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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라는 우주선과 스티븐 샤비로의 사변적 모험
화이트헤드라는 우주선과 스티븐 샤비로의 사변적 모험
  • 권두현 |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 승인 2022.02.0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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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우주』(스티븐 샤비로 지음, 갈무리)

 

하늘과 바람과 별을 시와 나란히 둔 한 시인이 있었다. 그의 시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은 인식의 객체이기에 앞서 조우의 객체로서 시인의 존재 안에 존재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계절의 순환에 따른 물리적 변화와 여기에 이어지는 심리적 변화를 통해 시인의 몸에 뚜렷한 미적 효과를 아로새긴다. 시인은 내재적이고 비인지적 접촉을 통해 제 몸에 유입되는 ‘우주’를 정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인의 시를 거치지 않은 하늘과 바람과 별은 어떻게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까.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라면,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객체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메이야수의 ‘상관주의’다. 한편,『사물들의 우주(The Universe of Things)』의 저자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라면, 하늘과 바람과 별이 유기체와 무기물의 이분법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살아있거나 좀 더 죽어있는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그리고 상황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했을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시간을 경유한다. 시에 새겨진 시인의 시간은,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흘러가고 있을까.

우주의 과학적 시간은 오늘날 인간에게 전지구적 위기상황으로서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인류세’는 다종간 공생의 생태적 조건에 주목하게 하면서도, 그 용어 자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인간 존재가 의미와 가치의 중심에 홀로 서있다는 가정, 즉 인간중심주의(anthropecentrism)라는 근대적 합리성의 핵심 전제를 다시 한번 도입하게 한다. 하지만 스티븐 샤비로는 일찍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말했듯, 인간 존재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인간중심주의라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는 그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화이트헤드와 스티븐 샤비로를 통해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계기로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이고 생성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철학은 인간과 다른 존재, 다른 이해관계, 다른 행위자를 연루시키는 사유 체계에 다름 아니다. 이 체계를 통해 “인간은 우주 속의 미세먼지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미세먼지의 존재에 대한 사유로 전환된다. 실재이자 현상으로서의 미세먼지라는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의 행위와 분리불가능함은 물론이다.

스티븐 샤비로가 제시하는 “사물들의 우주”는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지지만, 사물 자체가 이미 자신을 스스로 개변하고 변형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의 독창성으로 존재한다는 화이트헤드의 설명을 유념한다면, ‘사물’과 ‘과정’을 대립하는 관념으로 취급해선 안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결성과 그들의 상호작용과 변이가 끊임없이 어떤 새롭고 예상치 못한 여러 귀결을 불러일으키는 방식 양자를 모두 긍정한다. 그 어떤 것도 미리 주어지는 법은 없다. 모든 것은 먼저 스스로 그러한 자신을 생성해야 한다. 그것의 있음(being)은 그것의 됨(becoming)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주체도 객체도 그 자체로 생성의 과정이며 모든 현실적 존재는 객체이자 주체이다. 생성과 창조성은 인간 존재가 독점하는 것이 아닌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관념이다. 요컨대, 화이트헤드에게서 사물은 곧 사건이다. 이와 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지향적 사고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상과도 밀접한 것이며, 이러한 사상적 친밀성을 통해 철학의 우주를 관계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이야말로 스티븐 샤비로의 사변이 존재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이라 분류할 수 있는 철학적 조류를 통하여 새롭게 바라보려는 목적에 따른다. 인간중심주의 대신, 화이트헤드는 “맥박의 박동, 분자, 돌덩어리, 식물의 삶, 동물의 삶, 그리고 인간의 삶”에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형이상학을 제시했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가 “가치경험이라는 공통 사실”이 인간 존재를 넘어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그리하여 “각각의 현실태의 맥박”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 바를 환기한다.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서, 타자를 위해서,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 어떠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스티븐 샤비로는 오늘날 객체지향 존재론자에 의해 주창된 “객체들의 민주주의”가 이미 한 세기 전에 화이트헤드의 “동료 피조물들의 민주주의”에 의해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보인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들의 사상을 계보학적으로 연결하고 공명시키는 익숙한 서술 방식을 채택하는 대신, 사변적 언설들 사이에 균열을 가하고 거리를 조율하며 긴장을 부여한다. 그 긴장은 사변적 실재론에 칸트적 배경이 자리함을 설명하고 각각의 사변적 실재론이 칸트적 배경에 대해 취하는 상이한 입장들을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유지된다.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 등의 사상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동의하고, 부분적으로는 반대하며, 다시 한번 수정하고 번역하는 작업이 사물들의 우주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저작은 화이트헤드에 대한 이해의 갱신뿐만 아니라, 사변적 실재론 또는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세밀한 이해에도 뚜렷하게 기여한다. 반론이라기보다는 보론으로서, 사물들의 우주는 하먼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작업에 대한 각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라는 우주선을 타고 ‘철학의 우주’를 이룬 사상들의 성좌 사이를 누비며 ‘우주의 철학’이라는 누빔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티븐 샤비로는 사변적 철학의 영역에서 사변적 미학을 초점화하며 한 차원 더 깊숙한 철학의 우주 속으로 성간 이동을 시도한다. “미적인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 속에서 행위를 하며, 세계와 세계 속 다른 사물들을 사고의 단순한 상관항으로 환원함이 없이 그들과 관계한다”는 샤비로의 명제는 “사물들의 우주”를 모험하기 위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이 나침반은 다시 한번 화이트헤드의 개념적 성좌를 가리킨다. 화이트헤드에게는 경험이 곧 존재이며, 존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대체로 모호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느낌이 “영향”과 “변화” 또는 “매혹”과 “변태”에 대한 것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샤비로가 설명하는 미학은 다분히 정동적이며, 이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무심함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우리가 객체에 관한 완전한 포착 및 이해를 가지지 못할 때도, 객체들은 우리를 심미적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인과적으로 촉발한다. 이 미학은 특별히 인간에게 독점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 구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물들의 우주”에 이미 깃들어 있다.

예컨대, 인류세의 행위자로서 미세먼지는 바람에 실려 하늘과 별을 가리고,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이 오직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티븐 샤비로의 입장이다. 이 지점에서 샤비로가 ‘비상관주의적 감수성’으로서 새롭게 정의하는 미학은 범심론과 밀접한 관계임이 드러난다. 범심론의 테제는 나무, 해파리, 황색망사점균은 물론, 돌덩어리와 미세먼지조차도 마음을 지닌다는 것이다. 범심론이 설명하는 정신은 물질 자체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범심론은 사고와 존재의 칸트적 매듭을 푼다. 그 결과, 샤비로가 전개하는 우주의 철학은 사변적 실재론에서조차 폭넓게 잔존하는 인식론―“박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루는 학문”―에서 존재론―“박쥐가 참으로 생각하며, 이 생각이야말로, 설령 그 생각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박쥐의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임을 파악하려는 학문”―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이행을 통해 칸트적 매듭이 풀리면서 사고와 존재, 실체와 현상 사이에는 틈이 벌어진다. 그 틈에 바로 관계가 개입한다. 그 관계에 따라 사물 또는 사건의 성질과 양태가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는 사물, 우리를 스치는 사물, 우리에게 기쁨을 주거나 거부감을 주는 사물, 혹은 피상적으로 조우하는 사물에 의해 영향받고 변화되고 있다. 어느 시인이 조우한 우주가 미학적이었다면, 오늘날 그 미학은 다른 조건 위에서 성립한다. 이 자리에서 미적인 것으로서의 시는 과학소설로 다시 작성된다. 김초엽은 하늘과 바람과 별에 관한 소설과 함께 미세먼지에 다름 아닌 ‘더스트폴’이 뒤덮인 아포칼립스에 관한 소설을 썼다.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상황에서 ‘모스바나’라는 식물은 돌봄의 마음을 이어받아 지구 한 편에 자라났고, 그 마음을 제 몸과 함께 다시 한번 지구 전체에 착근시킨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랬듯, 인간과 사이보그, 먼지와 식물은 휘몰아치는 영향들을 번역하고 받아들이며 끈질기게 교류한다. 이 과학소설은 마치 샤비로의 사변철학에 대한 정동적 미메시스처럼 보인다. 과학소설과 사변철학은 사변적 우화이자 실뜨기라는 점에서 밀접하다. 실제로 샤비로의 저작은 영국의 작가 귀네스 존스(Gwyneth Jones)의 과학소설 「사물들의 우주」로부터 그 제목을 따온 것이기도 하다.

김초엽의 또 다른 과학소설은 우주 공간에서 조우한 ‘벨라타인’과 ‘지구인’이 미지의 물질 ‘오브’와 맺은 관계를 “오래된 협약”이라는 프레임으로 제시하며 그 객체의 진심을 전한다. 그 진심에 관한 소설은 곧 물질에 관한 서사이지만 범심론적이라고 아니할 도리가 없다. 또한 이 범심론은 사변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없는 것, 예컨대 ‘오브’라는 물질의 가치경험에 관해서 사변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사변은 독단적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모험적이어야 한다. 사변적 모험가로서 스티븐 샤비로는 화이트헤드가 마음에 그리는 세계가 “영속적으로 소멸”하는 세계임을 간파했다. 이 세계가 소멸하면서도 영속한다면, 우리는 지구의 소멸을 자조하며 소란을 피울 것이 아니라, 관계의 체계로서 이미 소란스러운 세계 또는 사물들의 우주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사물들의 마음과 화이트헤드의 마음 사이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충실한 번역을 수행하며 존재한다.

 

 

글ㆍ권두현(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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