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마지막 장면이 지닌 의미는 복합적이다. 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는 좁고 황폐한 마당. 그곳에는 빨래판과 고무호스와 플라스틱 세제 통 따위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정신병원에서 막 퇴원한 신애의 내면이 그러할 것이다. 신애는 그 마당의 거울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싹둑 자른다. 용서할 권리조차 빼앗겼던 배반의 시간을 잘라내려는 것일까. 아니면 처참하게 무너진 영혼을 추스르고자 하는 다짐일까. 어찌 되었든, 신애는 이제 아무도 용서할 수 없다. 아들 준의 살해범은 하나님이 이미 용서했으므로, 미용사가 된 살해범의 딸은 그녀가 아들의 살해범의 딸이라는 이유로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애는 살아남는다. 살해범도 그의 딸도 용서할 수 없으나, 그래도 신애는 살아가야 한다. <밀양>이 <박하사탕>과 다른 점이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한 채 소멸한다. 그는 진실(충격적 경험, 상처)과 정면 대결하지 않는다. 우연히 소녀를 쏴 죽인 ‘그 사건’에 대하여 침묵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고문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회피한다. ‘그 사건’이 탄로 날까 두려워서, 자신만의 진실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력의 보호막 뒤에 숨은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호는 상처를 망각하지 못한다. 자신을 용서하지도 못한다. 대결, 망각, 회피, 용서…. 영호는 그 어려운 언어들 사이에서 다만 방황할 뿐이다.
<밀양>의 신애는 상처를 회피하지 않는다. 신애는 가해자를 자기 마음대로 용서한 하나님에게 대들거나 맞서 싸우고, 심지어 하나님을 조롱한다. 부흥회에 가서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고, 철야 기도회 장소에 가서 돌을 던진다. 교회 집사를 성적으로 유혹한 뒤 하늘을 쳐다보며 ‘잘 보이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인 주디스 허먼에 의하면,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기억과 애도가 필수적이다. 기억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어 진실을 공개하고, 충격적 경험과의 두 번째 대면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신애는 고통 속에서도 그 진실을 수용한다.
신애의 행동이 지닌 의미는 원작과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에서도 유괴범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 유괴범이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남긴 말도 <밀양>과 비슷하다.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 주십사고…”라고 말한다. 이 엄청난 모순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밀양>은 원작소설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 신애는 진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지만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밀양>의 마지막 장면은 눈여겨볼 만하다. 땅에 떨어진 신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쓸려간다. 이어 카메라는 마당 구석의 남루한 생활 도구들을 차례로 비춘다. 그 미장센은 신애의 과거와 현재, 육체와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폐허와도 같은 마당 구석에도 햇빛이 비친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빛나던 첫 장면의 그 햇빛이 아니다. 신애가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사나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난 너한테 안 져. 절대 안 져”라고 절규하면서 온몸으로 거부하던 그 햇빛도 아니다. 한때 삶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쓸모없다고 버려진 세간살이를 비추는 햇빛이다. 하늘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땅 위를 비추는 햇빛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해도, 신애의 내면은 여전히 황폐하다. 그래도 신애는 삶을 계속 꾸려갈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햇빛(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머무르면서 근엄한 표정으로 죄인을 용서하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는 장면이 이미 등장한다. 신애는 교도소에서 유괴범을 만난 뒤 충격을 받고 돌아와 앓아눕는다. 목사는 정신적 고통, 종교적 갈등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용서하라는) 주님 말씀대로 산다는 게 어렵다”라고 말한다. 교회 집사인 약국 주인의 말도 목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신애는 정신만이 아니라 ‘몸’도 아프다. 생리통이다. 그런데 종교는 자꾸 마음의 병만을 진찰한다. <밀양>은 푸른 하늘의 햇살 같은 정신과 땅 위에 발 디디고 사는 삶을 동시에 비춘다. 그리고 햇빛의 진정한 비밀은, 상처받은 영혼의 곁에 머무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고통스러운 울음이 자주 등장한다. <밀양>의 신애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에서 대성통곡한다. <박하사탕>의 영호도 그러했다. 영화의 첫 신이자 시간적으로는 가장 나중인 철로 자살 장면에서 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한다. <초록물고기>의 막동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한없이 흐느끼면서 죽어간다. 모두 고통의 절정에서 토해낸 울음이다. 그러나 신애는 살아남고, 영호와 막동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차이가 생겨나는 배경은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밀양>의 헤드 카피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의 포스터에서 신애는 눈물을 머금고 앉아 있고, 종찬은 신애의 등 뒤에서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영화에서 신애와 종찬의 관계는 계속 덜컹거린다. 그런데 <밀양>은 마지막 장면에서 여운을 남긴다. 신애는 마당에 앉아 가위로 머리를 자른다. 종찬이 거울을 들고 신애의 얼굴을 비춰준다. 이때 종찬과 신애는 마주 보는 자세이다. 혹은 종찬과 거울 속의 신애는 같은 방향을 본다. 어느 경우이든, 영화 내내 엇갈리던 시선과 차이가 나는 장면이다. 신애에게는 ‘속물’ 종찬이 하나님보다 더 가까운 존재이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그는 경찰관 생활을 할 때도 내내 외톨이로 지낸다. 게다가 아내와의 불화는 간단없이 이어진다. 영호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외롭게 살아간다. 영호는 혼수상태인 첫사랑 순임을 병원으로 찾아가서야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연다. 영호의 상처는 곪은 채로 덧난다. 반면 신애의 상처는 화산처럼 터진다. 그러한 신애에게는 조력자가 있다. 아들 준의 장례식장에서 시어머니가 신애를 비난할 때, 신애가 교도소 면회실에서 유괴범을 만날 때, 신애가 정신병원을 나와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을 찾아갈 때…, 신애의 굴곡진 삶의 굽이마다 종찬이 등장한다. 종찬은 철저하게 땅 위에 발 디디고 사는,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밀양>에는 인물들이 거리에서 피아노학원 내부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때 그들은 예외 없이 이마를 유리창에 대거나 혹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안을 살펴본다. 밖은 햇빛이 환하고, 안은 어둡기 때문이다. 환한 밖에서는 어두운 집안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가 없다. 이 장면들은 햇빛과 신애의 관계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 햇빛이 아무리 빽빽하다고 해도(密陽), 저 높고 푸른 하늘의 햇빛은 신애의 상처와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푸른 하늘의 빛나는 햇빛과 마지막 장면에서 마당을 비추는 햇빛의 차이이다. 또 하늘의 햇빛을 찬양하는 교회 사람들과 카센터 사장 종찬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신애는 남편의 불륜, 아들의 죽음, 하나님의 배신으로 상처받은 인물이다. 그래도 신애는 머리를 직접 자르고, 신애의 옆에는 ‘속물’ 종찬처럼 땅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신애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신애의 조언에 따라 인테리어를 바꿨다고 말해주는 옷가게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이다. 대화 도중 얼떨결에 신애에게 “미쳤는가보다”라고 말해놓고 서로 웃는 이웃이다. 신애의 삶에 한 조각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햇빛이 아니라 땅 위의 사람들 때문이다. 신애는 하늘의 햇빛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응시함으로써 미약하나마 재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밀양>은 상처가 터진 후에야 새 살이 돋고, 그로 인하여 생은 햇빛처럼 빛나는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높고 고귀한 곳에서 빛나는 햇빛이 아니라 땅 위에 머무르며 상처를 껴안고 보듬어주는 햇빛 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