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2010:215)
이성표 작가가 그린 그림책 『시를 읽는다』(작가정신, 2022)를 통해 박완서(1931~2011) 작가를 만났다. 떠나신지 11년이 지났지만 독자는 여전히 작품을 통해 계속 그와 만날 수 있다. 이성표 작가의 그림은 간결하고 여백이 많다. ‘시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그는 윤동주의 시 ‘소년’을 그렸고, 박완서의 문장을 시적으로 그려냈다. 문장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선으로 은유와 상징을 섞고, 무르익는 ‘시간’을 통해 그림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의 책이 “마음속에 풀이 돋듯이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책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소망을 담아 그림책 작업을 한다. 그래서였을까? 『시를 읽는다』의 표지에서 등장인물의 머리카락은 ‘풀의 리듬’으로 휘날린다. 머리카락으로 형상화된 시의 리듬은 김수영의 「풀」과 겹쳐진다. 작가 박완서가 읽으며 행복했던 시집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민음사, 2008)에서 독자가 첫 번째로 만나는 시가 김수영의 「풀」이다.
풀이 눞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흔하디 흔한 풀은 ‘민중의 힘’을 연상시킨다. 가는 색샤프로 그린 이성표 작가의 그림은 편안하고 섬세하다. 선의 결이 정돈된 리듬을 보여주다가도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에서 사방으로 엉킨 선은 박완서 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복잡한 심경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상실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소설가는 읽기에 적절한 책을 찾았을 것이다. 그림책을 몇 장 넘기면 책이 가득 꽂힌 서가 그림과 함께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라는 문장이 큰 울림을 준다. 시는 곧 책이다. 파란 긴 머리를 한 여자는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 오른쪽을 향해 걸어간다.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이 모습을 보자마자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라는 문장과 함께 작아진 여자를 본다. 그는 페이지 넘기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서 있다. 쓸쓸한 풍경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미지다. 초록 나무들은 다음 펼침면에서 파란 나무들과 대조가 되는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여자는 삶으로 향하고 있다.
소설가 박완서도 시를 읽는 독자였고, 박완서의 산문집을 읽은 이성표 작가도 독자고, 그림책을 보는 나도 독자다. ‘독자’의 이름으로 연대하며 ‘시 정신’을 배운다. 소설가는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고 했다. 내게도 그렇다. ‘시’는 나의 눈을 부릅뜨게 했고 뜨거운 울림을 주었다.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과 『악의 평범성』을 읽을 때 그랬고 프랑스로 망명한 루마니아 시인 게라심 루카(Ghérasim Luca, 1913~1994)의 말을 더듬는 듯한 시 ‘열정적으로(Pationnément)’를 읽을 때도 그랬다. 시가 말의 리듬을 닮았다. 더듬거리는 화자의 고유성이 시가 되어 아직도 운율이 기억에 남는다.
박완서 작가가 좋아했던 시는 어떤 시일까? 그는 김수영(1921~1968) 시인이 현실을 풍자한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를 읽고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1990)를 썼고, 김현승(1913~1975) 시인의 「눈물」(1957)에 영감을 받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2006)을 썼다. 또한 소설가는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일 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는 말 못하겠다”라며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를 『녹색평론』에서 읽고 깜짝 놀란 경험을 이야기한다. 시와 제목이 같은 「그 여자네 집」 서두에 ‘북한 동포 돕기 시 낭송회’에서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시를 인용한다. 그 시는 북녘땅 고향마을과 곱단이와 문학 청년 기질을 가진 장만득씨의 이루어지지 못한 고결한 사랑이야기와 닮았다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곱단이는 임화의 시를 좋아했고 만득이는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마을 젊은이들에게 춘원 이광수의 바람을 일으킨 것도 만득이고 친일 행각을 한 춘원 때문에 마을 청년들을 헷갈리게 한 것도 만득이였는데, 1945년 봄, 만학도 만득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 징병으로 끌려나갔고 곱단이는 여자 정신대에 보내지지 않도록 애를 못 낳는 부인을 내친 늙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만 하는 불운이 이어진다. 식민지의 삶과 해방 후 한국 전쟁은 고결한 사랑도 운명도 이렇게 비틀어 버린다.
1950년 6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한 박완서도 전쟁이 나는 바람에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고 생활고로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며 알게 된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나목』(1970)을 쓴 이야기라는 건 잘 알려져 있다. 박완서에게 글쓰기의 에너지는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였다. 더러운 시대를 증언하고 싶어 했다.
“결혼 전 한때 박수근 화백하고 같은 직장에서 일을 했어요. 박수근 화백은 참 힘들게 살다 허망하게 죽었는데, 그 후에 그림값이 올라가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유족들이 덕을 보는 것도 아니고 화상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만 이익을 챙기는 것 같아서 화가 나더라고요.”(『박완서의 말』, 2020:140)
사회적 분노는 박완서에게 글쓰기의 동력이다. 그는 시를 읽으며 자기반성을 하였고 독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 독서는 소설가에게 글쓰기를 위한 영양제였다. 또한 작가는 작품을 통해 다른 작가와 연대한다. 박완서가 『나목』을 통해 박수근의 유작전에 가서 <나무와 두 여인>을 보는 장면을 이야기하듯 문학과 예술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창동 감독이 『시』(2010)를 통해 시와 영화가 죽어간다고 경고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우리 사회는 시인이 죽어가는 사회다. 이젠 넷플릭스에서 좀비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고 함께 자리하고 함께 느끼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개인화되고 개별적인 존재로만 움직인다. 팬데믹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변화와 흐름은 위험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경각심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시각의 폭력과 언어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림책이 시를 담아내고 있다. ‘시 정신’이 그리운 사람들을 위해 시그림책이 출간되면 나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 동네에 새로 생긴 책방에서 우연히 『시를 읽는다』를 만난 후, 박완서의 작품을 읽고 목소리를 듣고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고통을 이겨낸 담담한 목소리가 유난히 생기롭다. 어느새 나도 그가 그리워하던 박적골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에 가서 싱아 맛을 느끼고 싶다.
글. 김시아 KIM Sun nyeo
문학·문화평론가. 파리 3대학 문학박사.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기계일까 동물일까』 『아델라이드』 『에밀리와 괴물이빨』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화물』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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