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 가면 내 전생이 떠오른다” 나무 옆에 물소가 줄에 매어 있다. 사람들이 불을 피워놓고 있다. 소는 줄을 끊고 달아난다. 소는 마치 전생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소를 찿으러 온 사람이 보인다. 그는 소를 잡아끈다. 눈이 빨갛게 빛나는 원숭이가 서있다.
신장병을 앓고 있는 분미는 처제 젠과 같이 차를 몰고 간다. 숙소에 도착한 분미와 젠, 라오스에서 넘어온 일꾼 자이. 밤. 분미와 젠, 통. 셋이 식사를 하고 있다. 문득 19년 전에 죽은 아내 후아이가 생전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42살 때의 모습이다. 이상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눈이 빨간 원숭이가 등장한다. 아내가 죽은 이후 13년 전에 가출하여 사라진 아들 분쏭이다. 분쏭은 과거 사진을 찍다가 우연히 낯선 존재를 발견하고, 그를 쫓아갔다. 그 존재와 결혼하고, 그 이후 자신도 원숭이가 되었다.
장례식장. 통은 승려로서 기도를 한다. 자다 일어난 승려 통. 일어나 옆방으로 간다. 그곳엔 엄마처럼 보이는 젠과 여동생이 있다. 옷을 갈아입고, 통은 같이 TV를 본다. 젠이 야식을 먹으러 가자고 말한다. 통은 일어나, 문득 세 명이 앉아서 TV를 보는 모습을 바라보고 놀란다. 그것은 마치 전생처럼 보인다. 식당에 간 젠과 통. 다시 TV를 보는 젠과 통의 모습. 여자애는 가운데서 자고 있다. 아까는 앉아 있었다. 똑 같은 존재인데, 두 군데에 존재하는 것이다.
<엉클 분미>는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1970- )의 작품으로, 칸느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최초의 태국영화다. 분미라는 남자가 신장병을 앓다가 죽는 이야기다. 분미는 생전에 처제 젠에게 농장을 물려주고, 승려 통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마지막에 통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모든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은 처제 젠이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도 젠인지 모른다. 우리가 <식스 센스>에서 봤듯이, 자신이 영혼이어도 그 정체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현세와 내생이 복합되고 중첩되어 있다면, 그것을 정확히 구분하기란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구조의 열쇠는 첫째 범신론이다. 모든 생명은 순환한다는 것. 영화엔 세 개의 순환론이 있다. 분미와 아내의 공존. 인간과 영혼은 서로 유별한데, 이 영화에선 서로 소통한다. 그 다음 아들 분쏭과 원숭이 귀신. 아들은 원숭이귀신의 매력에 빠져 그들과 소통하고, 결국 원숭이 자체로 변모되었다. 인간이 원숭이가 되고, 원숭이는 또 인간이 될 것이다. 공주와 메기로 대변되는 물의 신의 교접. 이 둘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교접을 의미한다. 이들 세 개의 에피소드가 다 성적인 접촉을 통해 비유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만큼 성적인 것은 실제적인 성이기도 하면서, 두 개의 이질적인 에너지가 소통한다는 특별한 의미로도 발전됨을 알 수 있다.
영화적으로는 일상과 초현실이 중첩되어 있어서,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초현실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이러한 서사의 기법은 이 영화가 고전이 아니라, 현대 영화임을 알려준다. 현대 영화란 실험영화이고,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자극의 영화다.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생각하면 된다. 백남준은 예술이 곧 일상이고, 일상이 곧 예술인 그런 세상을 느끼게 한다. 아피찻퐁 역시 영화를 단지 즐기는 매체로 생각하지 않고,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유하도록 조건화시킨다, 영화관에 앉아있는 동안 관객이 즐거운 대신, 많은 의문과 생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아피찻퐁은 영화의 내용 보다는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보기란 인생의 어떤 면을 바라보게 만드는가,라는 성찰성을 더욱 강조한다.
아들 분쏭의 에피소드에서 해석되는 것은 카메라의 존재이다. 카메라는 초자연적인 원숭이를 포착해 낸다. 그건 인생의 본질이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분쏭은 발견한다. 그는 결국 그 대상의 매력에 빠졌고, 그를 찿아내고, 결국 그와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지상세계에서 실종된다. 현세 저 너머로 가버렸다. 그 미지의 대상의 추구가 바로 아피찻퐁 감독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의 세계이고, 내면의 세계이고, 정신의 세계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영혼과 전생의 세계이다. 영화가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대체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알쏭달쏭하고, 신비하다”게 중평이다. 그게 아피찻퐁감독의 일관된 세계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분명한 게 없다. 이 작품 외에도 대부분의 작품이 애매모호하고, 또한 환상적이다. 대중적인 입장에서만 영화를 볼 게 아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격정적인 인생의 드라마를 추구하는데 비해, 그의 영화는 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여행의 이야기이고, 느리고 명상하는 듯한 태도에 있다.
이 영화는 원래 극장용 영화가 아니라, 설치 미술의 한 형태로 제작된 것이다. 태국 북동부의 이산이란 지역에서 ‘원시’라는 제목하에 설치미술전이 개최되었고, 그 일환으로 설치상영된 영화였다. 설치미술이란 극장이 아니라, 갤러리 등의 특별한 설치 공간에서 영화나 영상을 상영하는 형태를 말한다. 관객을 한 장소에 묶어서 수동화시키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산만한 시점에서 영상물을 감상하고, 거기서 사유하는 것을 토대로 형성되는 예술의 형태이다. 아피찻퐁은 그러한 미래지향적 예술속에서 영화작업을 하는 작가다. 그는 영화가 단순히 오락의 수단이 아니라, 관객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매체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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