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우리의 젠더 및 젠더 특성은 행동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한국 사회에서는 연령에 따른 호칭 및 어법 조정이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젠더 특성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나이를 물어 보고, 상호 간에 사회적 태도를 결정하는 의식적인 행위 이전에, 그 사람을 만나자 마자 상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 젠더 특성이다. 남성인 내가 여성을 만날 때, 여성인 내가 남성을 만날 때, 서로를 대하는 매너, 태도, 어투가 나도 모르게 결정된다. 그런데 여성 혹은 남성이 확실하다고 믿는 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호한 어떤 존재와 인사를 나누고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말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대화의 화제는 어떤 식으로 끌고 가야 할지, 나를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채로 당황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확실하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자신의 젠더성을 구축하였다. 누군가가 남성스럽게 행동하는 것, 그리고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모두 생물학적 성(sex)에 기반한 행동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은 대체로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축된다.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다르다고 규정되는 존재인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소통을 하고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성적 특성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였는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의 표면적 젠더 담론들은 남·녀 이분법적 대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이 사회에 남자와 여자 두 가지 성만 존재하는 듯이 서로에 대한 배타적 공격성을 높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간 무수한 투쟁을 통해 만들어 온 젠더 다양성의 열린 가능성을 놓치고 있다. 이 세상에는 남과 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성애자도, 동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모두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말이다. 더 나아가 젠더성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성과 관계없이 다양하게 구축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러한 젠더의 다양성에 대한 상상력이 닫히고 이분법적인 남녀 성 대결에 갇히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The Handmaid’s Tale)』(1985)는 이러한 이분법적 성 대결이 맞이하게 되는 참극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가상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소설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근미래는 미국이 길리어드라는 국가로 바뀐 현실을 보여준다. 환경오염으로 심각한 출산 저하 문제를 겪고 있는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출산률을 회복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 자유 방종한 성적 일탈에서 벗어나 보수적인 일부일처제 가정으로의 회귀하는 것이라 믿고, 쿠데타를 일으켜 길리어드라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
길리어드 정부의 폭압적인 통치 아래에서,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전락한다. 여성은 오로지 사적인 영역에서 아이를 낳고 건강하게 기르는 데에만 집중해야 하며, 이런 여성을 위해서 남성은 밖에 나가서 일만 해야 한다. 듣다 보면 우리에게 그렇게 낯선 세계는 아니다. 현재도 이러한 세계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시녀’라는 설정을 통해 이 보수적 세계의 균열과 모순을 드러내 보여준다. 시녀는 가임기 여성이지만 정당한 남의 아내가 될 수 없는 부정한 여성들로, (이혼을 했거나, 바람을 피웠거나, 레즈비언이거나, 페미니스트일 경우 부정한 여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고위급 간부 집에 가서 씨받이로 일하게 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은 기존의 보수적인 젠더 담론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주체성 그리고 그들의 성적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강조하고 있다.
시녀 이야기는 1985년의 작품이지만, 최근 들어 보수적인 우파 세력이 정권을 잡는 등 그들의 사회적인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그간의 젠더 담론이 다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자, 최근의 젠더 문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가장 적확한 작품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영화 제작사 MGM과 스트리밍 플랫폼 HULU가 합작하여 2017년에 시리즈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 시즌1을 선보였으며 2019년에 시즌3까지 제작·방영하였다. 그리고 2019년에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시녀이야기』의 후속작 『증언들』을 출간하여 부커상까지 수상하였다. 현재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젠더 문제가 보수적인 성윤리를 강요하는 길리어드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에서는 원작보다 더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임신 기계로 전락한 여성들의 삶에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려진다. 그보다도 조금 더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남·녀 성을 분리하고, 공과 사로 나누어 성역할을 구분하고, 그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를 가하는 사회 속에서, 남성들도 똑같이 그들의 쾌락을 박탈당한다는 사실이다. 사회가 여성의 생식기와 자궁만 필요로 하게 되자, 남성도 생식기만 기능하면 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생식기 또한 임신을 위한 기능 외에 또 다른 쾌락을 탐해서는 안 된다.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면 무엇으로 삶의 재미를 찾아야 하는가. 남자는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 <핸드메이즈 테일>에 나오는 남편은 늘 바쁘다. 서류 처리의 연속이다. 남자는 일 하느라 지치고, 정작 일 하고 싶은 여자는 집에서 뜨개질만 하는 것이 끔찍하다.
이렇게 마거릿 애트우드가 만들어 놓은 시녀이야기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의 모든 존재는 남성과 여성으로만 분류되어야 하고, 남성과 여성은 각자의 성적 특성에 맞는 역할만 맡아야 하며,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 죽음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남녀 이분법의 세계 속에서 모두는 각자에게 공격적이다. 아내는 자신의 사회적 일자리를 박탈한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시녀는 자신을 생식기로만 규정하고 동물 취급하는 사회에 분노를 느끼며, 남편은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의 분노가 괴로우며, 그것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인간성에 절망한다. 남·녀의 이분법적 성대결은 모두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로 SF소설에서 젠더에 관한 사고 실험은 이러한 남·녀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SF소설사에서 젠더 역할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이 구체화되던 시기는 1970년대이다. 1968년 세계적 진보 좌파 운동과 연동하여 제2차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일상적 차별 철폐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영향 아래 SF에서도 여성 작가를 중심으로 젠더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형성되었다. 1915년에 처음 발표되었던 샬롯 퍼킨스 길먼의 『여자들만의 나라(Herland)』가 1979년에 재출간되었고, 조애나 러스가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에서 남성 없는 유토피아 와일어웨이(whileaway)를 그려낸 것도 1972년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남성이 없는 여성만의 유토피아를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즉, 남·녀 분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다. 이와 달리 아예 남·녀 성역할 전도에 대한 사고 실험을 보여준 작품이 1977년 게르드 브란트케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움(wom) 맨움(manwom)으로 이루어진 역할 전도의 세계, 미러링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모든 작품들은 대체로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젠더 구성을 극화시켜 현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달리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1969)은 남·녀 이분법적 성대결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테라인 즉 지구인인 겐리 아이가 우주 행성 연맹인 에큐멘에 새로운 행성인 겨울행성의 국가들을 가입시키기 위해서 겨울행성의 국가인 카르히데와 오르고센인을 방문하며 겪은 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겐리 아이는 겨울행성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종의 혼란을 겪게 되는데, 그 이유는 겨울행성에 사는 게센인들은 모두 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센인은 평소에는 중성의 상태로 생활을 하다가 케메르 시기 즉 발정기에만 일정한 성으로 바뀐다. 이때에도 한 개인의 성은 자유롭게 선택된다. 한 개인이 어떤 때에는 남성으로 변했다가, 어떤 때에는 여성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한 개인은 엄마가 되기도 하고 아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상대와의 지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케메르 주기가 찾아오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소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보통 때와 장소와 주기에 맞는 상대들을 자유롭게 만난다. 아이들의 육아는 ‘화로’라고 부르는 혈연·지연·이해관계 공동체가 맡는다. 케메르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아서, 게센인들은 인생의 대부분(약 4/5 정도)를 섹슈얼리티에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젠더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게센인들을 마주한 지구인 남성 겐리 아이는 당황한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가장 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카르히데의 수상 세렘 하르스(혹은 에스트라벤 경)에게 많은 도움을 받지만, 정작 그를 믿지는 못한다. 겐리 아이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종잡을 수 없는 에스트라벤과의 대화가 불편하다. 남자끼리의 대화라는 태도와 어법을 내세울 수도 없고, 여성을 대할 때처럼 배려하거나 매혹당하거나 끼를 부리는 대화도 할 수가 없다. 이런 근본적인 제약 앞에서 겐리 아이는 에스트라벤을 규정할 수 없어서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카르히데와 에큐멘의 협약이 성공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주는 에스트라벤을 믿지 않고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카르히데의 왕에게 의심을 사고 만다. 이는 카르히데의 이웃 국가인 오르고센인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이 일로 카르히데에서 추방당한 에스트라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고센인에서도 겐리 아이를 돕지만, 겐리 아이는 그를 믿지 않고, 결국 겐리 아이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소설은 지구와 다른 행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전달해 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이 에큐멘 협약을 성사시키기 위한 도전과 모험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핵심은 ‘낯선 이’, ‘외계인’을 받아들이는 수용과 소통의 서사이다. 겐리 아이에게 성의 구분이 없는 게센인은 사회적 소통의 태도를 결정짓지 못하게 하여 불편하게 만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게센인인 에스트라벤에게 지구인 겐리 아이는 일 년 내내 이차 성징이 발현되어 있는 성도착자이다. (실제로 겨울행성에는 호르몬의 이상으로 케메르 시기가 아닌데도 이차 성징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몇몇 존재하는데, 그들은 성도착자로 여겨져서 아무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작품은 서로를 믿지 못해 2번의 실패를 겪은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이 북쪽 빙원을 통과하는 모험을 함께 하며 어떻게 서로와 소통하게 되는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겐리 아이가 에스트라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에스트라벤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순간 시작된다. 겐리 아이가 에스트라벤의 젠더적 특성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에스트라벤이 오르고센인 감옥에 갇힌 겐리 아이를 탈출시켜서, 북쪽 빙원을 통해 카르히데로 돌아가는 모험의 여정 속에서, 그 둘은 약 80여 일 동안 한 텐트에서 함께하게 된다. 겐리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에스트라벤의 케메르기에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겐리 아이는 케메르기를 겪는 에스트라벤을 이상하다거나 역겹다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겐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보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 에스트라벤에게서 보고도 애써 못 본 척해 왔던 것을 다시금 보고야 말았다. 그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 두려움의 근원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성은 두려움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마침내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에스트라벤을, 그의 진정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략) 에스트라벤은 나를 인간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준 유일한 이였던 것이다.”
겐리 아이는 자신과 완전하게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를 설명하려 하고, 나의 논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순간이 오히려 그의 존재가 나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아서 불편했던 순간이고, 그의 존재를 나의 언어로 왜곡하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신뢰와 소통은 이렇게 나의 언어와 나의 논리로 상대를 포착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에스트라벤처럼 나와 다른 존재도 그저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은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수용과 신뢰를 바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사랑의 순간에 겐리 아이는 깨닫는다. 자기 자신이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당신은 고립되어 있지만 단절되어 있진 않군요. 아마도 당신은 우리가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 못지않게 전체성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겐리 아이는 에스트라벤과 같은 게센인들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태극 문양과 같은 존재라고 받아들인다. 물론 에스트라벤은 게센인들 또한 나와 너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게센인의 세계는 그 이분법이 배타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세계이다. 에스트라벤이 읊은 시에서 나타나듯이,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인 것이다. 내 안에 남성과 여성이 모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성역할에 구속되지 않듯이, 나와 너의 다름 또한 서로 차이를 지닌 채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분법은 어느 사회나 작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이분법을 바탕으로 하나의 ‘정상’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맞추어 나머지를 ‘비정상’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공격하고 억압하는 배타성은 배제되어야 한다. SF를 통해 우리가 우주를 상상하는 것은 외계인의 침공에 대비하거나, 우주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SF를 통한 우주적 상상력은 지구인인 나 또한 어느 세계에서는 성도착자이자 비정상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외계인이라 부르는 그 낯선 존재들 또한 지극히 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그 상상력을 현실로 가져와서, 젠더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이분법적인 틀에서 해체하여 다양한 젠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런 다양한 젠더성이 자유롭게 공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 현실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글 · 이주라(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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