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로맨스 픽션의 영토화
낭만적 사랑에 대한 찬미는 종교적 숭배보다 강렬하고 신비체험보다 매혹적이다. 이는 낭만화(Romantisieren)를 ‘질적인 고양(高揚)’으로 정의한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낭만적 사랑이란 개인의 잠재된 소질을 끌어내어 삶을 향한 열정을 고양시킴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개조하고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18세기에 발생한 낭만적 사랑은 동화와 영화, 드라마 등의 로맨스 픽션에서 여전히 사랑의 원형이자 최상의 덕목으로 이상화되고 있다. 특히 상업성을 추수하는 대중문화가 여성들을 낭만적 사랑을 신봉하는 로맨스의 영토로 포섭하는 전략은 너무나 집요하다.
<어쩌다 로맨스>(2019)에서 보듯, 소녀시절 로맨틱 코미디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예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여자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엄마의 따끔한 의식화 교육에 따라 로맨스와 담쌓고 살아온 여성들까지 치밀하게 재영토화 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비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오직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모드 전환을 하면 된다. 지하철에서 만난 소매치기와 몸싸움을 벌이다 기둥에 머리를 박고 병원에 입원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일단 사랑으로 가득 찬 로맨스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으면, 저주받은 몸이라 움츠렸던 외모도 남자들의 찬사와 사랑을 불러들일 만큼 매력적으로 변모한다. 뿐만 아니라 메마르고 궁상스러운 일상은 달콤한 향기로 넘쳐나고, 일로 만나는 직장 동료도 멋진 남친으로 거듭나면서 낭만적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젠더화된 여성으로 돌아가면 언제든 낭만적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파한다. 문제는 희망의 메시지가 외면한 여성의 현실이다. 유능한 건축가라는 커리어는 로맨스의 주인공을 꿈꾸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온 대가로 획득한 성취물이다. 구체적으로, 외모 가꾸기에 드는 꾸밈노동과 주변 남자들의 반응에 휘둘리는 감정노동, 로맨스물을 즐기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그밖에 물질적으로 환산되지 않는 심신의 에너지 등등 말 그대로 영혼까지 갈아 넣어 얻은 전리품인 것이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의 성취는 곧 여성 개인의 목표 달성과 커리어의 포기를 의미한다. 운명적인 남자와 만나 우여곡절을 거쳐 결혼의 약속으로 끝을 맺는 로맨스의 서사는 여성성에 대한 가부장적 정의를 묵인하는 범위 내에서 여성의 경험을 반영할 뿐이다. 여성의 성장은 오직 결혼에 맞춰져 있고, 아내와 엄마를 뛰어넘는 성장모델은 결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낭만적 사랑을 신봉하는 로맨스 픽션은 ‘가부장 문화에 순응하는 여성의 유아주의(infantilism)를 반영한 청소년 드라마’라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상업주의적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로맨스 픽션 속의 로맨스를 곧바로 현실의 로맨스로 등치시킨 착오의 결과다. 그러니 로맨스의 허구적 시뮬레이션으로 그려진 낭만적 사랑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문화가 일방적으로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불어 여성의 개인성을 배제한 낭만적 사랑의 실체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낭만적 사랑으로부터 탈주하여 자신의 개인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험적인 여성들의 대타적인 로맨스를 함께 고찰해야 한다.
낭만적 사랑의 발생과정과 여성의 개인성 배제
낭만적 사랑은 범접할 수 없는 귀부인을 향한 중세의 궁정풍 사랑과 근대인의 관능적인 애욕이 결합된 이상화된 사랑이다. 결혼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열정을 일생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궁정풍 사랑은 관념적이다. 그러나 근대 초기 개인의 탄생과정에서 발생한 낭만적 사랑은 연애와 결혼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사랑이다.
개인의 탄생과정은 인간을 인종이나 민족, 가족, 국가 등과 같은 일반적인 범주로 규정했던 근대 이전의 인식론에서 탈주하여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사회적 범주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때 개인은 이성과 개성을 토대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행동과 생각을 실천하는 인간이자, 계약을 통해 사회를 만들어가는 합리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이성에 기반하여 세계 전체를 사유하고 정치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계몽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예술이나 철학을 통해 미적으로 고양시키려 한 심미적인 개인이다. ‘인간 최고의 행복은 오직 개성을 펼치는 것’이라는 괴테의 주장대로, 낭만적 사랑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결합하여 정신적 혁명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고양시키는 숭고한 사랑이자 환상인 것이다.
『소설의 발생』의 저자로 알려진 이안 와트는 근대 초기 개인의 탄생과정에서 근대 이전에 존재했던 아테나(지혜의 여신)와 아프로디테(미의 여신)와 같은 여신을 비롯해 베아트리체나 잔 다르크 등등 모든 여성을 추방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지옥을 관장하던 아스타로트 여신마저 몰아낼 정도로 남성들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채, 여성들에게 아담을 타락시킨 이브의 원죄를 저주의 유산으로 덧씌웠다는 것이다.
개인의 탄생과정은 인간을 억압했던 근대 이전의 인식론에서 탈주하여 자유롭고 주체적 인간으로 전화하는 혁명의 과정이다. 이안 와트는 근대 초기 개인화 과정에서 ‘자유의 아버지’라 불리는 남성들이 스스로 부정하고 탈주했던 근대 이전의 인식론에 여성을 묶어두고, 오히려 더 가혹하게 이브의 저주를 덧씌운 폭력성을 지적한 것이다.
근대 교육철학서 『에밀』(1762)의 연극 버전이자 최초의 멜로드라마로 알려진 <피그말리온>(1762)에서, 루소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추방한 폭력성을 예술적 창조력으로 미화했다. 조각상을 빚어 만든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여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리스의 신화를 정숙하고 완벽한 아내 만들기에 성공한 남성 시민의 근대판 로맨스로 변용한 것이다.
그리스의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절정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피그말리온이 빚은 아름다운 조각상에 감동한 나머지 정령을 불어넣음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운 여인이 탄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루소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추방시켜버리고, 대신 피그말리온의 선한 미덕과 의지에 조각상이 감동하여 아름다운 여성으로 깨어난다는 식으로 각색했다. 이 과정에서 미의 여신의 원조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 이상적인 여성을 창조하고 이름(갈라테이아)을 부여하는 근대 개인은 전지전능의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됐다. (오늘날 자기계발 담론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피그말리온 신화는 루소의 <피그말리온>이다.)
『에밀』의 소피처럼 갈라테이아 역시 근대 개인으로서의 남성 시민을 내조하는 정숙하고 관능적인 아내이자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이다. 남성의 열정을 고양시켜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낭만화 하는 뮤즈에 대한 찬미는 곧 여성의 개인성을 배제한 낭만적 사랑의 이상화인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고양시키는 존재’라는 낭만주의자들의 명제는 이처럼 낭만적 사랑에서 여성의 개인성을 철저하게 배제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9세기에 들어 낭만적 사랑은 비로소 결혼제도와 결합됐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는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남성을 낭만화 하는 뮤즈(muse)에서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 가정여성(domestic women)으로 전환됐다. 여성의 권한은 여전히 연애와 결혼이라는 사적 관계를 선택하는 범주에 국한됐다. 설령 주체성과 자율성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인정하더라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는 가부장적 결혼제도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개인성은 ‘누구의 부인(Mrs.)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권한만 허용됐다.
낭만적 사랑으로부터의 탈주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이 발명한 낭만적 사랑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유적지로 전락한 신전처럼 종교적인 아우라는 퇴색됐다. 1960년대 이후 2차 개인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특별한 사람과 평생 함께 살아가는 결혼제도가 급격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운명적인 사람과의 강렬한 열정이나 완벽한 사랑을 찾아 떠나는 낭만적 사랑의 모험여행도 무의미해졌다. 낭만적 사랑이 퇴색된 자리는 친밀성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적인 근대적 핵가족제도가 빠르게 와해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 이후의 가족’이 등장하는 추세에 따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성찰적인 로맨스 픽션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로맨스 픽션에서 여성들은 낭만적 사랑으로부터 탈주를 시도하고, 아내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자신의 개인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여성으로 거듭나고 있다.
여성이 성별 분업적인 결혼생활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결혼제도 바깥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여성이 손쉽게, 하지만 가장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자신의 죽음을 통한 저항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에서 에이프릴은 ‘4월의 봄’이 연상되는 이름만큼 유능한 배우로서 자부심을 갖고 혁명적인 삶을 살고 싶은 꿈 많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을 신봉한 나머지 첫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한 이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마모되어 자신의 꿈과 주체성을 잃어가는 비극적인 여성이다.
별다른 꿈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남편 프랭크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고액연봉자로 성장하는 반면, 에이프릴은 아이 둘의 엄마이자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며 연극배우로 아등바등 살아도 연기력이 형편없다는 비난에 직면한다. 이들 부부의 갈등은 불평등한 성별 분업의 결혼제도에서 비롯됐지만, 에이프릴을 ‘덫에 가둬 놓고 어린애 같고 유치하게 구는’ 프랭크는 그녀의 고통이나 실존적 고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절망에 찬 에이프릴은 모순적인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접고 파리로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주저하는 프랭크나 에리프릴 자신도 현실도피성의 무모한 대안임을 익히 알고 있다. 파리는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게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소망 실현의 표상이자,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는 실존적 불안에서 벗어나고픈 도피심리가 투사된 심상지리이다.
에이프릴의 결혼생활은 끝없는 나락의 연속이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변두리지만 산뜻하고 멋진 집도 근원적인 공허감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수학박사 존의 예리한 지적대로 ‘희망 없는 공허한 삶을 불안하게 견뎌내는’ 에이프릴과 ‘사랑할 능력도 없으면서 오직 남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세 번째 임신을 하게 만든’ 프랭크의 불편한 동거는 파멸로 치닫는 여정일 뿐이다. 옆집 남자 솁과 나누는 격렬한 춤과 카섹스 역시 불륜이나 애욕이 아니라 자아를 상실한 채 텅 빈 껍데기로 살아가는 가정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결국 결혼생활의 덫에서 헤어날 수 없는 에이프릴은 낙태 허용 기간인 12주 언저리에 스스로 낙태를 시도하다 출혈 과다로 죽음에 이른다. 아이와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죽음을 결심한 에이프릴이 출근하는 프랭크에게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둔감한 프랭크는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아채고 오열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라는 제목은 1955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여성의 개인성이 배제된 결혼제도의 모순에 항거하다 비극적으로 산화한 여성의 혁명적인 삶을 상징한다. 에이프릴은 낭만적 사랑에서 출발하여 결혼의 약속으로 끝을 맺는 로맨스 픽션이 외면했던 결혼 이후의 모순적인 삶을 거부하다 스러져간 여성이다.
반면, <레이디 맥베스>(2017)의 캐더린은 모순적인 결혼제도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한 여성이다. 빅토리아시대의 결혼에서 필수요건은 남편의 돈과 가문이라는 물적 자산과 여성의 순결과 교양이라는 도덕적 자산이다. 그러나 캐더린은 귀족의 아내로서 지켜야 할 순결이나 품위도 저버리고 대담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19세기 러시아의 원작소설을, 19세기 빅토리아시대로 그 배경을 옮겨 21세기의 현대적 관점에 걸맞게 각색했기에 설정 가능한 여성상이다.
후손을 얻으려는 지주에게 팔려 온 10대 소녀 캐더린은, 출산을 강요하는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거부하는 늙은 남편 사이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낸다. 밝고 당당한 캐더린은 춥고 칙칙한 감옥과 같이 황량한 저택에서 점차 무기력해지지만 결코 순응하거나 스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문 소유의 광산에서 일어난 붕괴사건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출타 중인 틈을 타, 시아버지가 아끼는 샴페인을 몽땅 마셔버린다거나 농장의 인부 세바스천을 침실로 끌어들여 서슴없이 불륜과 혼외임신을 감행한다.
그러나 캐더린의 전복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폭압적인 시아버지와 아버지의 위상에 눌려 어 유령처럼 떠도는 남편, 그리고 상속을 위해 뒤늦게 나타난 혼외자까지 차례로 살해함으로써 가문의 혈통을 절멸시켜버린다. 세 번의 살인은 모두 세바스천과의 혼외정사를 지속하려는 일탈적 욕망에서 비롯됐지만, 캐더린은 결코 성적 욕망에 함몰되지 않는다. 역으로 하녀 안나와 세바스천을 적극 공범으로 끌어들여 가부장권을 찬탈한다.
주인(캐더린의 시아버지)에게 순종했으나 짐승 취급을 받은 하녀 안나와 캐더린의 남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세바스천은 지배자로부터 억압과 모욕을 당한 피지배라는 점에서 캐더린과 동일한 처지다. 그러나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캐더린은 모든 죄를 안나와 세바스천에게 덧씌움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입증한다. 자신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자를 억압하는 지배자로 변모한 캐더린의 언변은 당당하고 논리정연하다.
그에 비해 권력에 희생된 흑인 하녀 안나와 백인이 아닌 세바스천의 얼굴은 심하게 뒤틀려 있다. 자신이 만든 독버섯 요리로 주인이 죽자 그 충격으로 벙어리가 된 안나는 말문이 막혀 답답하고, 무죄를 증명하려던 세바스천은 캐더린의 정교한 논리에 눌려 말을 잃고 만다.
결국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자들은 지배자의 권위에 눌려 주권을 포기한 채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캐더린이 세바스천과 함께 유형지로 떠나는 원작소설과 확연하게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을 이용했다고 비난받을 만하다.
흥미롭게도 한 편의 연극과 같은 이 영화의 엔딩 씬은 파란색 빅토리아풍의 드레스를 입고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캐더린의 도도한 표정과 차가운 시선을 오랫동안 클로즈업한다. 그 속내에 대한 정보는 차단한 채 관객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도록 유도하는 브레이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수많은 질문과 답이 오갈 수 있지만, 가장 핵심은 ‘근대적 가족제도가 와해된 21세기의 관점에서 빅토리아시대의 결혼제도에 항거하는 여성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브레이트 효과를 노린 엔딩 씬은 한발 더 나아가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만약 질문하고 답하는 관객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캐더린이 자신을 비난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답할까? 아마도 캐더린은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그러나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보냈던 비웃음을 살짝 머금은 채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좋아! 그럼 1차 개인화 과정에서 여성을 추방하고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채 자율성과 주체성을 구가했던 자유의 아버지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영화의 묵직한 여운은 바로 이런 전복적 상상력에 있다.
두 영화는 대타자, 즉 낭만적 사랑과 결합한 가부장적 결혼제도를 거부하고 투쟁하는 주체적인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에이프릴은 스러졌지만 캐더린은 끝까지 투쟁한 여성이다. 물론 고달프고 힘겨워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고 낭만화된 여성으로 돌아가려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뒤늦게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빠진 <어쩌다 로맨스>의 주인공 나탈리처럼. 그렇다면 <노멀 피플>의 메리앤처럼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여성은 어떤가?
1960년대 이후 근대적 결혼제도가 와해되면서 친밀성이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공감을 바탕으로 관계 형성이 이뤄지는 친밀성의 개념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어서 일정한 행위양식이나 실천방식이 모호하다. 2차 개인화과정이 해방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안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주의 행렬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해야 할 과제는 친밀성의 행위양식이나 실천방식의 모색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든 두 남녀의 우정과 사랑을 통해 친밀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한 <노멀 피플>(BBC드라마, 2020)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원작소설의 작가 샐리 루니가 서른이 안 된 나이에 맨부커상 후보로 떠오를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하다.
낭만적 사랑의 관습에 따르면, 이들의 사랑과 우정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성장하도록 고양시키는 운명적인 사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정주하지 못하고 수도 없이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이들의 불안한 관계는 낭만적 사랑의 문법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때문에 섣불리 예민하고 자의식이 강한 메리앤의 성격이나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코넬의 유약함을 나무랄 수도 없다. 젠더 규범적인 관점으로는 더 이상 신체와 감정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세밀한 친밀성의 서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메리앤과 코넬의 세밀한 감정선을 따라 전개되는 사랑과 우정의 서사는 개인 차원의 성격과 취향,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와 정체성, 계급 차이로 인한 서로 다른 아비투스라는 세 가지 층위가 겹쳐 있다. 세 가지 층위가 두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심리상태에 따라 일치하거나 혹은 엇갈리는 감정선에 따라, 때론 편안하고 친숙하거나 열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느 순간 낯설고 불안해지거나 배신감에 사로잡히는 등 불규칙한 감정의 기복이 이어진다.
메리앤과 코넬은 학창시절 내내 동창이었지만 졸업을 앞둔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친구 사이로 발전한다. 똑똑하고 주관이 뚜렷한 외톨이 메리앤과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코넬은 여러 면에서 상반적이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만남의 계기는 메리앤의 집에 파출부로 일하는 코넬의 엄마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유일한 남자라는 점과 코넬의 착하고 진중한 성격, 그 나이 또래에 드물게 주체적이고 개성이 강한 메리앤의 매력에서 비롯됐다.
이들의 우정과 사랑의 서사는 시골 마을 슬라이고와 대도시 더블린이라는 두 공간을 넘나든다. 개성이 강하고 외톨이인 메리앤에게 슬라이고는 숨 막히는 공간이지만, 학교생활이나 친구관계 등 모든 면에서 원만한 코넬에게는 편안한 공간이다. 이 대비적인 면모는 가족관계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부재하고 편모 밑에서 자랐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남편의 영향인 듯 메리앤의 엄마는 영혼 없이 떠도는 유령처럼 무표정하고 냉랭하다. 그에 비해 코넬은 사랑이 넘치는 엄마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더블린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개인주의적이고 주체적인 메리앤은 활기차게 생활하지만, 코넬은 불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변호사 엄마를 둔 상류층의 메리앤은 풍요로운 환경에서 부유한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능력과 매력을 맘껏 발산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힘겹게 버티는 코넬에게 더블린은 우월감에 사로잡혀 잘난 척하는 속물 교양인이 넘치는 위선의 도시이자 소외의 공간이다.
슬라이고에서 메리앤과 코넬의 만남은 친구들의 놀림이 두려워 은밀하게 만났다 어색하게 헤어지는 과정에서 메리앤의 자퇴와 코넬의 죄책감으로 얼룩진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더블린에서의 재회를 계기로 어두운 기억을 말끔하게 씻고 우정과 사랑의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다. 좀 더 긴밀한 소통과 감정의 교류가 교차하면서 더 성숙한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만, 가족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와 정체성, 계급 차이로 인한 서로 다른 생활패턴이 교차함에 따라 한층 복잡한 양상이 펼쳐진다.
메리앤에게 상처와 불안의 원천은 부재하는 아버지가 남긴 폭압적인 가부장제의 잔영이다. 남편의 폭력으로 영혼이 파괴된 엄마와 동네 건달인 오빠는 수시로 무시와 냉대, 괴롭힘 등의 정신적·신체적인 압박을 가하여 자존감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런 상처 탓인지 메리앤은 가학적인 성향의 강한 남성을 선호한다. 떠벌리기 좋아하는 토론동아리 회장(개럿), 왜소하지만 허세에 쩐 새디스트(제이미), 에고가 강한 사진작가(루카스) 등과 같이.
한편, 코넬은 경제적인 문제로 힘겨워한다. 침대 하나를 빌려 궁박하게 살거나 밤늦게 아르바이트 하다 괴한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서빙하는 식당이 방학 동안 문을 닫는 탓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제적인 의존은 자유롭고 대등한 관계를 방해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아파트와 별장을 오가며 호화롭게 지내는 메리앤와 코넬 사이의 계급 격차는 또 다른 오해와 이별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친밀성은 극도로 주관적인 감정교류에 의존하므로 자칫 사소한 오해나 작은 어긋남으로도 관계회복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까닭에 메리앤과 코넬은 헌신과 정성으로 속 깊은 친밀성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강한 남성성으로 보상받으려다 오히려 멘탈이 탈탈 털린 메리엔을 코넬은 몸과 마음을 다해 따뜻하게 위로하고 보듬어준다. 또한 메리앤은 고등학교 친구 롭의 자살로 공황장애를 앓게 된 코넬이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정성과 헌신을 통해 두 사람은 한층 성장한다. 메리앤은 남자들과의 의미 없는 만남을 청산하고, 코넬은 잡지에 글을 발표하여 뉴욕대 대학원의 글쓰기과정에 초청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드라마는 또다시 헤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코넬을 향해 “넌 가고, 난 남을 거야”라는 메리앤의 격려로 끝을 맺는다. 지금까지 로맨스 서사 관습에 익숙한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생소한 결말이지만, 코넬이 글쓰기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만남이 다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열려 있다.
그러나 가장 독특한 점은, 메리앤이 사랑과 우정을 이끌어가는 주체라는 데 있다. 메리앤은 주관이 뚜렷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이자, 코넬의 장점과 능력을 발견하고 이끌어주는 인물이다. 코넬은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고 글쓰기에 도전할 때도, 뉴욕대 대학원과정의 제안을 결정할 때도 메리앤의 의견을 수용하고 따른다.
그만큼 메리앤과 코넬의 관계는 젠더 규범적인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을뿐더러, 위계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도 벗어나 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중시하고 배려하지만, 오해가 발생하거나 감정이 어긋날 경우 충분히 사과하고 용서하고 수용하는 평등한 관계다. 가족으로부터의 상처나 경제적인 어려움 등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오랜 시간을 들여 서로 공유하고 위로하며 함께 성장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이제 막 시작된 친밀성에 관습화된 사랑의 이름을 부과하거나 행동규범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충실하고 이를 투명하게 소통하기 위한 상호존중의 배려가 곧 친밀성이라는 점을 세밀한 터치로 묘사하고 있다. 다소 불안하고 위태로운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친밀한 유대관계에 도달하는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의 서사는 젠더 규범적인 낭만적 사랑으로부터 탈주한 이후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런 점에서 ‘노멀 피플’, 즉 보통 사람들이라는 제목은 중의적이다. 낭만적 사랑의 주인공(특히 남자주인공)들이 뛰어난 영웅으로 묘사되는 반면, 메리앤과 코넬은 스스로 평범한 인간으로 자각한다. 물론 서로서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며 자랑스러워 말하지만, 허위적인 우월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노멀 피플’은 오랫동안 관습화된 낭만적인 사랑으로부터 탈주하여 친밀성의 양식을 찾아 모험 여행을 떠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반어적 표현이다.
글·이정옥(문화평론가)
※ 사진 출처 : 네이버와 구글
※ 참고문헌
· 아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서구 세계를 바꾼 사상 혁명』, 강유원·나현영 옮김, 이제이북스, 2005.
· 이안 와트, 『근대 개인주의 신화』, 이시연·강유나 옮김, 문학동네, 2004.
· 이정옥, 「멜로드라마, 도덕규범과 감정을 조율하는 근대적 상상력의 역설 - 발생론적 접근을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제 25권 1호, 2019. 2. 9-54쪽.
· Kay Musell, Fantasy and Reconciliation: Contemporary Formulas of Women’s Romance Fiction, Greenwood Pre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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