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어떤 긴장도 없이 사는 삶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흔히 인류의 역사를 갈등과 투쟁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거창하게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긴장의 연속이니 말이다. 그것을 투쟁이라고 호명하든 긴장이라고 호명하든, 이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인간이 마주한 삶이란 정신과 신체를 최대한 수축시킨 힘으로 견뎌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전 생애 가운데 완전한 이완의 상태로 살아낼 수 있었던 기회란, 탄생과 함께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곳은 아마도 목욕탕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어떠한 인간이든 가장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알몸으로 돌아가 세상의 긴장을 마음껏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완을 위해 최적화된 유일한 장소에 다름 아니니 말이다.
2.
목욕탕이라는 말에 누군가는 백희나 작가의 『장수탕 선녀님』이 그려내는 풍경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표정 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귀여운 덕지와 선녀 할머니의 우연한 만남과 우정은 그대로 목욕탕의 이미지가 되었다. 덕지는 그것이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이야기인 걸 알면서도 자신을 선녀라고 주장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 게다가 눈물을 꾹꾹 참아내며 엄마의 때밀이를 견뎌내고, 그렇게 얻어낸 소중한 요구르트까지 할머니에게 내어준다. 덕지의 착한 마음은 그대로 목욕탕이라는 풍경을 가장 정겨운 것으로 각인해주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곳은 생존을 위한 가장 척박한 긴장의 공간이기도 하다. 김유담의 소설 『이완의 자세』가 보여주는 목욕탕의 첫 풍경이 그러하다. 이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것 역시 목욕탕이라는 장소성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친 풍경은 마냥 정겨운 것만은 아니다. 유라 모녀에게 그곳은 그야말로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잃고 사기까지 당한 채 어린 딸을 데리고 세신사가 된 엄마 혜자, 그 절박했던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깊은 트라우마를 얻은 딸 유라. 혜자에게 목욕탕은 어린 딸과 자신의 목숨줄을 쥔 생계의 터전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유라에게 그곳은 벗어날 수 없는 시선에 갇혀야만 하는 불편한 관심의 공간이 되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녀에게 허락된 생계의 수단은 바로 이 목욕탕뿐이었다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 모녀는 모든 사람들이 이완의 순간을 만끽하는 그곳에서 극도의 긴장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세월이 지나면서 혜자는 수많은 단골을 가진 만수불가마사우나의 터주 대감이 되었지만, 앞에서는 ‘여탕’으로 뒤에서는 ‘때밀이’로 통칭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조차 세신사라고 스스로를 호명하지 않는다. 타인의 맨몸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그녀의 직업은 모든 이의 더러움을 씻겨준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스스로에게조차 존경받지 못했던 것이다.
목욕이 끝난 내 몸 곳곳은 울긋불긋했다. 엄마가 때수건으로 민 자국과 때린 손자국이 온몸에 교차된 채 남아 있었다.(30면)
‘때밀이’로 살아남기 위해 혜자는 어린 유라를 연습대상으로 삼았다. 매일 밤 의식처럼 반복된 고달픈 때밀이 과정은 아이의 신체에 깊이 각인되었다. 생존을 위한 엄마의 몸부림은 폭력이 되어 아이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유라의 성장은 어쩌면 엄마의 여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기 위한 또 다른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들 모녀의 삶은 여탕의 수증기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만을 의지하기에 오히려 서로를 결박하였고, 결국 풀어낼 수 없는 긴장으로 서로의 삶을 속박해왔던 것이다. 세신사인 엄마 혜자와 무용학도가 된 유라의 삶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굳어진 자기 신체에 대한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어떤 지점에서는 대단히 아이러니컬하다. 무엇보다 혜자와 유라 모녀는 근육의 이완과 가장 밀접해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엄마 혜자는 타인의 근육을 이완되게 만드는 세신사이고, 딸 유라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가장 아름답게 펼쳐내야 하는 무용수라는 점을 떠올려 보라. 이완의 자세는 그들에게 직업적인 숙명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엄마의 손길은 딸의 신체를 움츠려 들게 만들었고, 딸은 자기 신체의 긴장조차 조절하지 못한다. 이들의 삶과 관계를 불구적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기계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름칠이 필수적이다. 기름을 칠하는 그 ‘찰나’를 허용하지 않으면 기계는 순식간에 마모되고 만다. 우리의 신체와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끝없는 긴장만으로는 버텨내질 못한다. 가장 절박한 순간일수록, 아니 그렇게 절박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혜자와 유라의 삶이 삐걱거리게 된 것은 그 ‘찰나’를 자기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혜자가 밤마다 구겨진 지폐를 다리는 것과 유라가 무용학원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본질은 어쩌면 동일하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자 했던, 하지만 가질 수 없던 가장 완벽한 이완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욕망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했다. 그 근원적 이유는 분명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종속된 삶과 욕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갖고자 했던 그 이완의 자세는 그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떤 찰나를 허용했던가? 혹시 매일의 긴장을,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지독한 생의 정글에서 우리가 학습해온 것은 긴장에 보다 더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온몸을 긴장시켜 타인에게 이완의 순간을 만들어주었던 혜자의 긴장이, 그대로 딸 유라에게 계승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돌이켜 보자. 긴 여정의 끝을 단박에 가려는 욕망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10차선 고속도로의 한복판에서 여정을 멈추게 만든다. 놀랍게도 우리의 신체와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스스로 삶의 궤도에 그것을 맞추려고 할수록 오히려 그 궤도 안에서 방향을 잃고 만다.
조금씩, 조금씩 몸을 낮추면서 뜨거운 물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앉았다. 두 가랑이를 넓게 벌려 앉으면서 두 팔을 수면 위로 띄운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온몸을 휘감은 온기 속에서 내 몸의 모든 구멍이 열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어떤 것이 쏟아져 나올지 나도 알 수 없었다.(167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가끔은 길을 잃고, 때로는 스스로 휴게소로 돌아나가는 그 찰나의 경로이탈이야말로 오히려 이 여정을 이어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순간임을. 그것은 이탈이 아닌, 연속을 위한 휴지에 보다 가깝다. 그러므로 막연히 경로를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진다면, 지금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생의 스트레칭은 무엇인가?
글·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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