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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야 ‘조국의 딸’이 되다.. 26세 기지촌 여성의 죽음
죽어서야 ‘조국의 딸’이 되다.. 26세 기지촌 여성의 죽음
  • 송휘수, 안치용, 신다임, 황경서 기자
  • 승인 2021.03.09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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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⑲윤금이
2003년 2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 운동’ 편에 등장한 고 윤금이 씨의 추도식 모습. ©MBC
2003년 2월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 운동’ 편에 등장한 고 윤금이 씨의 추도식 모습. 

 

 

“매우 애지중지하여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기는 모양을 이르는” 우리 말에 ‘금이야 옥이야’가 있다. 6남매의 외동딸로 집에서 ‘금이야’로 불린 아이가 있었다.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이였지만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객지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으며 인생이 안 풀리리다 보니 기지촌에 가서 몸을 팔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미군에게 몸을 팔던 어느 날 밤에 이 ‘금이야’는 몸을 산 미군 병사에게 코카콜라 병으로 맞아 숨졌다. 흰 세제 가루로 뒤덮이고 코카콜라 병은 음부에, 항문에는 우산대가 직장 안으로 26㎝나 들어가 꽂힌 처참한 모습으로 ‘금이야’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1992년 10월 28일 꽃다운 나이의 청년 윤금이는 외국군 병사에게 맞아 그렇게 셋방에서 홀로 죽었다.

전날인 27일 밤 금이는 술에 취한 채로 케네스 마클이라는 미군과 함께 경기도 동두천의 미2사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금이의 셋방 앞에서 또 다른 미군인 제이슨 램버트와 마주쳤다. 램버트는 ‘어젯밤의 여자’가 다른 미군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마클에게 시비를 걸었다. 램버트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뒤 마클은 윤금이를 끌고 셋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방 안에 들어간 뒤에도 램버트는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새벽 1시 30분에 금이의 방에서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 간섭하는 문밖의 램버트를 멀리 쫓아낸 마클은 밖으로 나가려는 금이를 끌고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코카콜라 병으로 그의 이마를 여러 차례 후려쳤다. 

 

사건 범인 케네스 마클 이병이 법정에 출두한 모습. ©동두천시민연대 2007.10.28 (오마이뉴스 제공)
사건 범인 케네스 마클 이병이 법정에 출두한 모습. ©동두천시민연대 

 

 

28일 오후 4시 30분경 셋집 주인이 금이의 방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숨져 있는 금이를 발견했다. 사인은 병으로 맞은 앞 얼굴의 함몰 및 과다출혈로 밝혀졌다. 26세의 청년은 자기 나라에서 자기 나라에 주둔 중인 외국군인에게 처참하게 맞아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뺏벌’에 빠진 여성들

 

윤금이(尹今伊)는 1966년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5남 1녀 중 외동딸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가정형편으로 그만두고 17세에 상경하여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미군을 상대하며 평택과 동두천의 기지촌을 전전하게 된다. 1992년 10월 11일 금이는 동두천 미군기지 근처 보산동 셋집에 입주하였다. 보산동 431-50번지 김성출 씨의 셋집은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매춘여성 ‘양색시’ 14명이 좁은 공간에 부대끼며 사는 ‘벌집’이었다. 그곳에서 금이는 월세 4만 원으로 2평 남짓한 셋방을 얻었다. 

금이가 들어간 ‘기지촌’은 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기지 근처에 형성된 성매매 산업 집결지이다. 부산 서면의 히야리아(Hialeah) 부대와 해운대의 탄약부대 인근,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 평택, 부평, 포천, 동두천, 파주 용주골, 문산 선유리, 서울 용산의 미 8군 기지, 이태원, 그리고 후암동 등 수많은 장소에 기지촌이 생겨났다. 

 

용주골 기지촌의 모습. © 김현선,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용주골 기지촌의 모습.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기지촌에는 외국인 전용 술집, 암달러상, 세탁소, 미장원, 당구장, 국제결혼 중개업 사무소, 블랙 마켓(미군부대 물품 암거래 시장) 등 각종 서비스 산업이 상권을 형성하였다. 그중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과 포주집은 기지촌에서 가장 흔한 매춘업소 형태로, 고용된 여성의 화대를 관리하고 성매매를 강요했다. 업소에 소속되지 않고 길거리에서 꽃과 성을 파는 ‘히빠리’도 있었다. 금이는 2년 전에 동거하던 미군에게서 버림받은 뒤부터 자주 폭음하고 울면서 행패를 부렸는데, 그 탓에 클럽에서도 일하지 못하고 히빠리로 생계를 유지했다.

기지촌 여성이 성매매 업소에 발을 들인 계기는 천차만별이지만 비자발적인 사례가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지촌 출신 여성 김정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포주집에 넘겨졌다. 이러한 인신매매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때 인신매매 비용을 업소에서 빌려주고 그 대가로 화대 이익을 나눠 가졌다. 아버지, 남자 형제 등 친족에게 성폭행을 당하거나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왔다가 돈을 벌기 위해 포주집에 들어가게 된 사례도 있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자료 화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 발췌. ©MBC
기지촌 여성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자료 화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 

 

 

여성이 포주집에 들어가 방을 배정받으면 월세 명목의 빚이 생겼다. 포주집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당연히 비용으로 청구되어 빚에 포함되었다. 여기에 매달 쌓이는 이자까지 더하면 포주와 나눠 갖는 화대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다. 많은 포주집이 클럽과 연계되었다. 클럽은 성매매 알선의 주요 거점이었다. 포주집은 각기 고용한 여성을 클럽에 보내 술을 팔고 성매매 호객행위를 하도록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술값 일부도 고용 여성이 분담해야 했다.

포주들은 강한 중독성의 수면제, 진통제, 환각제 등을 이용해 고용 여성이 약물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기지촌 여성의 증언록에 자주 등장하는 세코날은 “하루 4~5알씩 약 2개월 정도 복용하면 바닥에 닿는 하체 부분의 살이 터지고 종기가 돋는 등 심한 중독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고될 만큼 위험했다. 암페타민 등 미군이 2차 세계대전 때 복용한 각성제도 흔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약물은 클럽에서 영업하며 술을 마셔야 하는 여성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켰다.

약물은 포주들에게 유용했다. 기지촌 여성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수치심으로 쭈뼛거리면 약을 먹도록 강요했다. 호객행위에 실패하거나 도망갔다 잡혔을 때 포주는 폭력을 행사하고 ‘치료’ 명목으로 약을 주었다. 고통과 피로 때문에 일을 하기 어려울 때도 억지로 약을 먹여 내보냈다. 낙태한 뒤에도 별다른 치료 없이 진통제 성분의 약으로 버텨야 했다. 

 

“(포주가) 먹어라! 먹으라구, (내가) 이게 뭔데요? 기분 좋게 해주는 거래. 그래서 하나 먹으면 그 다음에 두 개 먹고, (…) 그 다음엔 네 개를 먹어야 가고 (…) 그렇게 중독이 된 거지, 인제. 그거 없으면 안 되는 거지. (…) (포주들은) 한국여자를 약 사다 맥이고, 미군놈들은 대마초 사다가 한국여자들 피게 하고…”

 

반강제적인 복용 이후 고용 여성들은 곧 약을 먹지 않으면 ‘문 앞에도 못 나가는’ 지경에 이르고, 점차 먹는 양을 늘려 중독되기 일쑤였다. ‘헬렐레’, ‘쩔순이’ 등 기지촌 여성 사이의 은어는 이들의 일상에서 약물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보여준다. 

약값도 빚이었다. 포주들은 약의 가격을 몇 배나 부풀려 폭리를 취했다. 이렇게 여러 명목으로 번 돈을 뜯기고 나면 기지촌 여성에게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쌓인 빚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을 가도 포주나 그가 고용한 건달에 의해 금세 잡혀 들어왔다. 수색 및 추적 과정에서 발생한 여관비나 차비, 식비 등은 어김없이 빚에 얹혔다. 포주집에서도 일하지 못하는 히빠리 처지이다 보니 금이의 방에는 얇은 담요와 옷 가방 하나를 빼고는 ‘일반적인 생활인의 방에 놓여 있어야 할’ 가구나 집기가 전무했다. 

 

빚은 계속 늘었어요. 방값이랑 화장품, 미장원비랑 세코날비랑 내야 하는데 아무리 일해도 못 갚는 거예요. 이자는 계속 붙었어요. (…) 도망을 갈 수가 없었어요. 일하러 갈 때 늘 남자(포주집에서 일하는 건달)들을 붙여 감시해요. (…) 주인집에 경찰이 낮에 놀러 와요. ‘경찰에 신고해도 내가 못 나가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죠. 내가 죽어서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기지촌의 착취 구조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스탠리부대(Camp Stanley) 근처의 기지촌 이름 ‘뺏벌’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다. 빚과 착취의 굴레에 억눌린 기지촌 여성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캠프 스탠리와 뺏벌 기지촌의 모습 ©김현선,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캠프 스탠리와 뺏벌 기지촌의 모습,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국가의 ‘도구’로 활용된 위안부들

 

기지촌 여성을 이르는 명칭으로는 ‘양색시’, ‘양공주’, ‘양갈보’, ‘특수업태부’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들을 ‘위안부’라고 규정하여 관리와 통제를 가했다. 1957년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 관련 문서나 1973년 ‘의정부시 성병 관리소 조례’ 등 각종 공식 자료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라고 지칭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공무원들은 ‘위안부‘와 일반 매춘여성을 구분하곤 했다.

전후 시기의 정책·법안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안과 기지촌 여성의 존재를 적극 허용하는 조치가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1947년에 미군정 체제 하에서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 제정됨으로써 일제 시기부터 이어진 공식적인 성매매 제도는 전면 금지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성병 검진 등 성매매 여성 관리정책을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을 통해 실천하는 등 사실상 미군 상대 성매매를 허용했다. 

박정희 정부에서도 이러한 모순은 계속되었다. 「윤락행위 등 방지법」과 같은 성매매 금지법을 제정하는 한편 윤락이 허용되는 ‘특정 지역’ 104개소를 지정하여 성매매를 묵인하였다. 이 ‘특정 지역’의 60%는 미군 기지 근처에 위치했다. 더하여 1962년 법령을 통해 ‘유흥접객부’가 성병 검진 결과를 기록한 보건증을 휴대하도록 규정했다. 1965년에는 성병 감염자를 강제 수용하여 치료하는 ‘성병 관리소’까지 지방정부 조례를 통해 만들었다.

정부가 기지촌 여성 관리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미군 주둔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안보 문제에 윤활유를 뿌리고, 다른 하나는 외화벌이였다. 

1971년 주한미군 내부에서 인종차별로 싸움이 발생했을 때 중재 과정에서 미군 당국이 파악한 군인들의 불만 중 하나는 “기지촌 여자들이 매우 더럽다. 우리는 한국을 구하러 온 VIP들인데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라는 것이었다. 5ㆍ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혈안이었다. 1969년에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한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군의 불만이 제기되자 정부는 미군을 붙잡아두기 위해 기지촌 정비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기지촌 여성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중요한 경제적 도구였다. 1964년 한국의 외화 수입이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돌파했는데, 같은 해 미군 전용 클럽은 그 10분 1가량인 97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69년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 지역 미군 전용 클럽 200여 개를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만 연간 6백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클럽들은 1963년 개정된 관광진흥법에 따라 ‘특수관광 시설업체’로 지정되었으며, 면세 주류를 합법적으로 공급받았다. 그 대가로 정부는 클럽이 얻는 이익의 일부를 가져갔다. 캐서린 문 미국 웰슬리 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1960년대 ‘기지촌 산업’은 한국 GNP(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했으며, 성 산업이 그중 절반을 차지했다고 추정했다.

아예 국가가 적극적으로 포주처럼 나선 ‘아메리카타운’(‘실버타운’으로도 불렸다.) 같은 사례도 있었다. 군산 미군기지 인근에 위치한 아메리카타운은 포주가 50%, 나머지 50%를 정부가 새마을 사업 명목으로 투자한 주식회사 형태였다. 방마다 번호가 붙은 ‘닭장 집’에 기지촌 여성을 집단 수용하고, 주위에 담을 둘러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곳이었다. 그나마 일반인과 같은 곳에서 거주하거나 기지촌 내 상권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포주집 소속 여성과 달리 아메리카타운 내 여성은 경비까지 갖춘 삼엄한 통제 속에서 감금되었다. 정부가 직접 ‘여자 파는 회사’를 세운 것이다.

기지촌 여성을 안보와 경제의 도구로 대한 정부의 태도는 기지촌에서 열린 정기 강연회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962년 박정희 정부는 미군 위안부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위안부를 지역 재건부녀회에 가입하게 했다. 이후 이 모임은 기지촌 여성들의 ‘자치회’로 이어졌다. 자치회는 명목상으로 기지촌 여성이 구성한 기구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와 미군, 포주가 운영하는 조직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이 강연회를 들었던 ‘프리클럽’의 모습. ©김현선,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기지촌 여성들이 강연회를 들었던 ‘프리클럽’의 모습.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자치회가 정기적으로 강연회를 열 때마다 각 클럽은 무조건 고용 여성을 참석시켜야 했다. ‘CID(미군 범죄수사대), 미군 헌병, 보건소 직원, 경찰서 서장, 군청 공무원’ 등이 강연에 참여했고 이들 중에 누군가가 연사를 맡았다. 핵심 주제는 성병 관리, 국가 안보, 그리고 애국이었다. 기지촌 여성은 이 순간만 ‘외화를 버는 애국자’, 심지어는 ‘민간 외교관’으로도 호명되었다.

 

“군청에서 오는 사람들은, ... 앞으로 (기지촌에) 그런 거 관광지대를 만들 테니까, 그래야 미군들이 우리 동두천에 많이 온다는 거지. ... 언니들이 이렇게 서비스를 많이 해서 언니들이 달러 수입을 이렇게 해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이래. ... (미군이) 클럽에 들어오면은 바미드링크(술 사주세요)! 이렇게 자주 해라, 이거야. 술 사달라 그러면 달러가 나오지 않냐... 그래야지 우리나라가 번창을 한다는 거지.”

 

“흠흠, 에,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미군을 위해 살리거나, 미군에 의해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이렇듯 한국 정부는 기지촌 여성의 성 서비스를 한미동맹과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하였고 관련한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 개인의 ‘안보’는 국가로부터 보장받지 못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미군 접대를 위한 도구로서 관심을 받았을 뿐, 인권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정부는 특히 성병 관리 차원에서 이들을 매우 강압적으로 대했다. 기지촌마다 설치된 성병 진료소에서는 매주 정기적인 검사가 행해졌다. 성병 검사를 통과해야 발급되는 보건증이 기지촌 여성에게는 성매매 허가증이자 곧 주민등록증 역할을 했다. 금이가 죽었을 때, 그의 신원을 확인해준 것도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평택 보건소가 발급한 보건증이었다. 

 

기지촌 여성의 보건증. 기지촌 여성들은 주기적으로 지역 보건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 보건증은 기지촌 내에서 신분증처럼 쓰였다. ©햇살사회복지회 2012.08.25 (오마이뉴스 제공)
기지촌 여성의 보건증. 기지촌 여성들은 주기적으로 지역 보건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 보건증은 기지촌 내에서 신분증처럼 쓰였다. ©햇살사회복지회 

 

 

정부는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보건증을 발급받고 지녔는지를 검문하는 ‘토벌’을 실시하기도 했다. ‘합동 토벌’에는 한국측 관계자 외에 미군이 참여했으며, 심지어 미군이 독자적으로 ‘토벌’에 나섰기도 했다. 검문 중에 보건증을 제시하지 못하는 여성은 유치장으로 끌려가거나, 벌금을 내거나, 성병 관리소(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1990년대 초까지도 한국 정부와 미군은 서로 협력하여 기지촌 여성을 관리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성병의 ‘치료’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정부는 성병 환자를 강제 치료를 위한 격리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성병 검진에서 보균자로 진단받거나 보건증 없이 성매매를 한 여성은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는 ‘몽키하우스’라는 은어로 불렸다. 본래는 매음굴을 의미하는 영어 속어이지만 기지촌 여성에게는 “수용소 생활이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처럼 느껴진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곳에 들어가면 보균 검사에서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픈 페니실린 주사를 맞아야 했다.

 

옛 양주군 성병관리소 (낙검자수용소)의 현재 모습. 기지촌 여성들은 검사에서 성병 균이 검출되면 강제로 수용소에 보내졌다. 이러한 성병관리소는 ‘몽키하우스’라는 은어로 불리기도 했다. © 김현선,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옛 양주군 성병관리소 (낙검자수용소)의 현재 모습. 기지촌 여성들은 검사에서 성병 균이 검출되면 강제로 수용소에 보내졌다. 이러한 성병관리소는 ‘몽키하우스’라는 은어로 불리기도 했다.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는 이름만 ‘성병 관리소’일 뿐, 정신병동이나 구치소와 다름없었다. 병동 시설은 제대로 난방이 되지 않았고 건물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감시를 받았다. 치료 또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페니실린 주사의 쇼크 때문이었다. 쇼크가 오면 귀울림, 호흡곤란, 발한이 일어나거나 심하면 죽기도 했다. 쇼크 발생 증가로 의사가 페니실린 사용을 피하자, 1978년 보건복지부는 법무부에 공식문서를 보냈다. 사전에 페니실린 과민성 반응검사를 한 경우 ‘국가 성병 관리 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의사를 면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정부에게 성병 통제는 기지촌 여성의 생명보다 명확한 우위에 있었다.

공권력인 경찰도 기지촌 여성의 안전망은 아니었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의 상해나 죽음보다 ‘오프리미트’를 두려워했다. 오프리미트는 기지촌에서 미군 관련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 미군의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이다. 한번 이런 조치가 내려지면 기지촌의 상권이 죽기 때문에, 포주들과 범죄조직, 상인, 공무원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는 해당 지역에서 일어나는 미군 범죄를 은폐하거나 범죄를 밝히려는 노력을 방해했다. 미군이 아닌 포주 등의 한국인이 기지촌 여성에게 폭력을 사용해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은폐되었다.

최후의 안전망인 법조차 이들에게 불리했다. 미국은 한국과 1966년 7월 ‘SOFA’라고도 불리는 한미행정협정(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의 사법 권한은 크게 제한되었다. 한국인 대상 미군 범죄가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 사태가 불가피했다. 미군과 가장 가까운 민간인인 기지촌 여성은 특히나 폭력의 위험에 상시 노출되었다. 1977년에는 이복순과 이영순이, 그리고 그 전후에 많은 기지촌 여성이 죽었다.

 

죽어서야 ‘조국의 품’으로 소환된 윤금이

 

1992년 10월 28일 윤금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을 알린 사람은 기지촌 여성이었다. 경찰에 접수된 사건신고서에는 최초 발견자인 셋집 주인이 신고자로 등록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지촌 자치회의 한 여성이 주인의 이름을 빌려 신고한 것이었다. 기지촌 여성 이 신고하면 사건이 묻힐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는 곧 기지촌 여성 쉼터에 이 사실을 알려 다른 쉼터 모임 등에 이 소식이 퍼져나가도록 했다. 

신고자 여성은 자치회에서 성씨를 합쳐 ‘0감찰’로 불렸다. 그는 기지촌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제대로 된 미군 수사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피 묻은 바지를 입은 마클을 부대로 들여보내려는 헌병에 맞서 몸싸움 끝에 그를 경찰에 넘긴 이도, 전날 금이와 마클의 싸움을 목격하여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이도 그였다.

사건을 담당한 의정부경찰서는 피의자 신문 조서 등 기초조사도 하지 않고 마클을 바로 CID로 인도했다. 주한미군 피의자를 체포했을 때 한국 경찰이 행사할 수 있는 초동 수사권을 포기한 것이다.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기지촌 여성들과 동두천 사람들이었다. 동두천의 기지촌 연대 모임과 시민 모임이 사건을 적극 여론화하여 48개의 단체가 참여하는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꾸려졌다. 공대위는 재판마다 몇백 명이 넘는 방청객을 조직하고, 사건 발생 후 5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었다. 동두천시의 택시 기사들은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을, 상인들은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을 벌였다. 집회와 모임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딸’ 금이가 처참하게 살해된 데 울분을 토했으며, ‘누이의 주검이 민족의 가슴에 던지고 간 한과 분노의 씨앗’을 곱씹었다. 1년 반에 걸친 기다림 끝에 가해자 케네스 마클은 1994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고 윤금이씨 사건, 제1차 시민규탄대회 포스터 ©동두천시민연대 2007.10.28 (오마이뉴스 제공)
고 윤금이씨 사건, 제1차 시민규탄대회 포스터 ©동두천시민연대 

 

 

1차 공판이 끝난 후 공대위는 미군 범죄에 대처할 상설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주한미군 범죄근절 운동본부’로 전환되었다. 그 이전에도 미군 범죄가 알려져 있었지만, ‘미군 범죄’라는 하나의 신조어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92년 윤금이 사건 이후이다. 이로써 금이의 죽음은 미군 범죄를 하나의 사회문제로 정치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마지막 방점은 금이가 죽고 나서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주목받은 데 있다. 소외되었던 기지촌 여성이 ‘양키’에게 살해되면서 하루아침에 순결한 딸이자 강대국의 핍박을 받는 ‘조국의 온 산천’으로 불리게 된 역설적 상황이다.

본래 기지촌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그들은 ‘야한 서구식 옷차림과 진한 색조 화장, 엉터리 영어, 미제 물건으로 대변되는 미국식 저급문화’에 물든 여성으로, ‘사치스러운 서구의 물질문명에 현혹되어 윤리관 및 도덕관을 저버린’ 존재로 여겨졌다. 공직자나 일부 보수적인 시민들은 윤금이 사건에 대해 “양공주 하나 죽었다고 세상이 왜 이리 시끄럽냐, 하찮은 여자 죽음으로 한미 관계에 금이 가게 할 수 없다, 그런 여자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사는 것 아니냐, 창피한 일이므로 떠벌여서는 안 된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금이의 죽음으로 미군 범죄에 대한 관심이 커지긴 했으나, 그가 ‘기지촌 여성’으로서 당한 착취나 인권침해는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윤금이 추모제에서는 해당 사건에 관한 것보다 양키 반대, 쌀 수입 반대, 미군 철수라는 구호가 돋보였다. 

금이 사건 이후에도 많은 기지촌 여성- 강운경, 이기순, 전지나, 정종자, 차혜선, 허주연 -이 미군에 의해 강간, 살해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수의 여성이 기지촌에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포주집에 갇혀 살아갔다. 

금이의 죽음 25년 후인 2017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기지촌 여성 57명에게 낙검자 수용소에 격리수용한 행위는 위법하며, 국가의 일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8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같은 사건의 2심에서 “국가의 기지촌 운영, 관리 과정에서 기지촌 위안부들을 상대로 성매매 중간 매개 및 방조, 성매매 정당화 조장 행위와 위법한 강제격리 수용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국가에서 기지촌 운영에 관여했으며, 기지촌 ‘위안부’를 대상으로 부당하고 강제적인 여러 조치가 있었고 이것들이 위법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3년째 보류 중이다.

금이를 살해한 주한미군 제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국에서 재판을 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94년 5월 17일 천안소년교도소 외국인 수용사동에 수감됐다. 마클은 잔여 형기를 1년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됐으며, 가석방 다음 날 곧장 미국으로 출국했다. 금이를 살해한 1992년에 마클이 스무 살이었으니, 그는 지금 미국 땅에서 아마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송휘수: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어렵고 머리 아프지만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신다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 황경서 :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참고 문헌>

 

1. 논문

 

김은경,「미군 ‘위안부’의 약물 중독과 우울, 그리고 자살」, 『역사문제연구』22권 2호, 역사문제연구소, 2018, 129-166

 

박정미,「한국 기지촌 성매매정책의 역사사회학」,『한국사회학』 49권 2호, 한국사회학회, 2015, 1-33

 

박정미, 「건강한 병사(와 ‘위안부’) 만들기」, 『사회와 역사』 124집, 한국사회사학회, 2019, 265-307

 

우순덕, 「기지촌 여성(미군 위안부)의 삶과 국가의 책임」, 『월간 복지동향』 244, 월간 복지동향, 2019, 61-69

 

이나영, 「기지촌의 공고화 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학』 23(4), 한국여성학회, 2007, 5-48

 

정영신, 「주한미군과 SOFA 체제」, 『황해문화』107, 새얼문화재단, 2020, 16-36

 

정유진, 「‘민족’의 이름으로 순결해진 딸들?: 주한 미군 범죄와 여성」,『당대비평』11, 생각의 나무, 2000

 

2. 단행본

 

김연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 2005.

 

김현선,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아카데미, 2013. 

 

정희진,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한울아카데미, 1999.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개마서원, 1999. 

 

3. 신문

오연호, “주한미군의 윤금이 살해와 국교생 3명 추행사건”, <월간말>, 1992.12, 96-103.

 

이창호, "2020년 평택엔 무슨 일이..." <B TV 기남뉴스>, 2020.12.31

 

허재현, “인신매매 당한 뒤 매일 밤 울면서 미군을 받았다”, <한겨레>, 20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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