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는>은 2021년 12월 6일부터 2022년 1월 25일까지 SBS에서 방영한 청춘물 드라마다. 방송의 최고 시청률은 5.3%에 그쳤지만 주 시청자층인 10대~30대에서의 체감 시청률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방송 직후 넷플릭스, 웨이브와 같은 OTT에서는 줄곧 실시간 인기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고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2022년 1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조사 결과(2022년 1월 18~20일 조사 결과) 3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TV가 아닌 OTT로 시청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1020의 영향이 특히 크게 작용한 탓이다.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전교 1등과 꼴찌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담은 EBS의 다큐멘터리 <체인지 스터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다큐는 누구나 한 번쯤 짧게라도 영상을 봤거나 컨셉을 들어봤을 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남-남이던 주인공을 남-여로 바꾸어 첫사랑 이야기로 치환한 것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적절한 설정이었다. 똑떨어지게 공부 잘하고 매사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움직이는 전교 1등에 바른말을 돌직구로 날리는 여주인공 캐릭터(국연수, 김다미 분)는 다소 클리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남들만큼 평범하게 사는 게 목표였는데 그게 쉽질 않아 경직되어버린 그녀의 사연은 우리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차갑다는 설정을 위해 차가운’ 식으로 안이하게 묘사하지 않았기에 뻔하지 않았다.
여주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남자주인공 캐릭터였다. 남주인 최웅(최우식 분)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그런 스스로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살랑이는 바람,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느끼며 그늘 아래 누워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여주인공을 위해 뭔가 해줄 능력도 없고 경쟁력도 없고 그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놀라웠다. 이렇게 무능력하고 안일한 남주라니! 물론 드라마의 회차가 진행되면서 곧 웅이에게는 탁월한 그림 실력이라는 능력치가 있음이 밝혀진다. 팬덤이 있을 만큼, 기업체에서 콜라보를 진행하기를 원할 만큼 자기 분야에서는 탑을 달리는, ‘고오’라는 예명을 가진 화가다. 웅이의 집도 한 골목 안에 웅이 이름으로 된 맛집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 나름 동네 부자이긴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전의 남주들과는 분명 결이 다른 남주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전 남주들은 과연 어땠을까?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은 재벌 2세 능력자 남주와 가난한 캔디 여주인공의 신데렐라 스토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로맨스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2000년 무렵, <별은 내 가슴에>, <가을동화>, <파리의 연인> 등의 작품이 그 예다. 특히 “애기야 가자”와 “내 안에 너 있다”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파리의 연인>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후 재벌 2세-능력자 남주와 가난한 캔디 여주인공 구도는 드라마의 흥행 공식으로 여겨졌고 이는 이후 2010년의 <시크릿가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활용되어왔다.
이 공식에서 남주들은 모두 재벌 2세이거나 혹은 그 정도 급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외모, 학벌, 능력까지 모두 갖췄지만 대개 성격이 나쁘다. 성격이 나쁜 이유는 완벽해야 하는 사회경제적 위치의 무게 때문이거나 또는 숨겨진 트라우마 때문이며 이는 대개 나중에 여주인공의 사랑으로 치유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주인공을 향한 절대적인 순정을 지킨다는 점이다. 이들은 때로 의사 또는 변호사, 검·판사, 외교관 등의 전문직으로 변주되기도 하는데 단 여주인공을 지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능력은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성격만 나쁜 재벌 남주와 아무것도 없지만 성격이 예쁜 (실은 외모도) 가난한 여주라는 조합이 꽤 오랫동안 로맨스의 공식이었지만 언제나 긴 유행은 식상함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이때부터 로맨스는 다른 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했고 로맨스 남주의 유형도 달라졌다. 새롭되 여전히 능력 있는 남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소환되었다. 순간이동과 영생의 능력을 갖춘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역시나 영생과 함께 인간사까지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도깨비-<도깨비> 등이 그들이다. 물론 그 초능력을 바탕으로 획득한 현실 세계에서의 경제적 지위 또한 당연히 가지고 있다.
능력자의 끝판왕을 보여주기 바빴던 로맨스의 남주가 요 몇 년 사이 다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인물은 2019년 방영되었던 <동백꽃 필 무렵>의 용식이(강하늘 분)다. 용식은 돈이 많지도 않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도 아니다. 여주인공에게 위협이 되는 범죄자 까불이를 잡을 수 있는 경찰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로맨스에서 보듯 말 한마디로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고위직도 아니고 의심의 여지 없이 적대자를 제압할 수 있는 신체적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대신 그는 여주인공 동백이(공효진 분)을 향한 존중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 동백이를 사랑하지만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 않고 대신 나서서 싸워주지 않는다. 동백이의 결정을 존중하고 동백이가 범인의 뒤통수에 직접 맥주잔을 날릴 때까지 기다려준다. 맨스플레인을 하지 않는 남자, 술집 여자도 미혼모도 아닌 ‘사람’ 동백이 자체를 알아봐 주는 남자다.
용식이에 비하면 <그해 우리는>의 웅이는 현실적으로는 좀 더 돈과 명성을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전의 로맨스 드라마의 남주들과는 다른 점은 그 능력치를 여주를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벌 2세 남주는 직장에서 상사에게 갑질 당한 여주를 구하기 위해 그 상사에게 직접 응징을 가한다. 우울한 여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리는 플렉스를 서슴지 않는다.
웅이는 그런 백마 탄 왕자님의 행보를 하지 않는다. 대신 웅이는 연수에게 평안과 존중을 준다. 언제나 옆에 있고 손 내밀면 잡아주고 사랑하면 안아준다.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지만 너를 위해 포기하겠다고 부담 주지도 않는다. 대신 둘은 눈높이를 맞춰 서로 바라보며 인간적으로도 뜨겁게 서로를 위한다. 저 높은 곳에서 굽어살피며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상대는 결국 나를 그 울타리 안에 가두게 되고 나는 안전한 그곳에 머무는 대신 순종해야 하는 구도가 생긴다. 사람 간의 구도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같은 계단에 서 있는 그는 나의 자유와 의지를 보장한다. 내가 그의 그것을 보장하는 것처럼.
캐릭터의 이런 변화는 지금의 여성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여자들은 친구 같은 남자가 아니라 그냥 친구인 남자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저 혼자 ‘잘난’ 남자보다 ‘나를 잘 아는’ 남자를 원하는지도. 드라마는 이미 변화한 사회의 트렌드를 반영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의 방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 사회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은 이런 것이 아닐까. 인간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사랑. 남자는 여자를 지켜야 한다는 짐에 눌리지 않고, 여자는 짐을 떠넘긴 대가로 힘에 휘둘리지 않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월 12일에 시작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매회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10%대 시청률에 들어섰다. <그해 우리는>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이 드라마의 남주인 백이진(남주혁 분)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는 또 어떤 남주일지, 다음 지면을 기약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또 새롭고 멋진 로맨스의 남주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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