면서 시간에 대한 감각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회사와 공장, 운송 수단이 모두 정지했고 같은 속도로 돌아가던 세계는 서로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 사회, 직장, 학교 단위로 움직이던 사람들은 각자의 공간에 들어가 작게는 개인, 크게는 가족 단위의 삶으로 회귀했다. 우리는 커다란 시계의 톱니바퀴 위에 다 같이 올라타 있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각자의 시계를 찾게 되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은 사회 구조나 조직의 목표에 우리의 시간을 맡기는 것이다. 타의에 내맡긴 시간은 시곗바늘과 달력의 칸이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치환되어 수치화, 계량화된다. 하지만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그렇게 측정한 기계적 시간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라고 했다. 삶을 경험하고 생명이 변화하는 것, 그렇게 지속되는 것이 순수하고 진정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시계의 눈금 같은 표면적인 현상만을 탐구하면 삶의 창조성과 자발성이 본래의 빛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을 정확히 계량해서 나누는 데 힘써왔지만, 본의 아니게 커다란 시간의 덩어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비록 외부와 교류할 수 없어 답답하고 외롭지만, 반대로 내 안을 들여다보고 삶에서 중요한 것을 찾아내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출근과 회식 없는 회사 생활을 통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일하는 방식을 배운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니 업무시간이 훌쩍 줄어든 것을 느낀다. 가족과 온종일 부대끼며 서로의 존재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한다. 예술가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예술가가 아닌 이들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보거나 미뤄뒀던 일들을 조금씩 실현해본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동의 자유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깨닫는다. 이렇게 무언가 기다리며 웅크리고 내부로 침잠하는 시간 속에서 감춰져 있던 것이 보인다. 혼자 있는 시간, 텅 빈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서 그 사람의 세계가 드러난다. 한 사람의 세계가 돋보이며 존재의 결이 선명해진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또렷하게 삶에 새겨진다.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만이 진짜 시간이라고 했던 베르그송의 말은 그런 뜻일 테다. 우리가 이제 코로나19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신의 진짜 시간을 찾게 된 사람들은 이전의 기계적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각자의 결을 선명하게 지닌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더 유연할 것이다. 

박진희 작가의 <시계 밖의 시간>(2015)에서는 수많은 시곗바늘이 동시에 돌아간다. 서울이 오후 6시일 때 예루살렘은 오전 11시, 히로시마는 오후 6시, 아테네는 정오, 밴쿠버는 새벽 2시, 시카고는 새벽 4시다. 우리가 정한 시간의 규칙이자 세계의 표준이지만, 이것은 진짜 시간도, 우리 삶의 표준도 아니다. 제각각 흐르는 시계의 움직임 앞에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전부 흩어지고, 온전히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 이 수많은 시간 앞에 서 있는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쯤에서 당신의 시간은 안녕한지 안부를 묻는다. 우리는 사회가 멋대로 구획하고 식민화한 시간에 나의 시간을 순순히 내맡겨왔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 마음대로 붙잡을 수도, 그 복잡한 면면을 다 알 수도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보이는 시간의 좁은 단면을 겨우 논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라는 1인분의 우주에 담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뿐이다. 모든 사람의 시간은 상대적이며 일회적인 각자의 우주다. 우주마다 다른 질서를 지니고 저마다의 속도로 새로운 별을 창조한다. 베르그송이 말한 ‘삶의 약동’은 그런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주어진 여분의 시간 속에서, 시간에 대한 개념을 재정비하며 일과 관계, 삶을 다시 바라본다. 나의 시간이 너무 잘게 쪼개져 이용당하진 않았는지, 불필요한 것에 가려져 소중한 것이 뒤로 밀리진 않았는지, 시계의 눈금처럼 보이는 것에 휘둘리고 얽매이진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자원으로서 계량화된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베르그송이 말한 기계적 시간에서 탈출해 지속하는 시간, 즉 인간의 시간을 되찾는 행위다. 모순적이게도 시계 밖으로 탈출해야 내가 가진 본래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스스로 나의 시간을 인지하고 모든 순간을 경험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때 각자가 가진 창조성이 빛난다. 약동하는 삶은 바로 그곳에 있다.  

 

 

글·김지연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서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하고, 책 <마리나의 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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