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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여성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연이어 개봉을 했다. 1970년대 청계피복 여성 노동자를 담은 <미싱타는 여자들>(김정영, 이혁래)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후 인생의 굴곡을 겪어낸 고(故) 김순옥 할머니의 일대기를 담은 <보드랍게>(박문칠)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시공간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공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 여성의 이야기를 당사자의 기억과 목소리로 담아낸다. 이들의 기억과 목소리는 다양한 문화적 재현을 통해 살아있는 지금 현재와 연결돼 새로운 사회문화적 기억을 창조한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다. 기억은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의 특정사건을 불러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과거의 문제인 동시에 현재의 문제다. 기억은 또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이고 공공적이다.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은 일치하기도 하지만 공적 기억을 거스르는 사적 기억의 경우는 억눌리고 충돌하고 균열을 자아낸다. 따라서 공적 역사에 누락된 자들의 사적 기억은 공적기억과 지난한 경쟁과 협상과 재조정의 과정을 겪는다. 이름하여 ‘대항기억’이다.
두 영화는 여성(들)의 대항기억(들)을 담아 이를 형상화한다. 영화는 가부장적 민족과 국가의 역사 속에서 누락된 여성 노동을 역사의 피해자나 생존자만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 재위치한다. 그리고 현재 자리에서 과거를 ‘대면’하거나, 현재와 과거를 ‘중첩’시켜 역사의 결을 풍성하고 다층적으로 만들어낸다. 이때 두 영화는 디지털 프로젝터로 기억과 기록,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을 이어낸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1977년 9.9사건에 연루된 평화 시장 미싱사로 일하던 세 명의 사건 당사자를 담는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이들의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킨다. 이제는 중년이 된 세 여성은 마치 그때 그 시절 소녀처럼 깔깔 웃으면서 넓은 들판에서 미싱을 타며 서로의 이름을 새겨준다. 순애, 숙희, 미경, 셋은 이렇게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미싱 타던 그 시절을 꺼낸다.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혹은 사건 피해자로서 상처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이름과 개성을 가진 세 인물들의 삶 속에서 사건을 기억하고 이를 다양한 기록 매체로 형상화한다. 회화로 풀어내는 당시 기억의 색에서부터 프로젝터로 소환하는 개인 소장 사진과 기록물들은 미로처럼 얽힌 기억 회로를 풀어가는 장치이고 영화는 그 과정을 담는다. 빨강, 연두, 분홍의 빛깔을 가진 세 인물의 각자 기억의 색은 그 시절 사건을 증거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그 시절을 겪어낸 개인들의 기억이자 감정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즉,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인물 속 역사’를 담아낸다.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대면’은 중요한 키워드다. 기억과 기록이 대면하고, 과거와 현재가 대면하고, 그 시절 함께한 인물과 장소가 대면한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대면의 장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요 장면으로, 어두운 방 프로젝션된 과거 자료들을 두고 짝을 이룬 사건의 경험자들이 그 시절 기억을 꺼내 공유한다. 마치 기억의 터널처럼, 그 공간은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진 개인들이 각자 소장한 사적인 사진을 공개하는 ‘프로젝터’라는 장치를 통해, 빛과 어둠 혹은 실제와 환영이 마주하면서 과거의 경험을 현재 자리에서 풀어내고 대면한다. 이는 공적 역사에서 비가시화된 여성사를 혹은 여성 노동자의 대항기억을 가시화하는 문화적 재현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 임금노동은 위기의 가족과 국가를 살리는 대표적인 노동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사는 여성노동을 남성노동에 비해 혹은 가족 내 여성 역할 노동을 강조하면서 배제시켜 왔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그동안 어디 가서 말하지 못했던’ 사적인 기억과 장롱 속에만 넣어둔 자료를 공개적으로 ‘프로젝션’해 한국사에서 ‘여성노동’의 자리를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세 여성의 기억은 당시 함께한 이들의 기억과 보태어져서 사회문화적 기억을 재구축하는 한편, 그 시절 억눌렸던 자신의 내면과도 조우한다. 당당하기도 하고, 소심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던 그 시절 나를 마주하는 장면과 다시 그 나들이 모여 ‘흔들리지 않게’를 합창하는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도 그런 이유다. 역사 속 ‘나’들과 ‘나’들 속 역사의 대면과 공존은 더 이상 거시사와 미시사가 분리되지 않는 시대정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보드랍게>는 위안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이슈는 오랜 기간의 지난한 대항기억 투쟁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에 기입됐지만, 역사화 이후 기존의 인식 질서에 포섭되는 위험을 동반한다. 영화 <보드랍게>는 위안부 서사의 전형성에 갇히지 않고 김순옥 할머니 개인의 삶을 축으로 그 속에서 아로새겨진 시대의 흔적을 짚어낸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순악 할머니의 다양한 호칭에서 시작한다. 김순옥, 김순악, 왈패, 사다꼬, 데루코, 요시꼬, 마시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주정뱅이, 개잡년, 깡패 할매, 그리고 다시 순악씨 까지 할머니의 호칭은 변화무쌍하다.
이름은 본인이 부르기보다 타인에 의해 불리는, 번역이 불가능한 고유명사다. 그러나 순악 할머니는 이름이 호적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계급적인 이유로 순옥에서 순악으로 손쉽게 바뀌고, 이후 삶은 자신의 이름이 제대로 호명되고 기입되는 삶이 아닌, 무화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름을 대신하는 호칭은 그 사람을 사회적 역할자나 대상화된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는 수많은 별칭을 가진 그녀를 다중적 목소리로 호명한다.
그 목소리들은 할머니를 호명하기도 하지만 할머니를 대변하기도 하고 나아가 동시대 미투 운동 참여자인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시대를 가로지르면서 혹은 내면과 외면을 가로지르면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겹쳐낸다.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 할머니의 목소리를 대독하는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 활동가들의 인터뷰 그리고 미투 운동 참여자의 목소리들은 교차하고 겹쳐지고 중첩되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내는 다중적 시간성과 다중적 상호관계성을 생성한다. 딸들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어머니를 불러내고 알아가고 공감하는 여정이다.
영화는 이처럼 위안부 역사를 다룸에 있어 시대와 인물을 동일시하거나 피해자 서사로 상처와 트라우마를 전형화하기보다 당사자로서 한 개인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영화는 그녀를 연민하거나 영웅시하지 않고, ‘순악-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한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해, 과거사를 과거 속에 가두지 않고 현재 속의 관심사로 바꿔가는 기억의 변증법이자 사회실천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현재화되는 과거 혹은 과거와 겹쳐진 현재를 통해 현재 상황을 비판적이고 변혁적인 역사로 재설정한다.
이 때 <보드랍게>는 이 겹쳐짐의 연대를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즘으로 묶지 않고 몸의 기억인 감정적 연대로 풀어낸다. 영화 제목 ‘보드랍게’에서 드러나듯, 영화 속 순악 할머니의 목소리로 젊은 여성들은 말한다. “아이고 그랬구나”. “애먹었다”. “니 잘못이 아니다” 같은 따뜻한 공감이 그것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선형적이거나 인과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만 현재와는 조금 다른 지금으로 역사를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순간들에 대한 제안과 바램을 잔잔하게 담아낸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보드랍게>는 대항 기억으로 역사 다시쓰기를 시도한 작품들이다. 역사 속에 배제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된 여성의 성과 노동을 당사자의 기억으로 풀어내되 기억을 무대화하는 다양한 문화적 재현을 통해 그리고 기억을 현재화해 지금 여기를 다시 보게 한다. 재현되지 않고 재현할 수 없는 부분들을 애써 봉합하거나 총체화하기 보다 다층적이고 다성적인 그리고 병렬적 시간성과 관계맺음으로 역사 속 여성사를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이끈다.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중이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다큐멘터리 매거진 <Docking>의 고정필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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