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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국(自國)만을 위한 휴머니즘이 간과한 것들: <모가디슈>가 타국의 아픔을 그리는 태도에 대하여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국(自國)만을 위한 휴머니즘이 간과한 것들: <모가디슈>가 타국의 아픔을 그리는 태도에 대하여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15 09: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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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을 넘어서는 코로나의 여파로 극장가의 몸살이 극에 달했을 때, 영화 <모가디슈>는 극장에 찾아갈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짚어주었다. <모가디슈>의 스펙터클과 내러티브는 스크린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것이 이런 느낌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시켜주었다. 남과 북이 UN 가입을 두고 경쟁을 벌이던 1991년, 조금이라도 유리한 표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 소말리아로 향한 남과 북의 로비와 그로 인한 긴장감, 이 사이 폭발한 소말리아 사람들의 분노로 시작된 내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함께’ 해야 하는 멋쩍음과 화합, 탈출 후 서로를 외면해야 했던 냉전 한복판에 대한 자각, 이 모든 것은 <모가디슈>가 스펙터클을 넘어 ‘우리’의 ‘공감’을 자극한 것처럼 보였다. 이 나라에서만 먹는다는 깻잎 꼭지를 젓가락으로 잡을 때의 번거로움, 어디를 눌러줘야 깻잎을 쉽게 떼어낼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다른 젓가락의 도움은 이 영화가 남과 북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냈고 강렬한 스펙터클 속에서 ‘한민족’을 강화시키는 것을 이상하지 않게 했다.

 

굳이 민족을 말하지 않는대도 이러한 스토리는 꽤나 보편적인 정서에 기댄 것일지 모른다. 부득이한 이유가 만든 적과의 동행, 특별할 것 없는 감정의 교류, 동질감으로 인한 친화 등은 오랫동안 보아온, 그럼에도 늘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의 수순이었다. 때문에 이 구도가 남과 북의 관계를 중심에 둔 <모가디슈>에 옮겨온다는 것에 그리 큰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이래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보아왔고, <모가디슈>에서 그리고 있는 감정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모가디슈>가 강조한 ‘한민족’의 이야기는 어딘가 이기적으로 보인다. 한민족‘만’의 공감과 감동을 위해 영화가 배치했다 치워버린 흔적이 너무나 뼈아프기 때문이다. 위험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 흔적의 삭제는 이 영화가 소말리아의 내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태도와 연결된다. 영화의 초반과 후반 소말리아의 시민군(영화에서는 반군이라 칭하지만 이글에서는 시민군이라 칭하고자 한다.)을 향해 전혀 다른 시선을 보내는 이 영화의 어정쩡하면서도 잔인한 태도 말이다.

소말리아의 내전을 관객들에게 가시화 시키는 영화의 초반, 가장 강렬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무장을 한 정부군이 두 팔을 뻗은 채 누운 시민의 발을 잡아 끌며 지나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나라가 겪어온 현대사의 한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해당 장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그린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뿐만 아니라 <택시운전사>에서 독일 기자의 카메라를 통해서까지 등장했던 바로 그 모습이다. 1960년부터 독재를 향해 목소리를 냈던 4.19와 1970년대를 가득 채웠던 무수한 목소리들, 그리고 5.18을 지나 1987년을 향해 가는 동안 무장한 군인 앞에 스러졌던 이들의 이미지는 정확히 이 장면과 겹친다. 영화 <1987>(2017)의 마지막, 이한열 열사의 이미지가 스크린을 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모가디슈>에서 정부군에게 정신을 잃은 채 끌려가는 시민의 이미지는 이 나라의 현대사를 지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2년간의 독재를 향한 소말리아 시민군의 대항은 분명 이곳에서 겪어온 과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모가디슈>가 처음 이 장면을 등장시켰다는 것은 영화가 소말리아의 정부군과 시민군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지시하는 것일 테다. 이는 실제로 남한 대사관의 일을 돕던 소말리아 청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소말리아 청년에 대한 대사관 직원들의 살뜰한 태도를 통해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선한 이인지를 착실하게 묘사한다. 그가 정부군에게 쫓기는 상황이 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주는 것에서도 남측 대사관 직원들이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지이다. 적어도 그는 정부군이 말하는 주동자가 아닐 것이라는 점, 아니 설사 그렇다해도 정부군이 휘두른 곤봉에 그렇게 처참하게 사망하면 안 되는 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이 인물은 영화가 소말리아 내전에서 드러난 정부의 폭력성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후자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는 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남북의 ‘화합’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순간 이러한 구분은 완벽하게 무화되어 버린다. 이는 더 없이 잔인한 선택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집중하는 것은 남과 북이 어떻게 함께할 수밖에 없었는지, 차마 서로를 두고 갈 수 없게 된 연대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빨갱이’들을 집에 들이는 처음이 힘들었을 뿐, 함께 식사를 하는 식구가 되고 서로의 상황을 알아가며 연민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다. 내부의 적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게다가 내전이라는 상황에서 적은 너무도 쉽게 설정될 수 있었다. 함께하게 된 그들이 ‘탈출’을 목표로 삼았을 때, 그들을 막아서는 모든 것은 쉽게 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모가디슈를 탈출하려는 남북을 막아서는 이들은 그것이 정부군이든 시민군이든 모두 적의 자리에 선다. 그것이 누구든 탈출하려는 이들에게는 모두 폭력을 들이대는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보호를 목적으로 남측의 돈을 뜯어내려는 정부군이나, 정보원이라 믿으며 신뢰를 쌓았지만 북측을 속이고 물건을 탈취하며 폭행을 가하는 시민군은 더 이상 <모가디슈>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며 남과 북이 마주한 현실은 그저 자신들을 공격하는 총탄과 그것을 들고 있는 이들에 대한 공포심 뿐, 더 이상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나왔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남과 북의 ‘감동 어린 생존 실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소말리아 시민군의 운동은 <모가디슈>에서 이렇게 사라졌다. 처음 영화가 주목했던 시민군의 정당함, 이들을 ‘처치’하려는 정부군의 폭력성은 이곳을 안전하게 탈출하려는 이들에 대한 공격으로 남았을 뿐이다. 간신히 탈출할 방법을 찾은 남북이 차창 밖 총을 든 소년병들에게 보내는 눈빛이 공허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이곳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총을 든 소년병들은, 마치 장난처럼 위협했던 바로 그 기억에 대한 공포 이상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병들이 얼마나 잔인한 이유로 차출됐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지, 결국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의 문제는 소말리아를 탈출할 수 있는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그 자체로 공포가 되어버린 모가디슈 한복판은 더 이상 같은 문제를 겪었던 이 나라와는 겹쳐질 수 없는, 이제는 남 일이 되어버린 그곳으로 뒤바뀐다. 안타까운 남과 북의 이별 장면으로 쉽게 덮힐 모가디슈의 상황은 더 이상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인 것이다.

소말리아의 내전은 ‘우리’의 탈출을 위해 후경화 되었다. 이 문제에 민감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버렸을 때의 분노가 예의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함부로 뭉뚱그릴 수 없는 누군가의 역사가 <모가디슈>에서 단순화 되었다. 게다가 아직 이 나라가 인지하지 못한, 혹은 인정하지 않은 많은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한국 영화는 꽤 많은 곳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엇을 해왔는가에 대해 세심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실례가, 아니 폭력이 너무 쉽게 퍼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과연 이렇게까지 볼 필요가 있느냐고.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모가디슈의 한복판을 1980년대의 남한 어느 곳으로 바꾼다거나, 군부에 강력하게 항거하고 있는 미얀마의 어느 곳으로 바꾸어 보라고. 그때 느낄 아찔함, 그것이 바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시각의 잔인함이라고 말이다.

 

<모가디슈>(2021)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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