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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탈식민화의 하녀들: <아가씨> 박찬욱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탈식민화의 하녀들: <아가씨> 박찬욱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1.1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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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와 각색영화 <아가씨>

박찬욱의 <아가씨>(2016)는 영국 레즈비언 소설가 사라 워터스(Sarah Waters)의 『핑거스미스』(Fingersmith, 2002)를 원전으로 한 각색영화이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아가씨>가 『핑거스미스』를 원전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다시 보기를 시도하는 네오 빅토리안 소설 장르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시대 영국은 우리에게 항상 강력한 제국의 축도로 떠오른다. 따라서 <아가씨>는 원작 네오빅토리안 소설이 시도한 빅토리아 시대로의 귀환을 재전용하여 한국의 식민지 시대에 대한 다시 보기를 한, 즉 식민주의 이슈를 다루기 위해 서구 텍스트를 각색한 21세기 글로벌화 시대의 대표적 한국 영화인 것이다.

네오 빅토리안 서스펜스 소설이자 레즈비언 소설 『핑거스미스』는 계급과 젠더 이슈,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아가씨>는 원작에 충실한 각색은 아니다. 처음엔 한국 남성 감독이 만든 각색영화지만 본인 원작의 페미니즘에 충실하다고 여겼던 워터스도 인정했듯이, 이 영화의 주 관심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라기보다는 식민주의와 탈식민화이다.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한국영화로서 <아가씨>는 독립운동과 반식민주의를 전경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성과 이데올로기가 결핍된 영화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 초국가적 혼종 문화 현상 한류의 주역이 되어 온 한국영화는 마침내 식민지 경험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이데올로기적 긴장감과 불안감 없이, 식민주의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신식민화와 탈식민화라는 주요 이슈들까지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아가씨>인 것이다.

 

 

<아가씨>가 1930년대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방식은 역사적 사건보다는 특정한 상황과 개인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이 영화는 원작의 고딕식 브라이어 장원(Briar manor)을 코우즈키의 저택으로, 그리고 4명의 주요 등장인물들, 사기꾼 젠들맨(Gentleman)과 폭군 릴리 아저씨(Christopher Lily), 그리고 수(Sue Trinder)와 모드(Maud Lily)를 가짜 일본인들인 사기꾼 후지와라 백작(하정우)과 코우즈키 이모부(조진웅), 그리고 한국인 하녀 숙희(김태리)와 일본인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로 각각 대체하는 주요 변경들을 취했다. 이러한 각색으로 이 영화는 친일파 코우즈키의 저택이라는 특정한 환경과 그 속에 놓인 친일파 그룹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1930년 일제 강점기의 대한 박찬욱 특유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식민화와 탈식민화의 하녀들

박찬욱은 1930년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1930년대 일제 강점기가 아가씨와 하녀가 존재할 수 있는 중세적인 질서와 사회적 위계의 엄격한 계급 제도가 존재했었고, 동시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기관인 일탈적인 그리고 용도 폐기된 여자들을 쉽게 처분하기에 적절한 서구식 정신병원이 있었던 근대적인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아가씨>에서 1930년대를 다룬 것은 한국사회가 식민화와 더불어 근대화와 서구화의 진행 과정에 진입하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입 시기와 맞물려 있는 한국의 근대화와 서구화가 식민화 과정과 연관성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대 군사정권 하에서 전개된 한국의 산업화와 본격적인 근대화에 대한 담론은 근대화를 젠더화된 하위계층, 즉 “근대화의 하녀들”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파악한다. 이러한 담론은 거슬러 올라가 일본 군사적 통치 하에 한국의 근대화와 더불어 식민화에도 적용되어, ‘식민화의 하녀들’의 착취에 기초한 “젠더화된 프로젝트”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아가씨> 또한 일제 강점기의 식민화와 근대화를 젠더화된 프로젝트로 파악하고 활용하고 있음을 식민화의 하녀들로 등장한 숙희와 히데코의 역할과 그 역할의 변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아가씨>는 일단 숙희와 히데코가 식민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 타자로 부당하게 억압받고, 속임을 당하고, 지배를 당하고, 이용된 뒤 폐기될 수 있는 비체(abject)로 취급되는 식민화의 하녀들로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들이 식민화의 하녀들로 취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을 일제 강점기 사회 체제의 은밀하고 추악한 것들을 폭로할 수 있는 무기로, 즉 당대 사회의 치부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이러한 폭로와 공격에 그치지 않고 두 여자의 하녀-되기 과정을 통해 이들이 탈식민화의 동인으로서의 역할, 즉 ‘탈식민화의 하녀들’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오(neo)/모조(faux) 레즈비언 스릴러

『핑거스미스』는 “일탈적인”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범죄소설, 역사소설, 고딕픽션 등의 빅토리아 소설 장르를 전용한 네오 빅토리안 소설 형식을 취했다. 워터스가 네오 빅토리안 소설을 쓴 중요한 이유는 일탈적인 레즈비언 욕망을 순화시키는데 주력한 빅토리안 소설의 정통성을 전용하여 빅토리아 시대 역사적 기록과 문학 전통에 유령처럼 등장했던 레즈비언과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가시화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빅토리안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이성애적 규범성을 강화시키는데 주력했던 빅토리안 소설을 전용한 네오 빅토리안 소설은 “모조”(faux) 빅토리안 소설로 불린다. 네오/모조 빅토리안 소설 『핑거스미스』를 각색한 <아가씨>는 통상 레즈비언 스릴러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자체가 아니라 식민주의와 탈식민화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레즈비언 스릴러를 전용한 영화이다. 따라서 네오 빅토리안 소설 『핑거스미스』가 모조 빅토리안 소설로 불리듯이, <아가씨> 또한 네오/모조 레즈비언 스릴러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분류이다.

원작이 빅토리아 시대의 역사와 소설에서 비가시적이었던 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가시화되는 과정을 극화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면, 네오/모조 레즈비언 스릴러 <아가씨>는 동성애를 식민지 시대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서 삶의 한 부분으로, 즉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수와 모드는 다른 사람들의 게이즈를 의식하고 죄의식을 느끼지만, 반면에 숙희와 히데코는 그들의 일탈적인 레즈비언 욕망에 대하여 죄의식과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원작은 수와 모드가 브라이어 장원으로 다시 돌아와 그 황폐한 공간을 여성화된 사적인 공간으로 개척하는 것을 엔딩으로 한다. 반면에 <아가씨>는 코우즈키의 저택으로 결코 돌아오지 않을 숙희와 히데코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출항으로 끝난다. 이러한 엔딩은 <아가씨>의 각색 의도가 두 여자의 “출격”(sortie)에 이르는 과정과 이를 통해 탈식민화의 동력을 탐구하기 위한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수와 모드의 귀환으로 끝나는 네오/모조 빅토리안 소설의 엔딩은 이들이 빅토리아조 사회 체제, 즉 제국 밖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네오/모조 레즈비언 스릴러 영화의 엔딩은 제국을 상징하는 코우즈키 저택이 이 두 여자의 탈주의 욕망을 결코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따라서 복수 삼부작,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이 보여주는 아르토(Antonin Artaud)적 잔혹의 극한으로 한국 스릴러 영화의 대가가 된 박찬욱은 네오/모조 레즈비언 스릴러 <아가씨>로 탈식민화의 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한 새로운 스릴러 장르를 창조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미학과 코우즈키의 저택

<아가씨>가 위선적이고 폭군적인 코우즈키와 기회주의적이고 잔인한 백작이라는 블랙 코미디의 친일파 남성 인물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것은 “식민주의 미학”이다. 왜 그렇게 일본인이 되려고 애썼느냐는 백작의 질문에 코우즈키는 “잔인한” 일본은 아름답고, “무르고 흐리고 둔한” 조선은 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즉 미의 본질은 강하고 잔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코우즈키의 대답은 바로 식민주의 미학의 핵심을 말해준다. 부역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일본인 여자(히데코의 이모)와 결혼하기 위해 조선인 아내를 가정부(사사키 부인)로 삼고, 일본 문화 미학을 페티시화는 코우즈키의 행태는 약소국 국민으로서의 자기혐오와 국가적 비체화(national abjection) 그리고 강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호와 복종이라는 노예성에 근거한 식민주의 미학의 실천 사례를 보여준다.

백작 또한 제주도 하인의 아들로 일본에 건너가 사창가에서 일하며 일본에 와있는 영국신사들로부터 플레이보이 귀족의 매너를 완벽하게 학습 모방하여 일본인 귀족 행세를 하는 사기꾼이다. 그가 아름다움과 여자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습득한 기술인 모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식민주의 미학이 시사하는 예술적 창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사기꾼 백작처럼 코우즈키 또한 일본인 아내를 제인 에어(Jane Eyre, 1847)의 버사(Bertha)처럼 미친 여자로 몰아 감금시켜 가정부의 감시 하에 두는 로체스터(Mr. Rochester)와 같은 제국주의자 영국 신사를 모방하는 가짜 신사이다. 엔딩에서 히데코가 코우즈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작에게 속은 그를 조롱하듯이, 코우즈키는 사기꾼 백작이 대변하는 일본 귀족 사교계에 끼기 위해서 목소리의 귀족적 떨림까지도 연구하여 모방할 정도로 안간힘을 쓴다. 두 남자 코우즈키와 백작에 대한 이러한 희화화를 통해 이 영화는 식민주의 미학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아가씨>에서 식민주의 미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코우즈키의 저택이다. 1부 시작 부분에서 숙희의 관점을 통해 본 코우즈키의 저택은 헐리웃 고딕 호러 장르의 저택을 모방한 매우 낯선 양식의 압도적인 건축물이다. 이 저택은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하인들이 거주하는 한식을 혼합한 혼성모방으로 사실주의를 초월한 영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코우즈키의 식민주의 미학을 반영하는 이러한 저택은, 박찬욱이 밝혔듯이, 그 자체가 코우즈키 자신이며, 그의 제국이자, 그의 내적 정신을 시각화한 공간이다.

 

특히 서재는 영화의 모든 중요한 국면들이 통합되는 주요 공간으로 온전히 코우즈키의 식민주의 미학의 취향에 따라 별채에 꾸며놓은 그의 낙원이다. 포르노그래피 책들을 보관한 영국식 서고, 일본 미학의 정수인 실내 정원을 갖춘 극장으로도 사용되는 서재는 넓고 격조 있는 공간으로 울트라와이드스크린 효과로 촬영되었다. 이러한 서재 장면들은 넓은 스크린 속에 다양한 페티시들과 청동뱀과 같은 고딕풍의 소장품들을 수평으로 압착하여 펼쳐 보인다. 바로 이 공간에 이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구성하는 히데코의 낭독 공연을 위한 극장이 설치된다. 그리고 코우즈키의 제국으로부터 히데코와 숙희가 탈주하기에 앞서 숙희가 주도한 분노에 찬 격렬한 파괴 행위가 일어나는 곳도 여기이다.

코우즈키 저택의 심연에는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숨은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바로 이 넓고 우아한 서재의 다다미 바닥과 맞닿아 있는 지하 공간으로, 그의 “갇힌 여자” 히데코가 도주할 경우 잡아다 가두겠다고 위협하는 호러의 공간이다. 따라서 이 지하실은 히데코에게는 그녀의 이모의 의문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악몽과 두려움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코우즈키가 백작에게 가하는 박찬욱식의 잔혹한 복수의 고문과 그들의 동반 타락과 자살에 이르는 엔딩 장면들이 전개되는 곳이기도 하다. 엔트로피로 치닫는 폐쇄 공간에서 두 남자의 동반 타락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코우즈키의 닫힌 공간의 제국으로부터 벗어난 두 여자의 동반 구원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장면들과 교차편집되어 엔딩 시퀀스를 구성한다.

 

두 남자의 동반 타락과 두 여자의 동반 구원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한국사회와 그 심연을 상징하는 코우즈키 저택과 그 지하 공간은 “충동들”의 기호와 페티시들로 충만한 충동-이미지의 자연주의적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손가락을 절단당한 백작과 폐인이 된 코우즈키가 “이상하게 아름다운” 푸른 수은 증기 속에서 최후를 맞는 장면은 자연주의 영화의 엔딩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엔딩과 대조를 이루는 히데코와 숙희의 동반 구원과 탈주는 바로 위대한 자연주의 영화들이 지향하는 자연주의적 세계로부터의 탈주로 볼 수 있다. 코우즈키의 잔혹한 폭력 행사는 식민주의 미학이 함축하고 있는 노예성이라는 충동의 분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 코우즈키의 저택에는 노예성의 충동이 잠재되어 있다. 그의 제국의 심연인 지하 공간에서의 그의 말로는 폭력적 충동에 굴복한 코우즈키가 타락과 죽음으로 자신을 몰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스트로하임(Eric Von Stroheim), 브뉴엘(Luis Buñuel)과 함께 위대한 자연주의 영화감독으로 인정한 로지(Joseph Losey)의 <하인>(The Servant, 1963)에 등장하는 수잔(Susan)과 베라(Vera)를 연상시킨다. 로지가 위대한 자연주의 영화감독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여자에게서 자연주의적 세계로부터 구원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논리를 적용하면,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 또한 자연주의적 세계로부터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자들로 볼 수 있다. 로지의 여자들처럼 이 세계에서 “희생자”(victim)이거나 “사용자”(user)가 될 수밖에 없는 히데코는 그녀의 “구원자” 숙희와 더불어 구원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박찬욱의 여자들이다.

일본 아가씨 상속녀 히데코는 이모를 대체하여 코우즈키의 갇힌 여자로 남성들의 성적, 금전적, 식민적 권력 게임에 볼모로 잡혀 있는 희생자 역할이 강요된다. 비록 그녀가 마스크레이드를 통해 백작을 유혹하여 자기 대신 정신병원에 갇힐 조선인 하녀 숙희를 구해오도록 하지만, 고아인 이 두 여자는 식민화 과정에서 착취를 당하고 이용된 후 쉽게 처분 가능한 식민화의 하녀들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될 뿐이다. 그러나 사기꾼 백작 대신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숙희가 히데코의 “구원자”가 됨으로써 식민화의 하녀들은 하녀-되기의 과정을 통해 탈식민화의 하녀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숙희와 히데코의 하녀-되기는 물론 소수-되기이다. 소수로서 하녀는 한 인간이 아니라 라캉(Jacques Lacan)의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 또는 파농(Frantz Fanon)의 사물(thing)로만 존재할 뿐이다. 파농에 의하면, 탈식민화란 식민화된 소수, 즉 사물로서 존재하는 피식민자가 자신을 해방시켜 인간이 될 때, 새로운 인간, 새로운 민족이 창조될 때 일어난다. <아가씨>는 숙희와 히데코의 하녀-되기를 통해 도달한, 페미니스트 식수스(Hélène Cixous)와 클레망(Catherine Clément)이 정의한 “새로 탄생한 여자”(la jeune née), 즉 새로운 여성의 창조를 전경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간, 민족의 창조로 가능한 탈식민화의 이슈를 다룬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영화는 두 여자의 탈식민화의 하녀들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히데코의 낭독 공연의 연극성과 마스크레이드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숙희의 분노에 찬 “그분은 처음부터... 그냥 무서운 년이다...” 라는 외침에서 마침내 관객은 히데코가 순진한 희생자 역할을 연기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히데코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2부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 과정을 지휘했던 자가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실제 그녀는 낭독하고 있는 소설에 등장하는 공작부인 쥘리에트와 같은 여자였던 것이다.

히데코의 연극적 낭독 스펙터클은 사드 후작(Donatien Alphonse François, marquis de Sade)과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폭군적인 리베르탱(libertin)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코우즈키가 폭력적이고도 철저한 훈련과 억압적인 통제로 연출한 것이다. 따라서 일견 그녀의 낭독은 코우즈키와 초대받은 남성 관객들의 관음증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극적 공연으로 보인다. 그러나 워터스도 지적했듯이, 히데코는 공연을 통해 오히려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그녀의 공연은 남성 관객들을 그들의 성적 판타지에 굴복시키고, 그들의 권위적인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연극성의 전복적인 힘을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공연은 역설적이지만 그녀 자신의 관음증적 쾌락과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컨대, 그녀는 관객들 속에서 새로운 얼굴, 후지와라 백작을 발견하고, 그녀의 강력한 첫 시선으로 그를 압도하여 그녀의 유혹자가 아니라 그 스스로 구원자가 되길 지망하는 용감한 기사로 유혹할 수 있다. 이러한 히데코의 위력은 장 쥬네(Jean Genet)의 발코니(Le Balcon, 1960)의 주인공, ‘판타지의 집’의 여주인 마담 어마(Madame Irma)처럼 코우즈키의 극장을 자신이 통제하고 연출할 수 있는 극장으로 변형시킨다.

 

 

박찬욱이 ‘하얀 고양이’로 페티시화한 하얀 기모노를 입고 표정 없는 가면을 쓴 것 같은 백분 화장을 한 히데코의 낭독 공연을 비롯하여 그녀의 극적 낭독들은 마스크레이드로 설명될 수 있다. 이리거라이(Luce Irigaray)가 마스크레이드를 여성성의 표현으로 규정하고 있듯이, 히데코의 마스크레이드는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그녀의 변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히데코의 공연은 그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루고 남성의 욕망에 참여하기 위한 마스크레이드라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코는 마스크레이드를 복종이 아니라 저항의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 낭독회 도중 클로즈업으로 잡은 히데코의 담담한 얼굴 표정과 오만한 시선은 남성 관객들을 오히려 위축시키고 수치감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 워터스가 가장 훌륭한 장면으로 선정하기도 한 히데코가 보여주는 나무인형과의 체위 시범 장면은 과장된 마스크레이드의 효과를 발휘한다. 공중에 매달려 남근을 상징하는 꼭두각시 인형과 벌이는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공연은 부조리하고 코믹한 과장 효과를 의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를 마치고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그녀 앞에서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남성 관객들의 반응은 과장된 마스크레이드의 코믹 효과를 증폭시킨다. 그러나 히데코가 연극성과 마스크레이드로 코우즈키의 극장, 그의 제국에 혼란과 동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격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떤 힘”(a certain force)이 필요하다. 그 어떤 힘을 발휘하는 히데코의 구원자가 바로 숙희인 것이다.

 

숙희가 코우즈키 서재에서 히데코가 낭독한 책의 내용과 그림의 실체를 알았을 때 벌인 격분의 난장판은 식민화된, 비체화된 여성의 몸에 기초한 코우즈키의 제국에 대한 공격으로 이들의 출격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에 의한 파괴와 소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숙희가 책들을 칼로 찢고, 서가를 통째로 쓰러뜨리고, 쇠자로 뱀대가리를 박살내는 동안, 매혹된 표정의 히데코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남숙희....내 동무”라는 보이스오버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숙희를 바라보는 장면은 새로운 삶의 모험을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어떤 힘에 의한 파괴와 소진을 통한 순수 강도의 에너지의 생성을 보여준다.

 

이후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으로 꼽히는 이들이 코우즈키의 저택에서 빠져나와 어두운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 장면은 1, 2부에서 각각 멀리서, 좀더 가까이에서 잡은 화면으로 반복되어 삽입된다. 원작에 없는 이 장면을 감독이 넣은 의도는 두 여자가 만끽하는 강렬하게 솟구치는 해방감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히데코와 숙희의 하녀-되기: 커플화, 탈커플화, 그리고 탈식민화

박찬욱은 <아가씨>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가씨 숙희와 하녀 히데코 사이의 간극을 줄여가는 여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원작자를 포함하여 많은 평자들은 동등한 입지에서 숙희와 히데코를 재현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한 심경을 표했다. 워터스는 아가씨와 하녀 사이의 지나친 육체적 친밀감이 어색하고, 특히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보이는 체위로 섹스를 하는 것이 좀 거부감을 준다고 지적했다. 숙희와 히데코의 동등한 관계에 대한 이러한 불편감은 별개의 두 실체들 사이의 커플화(coupling)를 전제로 하는 서구적 형이상학이 기초하고 있는 이분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커플의 양자 사이의 실제 관계는 동등한 입지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권력의 특권과 배제의 기준에 따라 부과된 위계적 관계이다. 즉 양자 사이의 암묵적인 위계에 따라 커플은 주체와 타자로 구조된다. 이러한 위계적 관계의 커플화는 히데코가 공연하는 코우즈키의 극장의 메커니즘의 설명에도 적용된다. 식수스가 말하듯이, “남성적 환상의 독재에 의해서 세워진” 연극으로 규정될 수 있는 전통 연극의 메커니즘에 기초한 코우즈키의 극장은 히데코를 남성의 나르시시즘적인 환상을 지켜주는 거울, 그의 남근의 수호자, 그의 욕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될 것을 강요한다. 다시 말해, 코우즈키의 극장은 타자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을 보는 주체의 거울비추기(mirroring)로 설명되는 주체와 타자의 커플화에 기초한다. 주체의 특권으로 간주되는 거울비추기는 남성중심문화의 산물인 전통 연극의 메커니즘뿐 아니라 제국과 식민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커플화, 즉 식민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식수스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이러한 식민화의 메커니즘을 해체하고 변형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남성적, 서구적, 식민주의적 판타지의 산물인 이 위계적 커플을 대처해야, 즉 탈커플화(decoupling)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보기에 어색하고 거북하다고 지적되는 숙희와 히데코의 데칼코마니 같은 체위는 섹스 체위라기보다는 위계적인 커플 관계의 커플화를 벗어난 탈커플화(decoupling)된 주체들로서 두 여자가 서로를 비추어 보는 이중적 거울비추기로 설명될 수 있다.

히데코의 침실 거울 앞에서 그녀와 숙희가 즐기는 하녀의 아가씨 드레스 입히기와 벗기기 놀이, 즉 아가씨-하녀 놀이는 숙희를 거울로 한 히데코의 일방적인 거울비추기가 아니라 두 여자들이 서로에게 거울로서 기능하는 이중적 거울비추기로 설명될 수 있다. 거울 앞에서 그들은 이러한 이중적 거울비추기를 즐기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레이스로 단단히 묶은 코르셋을 입은 여성의 이미지는 억압을 당하는 빅토리아조 여성의 시각적 상징이다. 따라서 히데코가 착용한 긴 장갑과 많은 단추로 채워 꼭 낀 드레스는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제국주의적 점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서랍에 정리된 히데코의 장갑 콜렉션은 식민주의 미학의 페티시들이기도 하다. 아가씨의 드레스를 입히고 벗기고 하는 것은 하녀의 일이지만, 숙희는 “아가씨는 하녀의 인형”으로 여기며 이 일을 놀이로 즐긴다. 히데코 또한 숙희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벗기는 하녀 놀이를 즐긴다. 거울 앞에서 이들이 즐기는 이러한 놀이 장면들은 아가씨와 하녀의 위계적 관계의 탈커플화와 하녀-되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아가씨>는 히데코와 숙희의 탈커플화와 더불어, 식민지와 제국,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이분법적인 위계적 관계의 탈커플화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양한 전략들을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는 <아가씨> 그리고 영어 제목은 <하녀>(The Handmaiden)로 붙이고, 일본인 등장인물들을 한국인 배우로 캐스팅하고,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일본어와 한국어를 상황에 따라 가려 쓰는 대신에 임의적으로 두 언어를 바꿔 사용하도록 하는 등, 커플들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를 해체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아가씨>가 보여주고자한 계급, 나이, 민족적 정체성 관점에서 일본 아가씨와 한국 하녀 사이의 간극 줄이기는 탈커플화와 하녀-되기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엔딩 부분에서 히데코가 숙희의 구두끈을 묶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는 선상에서의 장면이 시사하듯이, 두 여자의 동등한 관계 맺기에 이른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탈식민화의 하녀들

 

<아가씨>의 엔딩 시퀀스는 숙희와 히데코가 승선한 배의 갑판과 선실 장면들과 코우즈키와 백작의 지하실 장면들이 교차편집되어 전개된다. 사드 소설의 고문 장면을 전유한 백작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은 마초적 에로티시즘을 잔혹하고 치명적인 쾌락으로까지 과장하여 보여준다. 이렇게 박찬욱 특유의 블랙 코미디로 이 두 친일파 남자들을 조소함으로써, 엔딩 시퀀스는 두 여자가 누리는 해방과 자유를 더욱 강조하는 대조적 효과를 초래한다.

숙희와 히데코가 탄 배는 1930년대 동양과 서양의 혼종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모폴리턴 도시 상하이로 향하는 페리호이다. 이들은 이 배를 타고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 사이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이 바다는 제국으로부터의 탈주선, 즉 탈영토화 또는 탈식민화의 가능성들을 포함한 “사이”(in-between) 공간, 혼종의 공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둡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와 배 위에 펼쳐진 밤하늘과 보름달, 그리고 숙희 방과 히데코 방 사이 문에 걸려 있던 수묵화 속으로 들어간 보름달 장면을 엔딩으로 이 영화는 두 여자가 사이의 공간을 가로질러 도달할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향한 시그널로 끝을 맺는다. 행군하는 일본 군인들이 따라오는 한국 아이들을 갑자기 공격하고 위협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하여 관객에게 억압적인 식민적 상황에 대한 영화임을 시사한 <아가씨>의 이러한 엔딩은 관객에게 다가오는 탈식민화와 해방의 미래를 시사한다.

 

 

출처: Korea Journal (60.1)에 실린 “Hallyu and Film Adaptation: Maids of Decolonization in Park Chan-wook’s The Handmaiden”(128-151)에서 논의된 주요 논지를 재고하고 한글로 다시 쓰기를 한 글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저자·정문영
계명대 영문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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