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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문화톡톡] ‘가족 버리기’와 ‘가족 되기’ 사이,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브로커>
[안숭범의 문화톡톡] ‘가족 버리기’와 ‘가족 되기’ 사이,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브로커>
  • 안숭범(문화평론가)
  • 승인 2022.06.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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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읽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브로커>도 아기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엄마는 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단번에 이해되지 않겠지만, 이 아이러니한 문장은 <브로커>의 스토리에 대한 틀림없는 요약이다. <브로커>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른다>에서부터 <어느 가족>을 거쳐 <파비안느의 진실>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의도와 서사의 도착점은 부조화를 이룬다. 서사 표층에서 드러나는 사실과 심층의 진실은 자꾸 유리된다. 구체적으로 <아무도 모른다> 속 순진한 아이들은 서사를 지배하는 구조적 아이러니(structural irony)에 둘러싸여 있다. 영화 밖 관객들은 이미 눈치챈 그것, 곧 엄마가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오로지 그들만 모르고 있다. <파비안느의 진실>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 가상의 이미지에 둘러싸인 대배우와 현실 속 늙은 엄마 사이의 부조화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심미적 긴장의 중핵이다.

<브로커>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쌓아 온 영화 세계의 연장에 해당한다. <브로커>의 아이러니는 인신매매 브로커로 뭉치게 되는 인물들의 표면적인 의도와 실질적인 실천 사이의 괴리에서 온다. 주지하다시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재료는 언제든 ‘가족’이고 ‘가족 되기’는 서사의 동력이다. 그런데 ‘가족 되기’의 서사는 사실상 ‘가족 버리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모른다>의 ‘가족 버리기’는 서사의 표층에서 엄마의 메모와 함께 명시적으로 주어진다. 그에 비해 <어느 가족>의 ‘가족 버리기’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각자의 사연을 따라 서사의 배면에서 짐작된다. <브로커>의 ‘가족 버리기’는 <아무도 모른다>와 <어느 가족>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브로커>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과정도 그와 연관지어 해석될 수 있다.

소영(이지은)이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아기를 버리는 장면은 영화 첫머리에 등장한다. 그런데 <브로커> 서사의 진정한 출발점으로서 ‘가족 버리기’는 좀 더 먼 과거에 대한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 소영은 길거리에서 성을 팔며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가족으로부터 일찌감치 버림받았을 것이다. 상현(송강호)은 세탁소 경영보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를 판매하는 일로 생활의 반전을 꿈꾸는 인신매매 브로커다. 그런데 그는 과거 어느 시점에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후 사랑하는 딸과의 관계가 단절될 상황에 놓여 있다. 동수(강동원)는 베이비박스 사역 단체에 위장 취업한 또 다른 브로커다. 그런데 그는 엄마가 찾아올 것이란 희망을 안고 보육원에서의 삶을 견딘 과거가 있다. 그처럼 소영과 상현, 동수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그들의 바람과 달리 ‘가족 되기’가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 속에서 가족으로부터 멀어진 아픔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브로커>의 서사가 아이러니하게 흘러가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아기를 되찾으려고 찾아간 소영마저 상현과 동수의 인신매매 과정에 합세하면서부터다.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상처를 가진 이들의 ‘가족 버리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 초반 그들은 우성(아기)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으면 한다는 말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신매매의 형태로 ‘가족 버리기’를 실천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실제에 있어서는 더 큰 돈을 받을 수 있는 양부모를 찾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기를 불법으로 매매하기 위한 과정을 밟는 과정에서 서사 표층의 의도(가족 버리기)는 다른 결과(가족 되기)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여기엔 사실상 형사들도 합세한다. <브로커>에서 관찰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두 형사 수진(배두나)과 이형사(이주영)도 현장 검거를 한답시고 인신매매를 방관하는 소극적 브로커(가족 버리기)처럼 등장한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 이르면, 수진이 유사 가족의 탄생에 결정적 구심점이 된다. 최초의 행보와 정반대 편에서 가족 구성 브로커(가족 되기)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브로커>는 ‘가족 버리기’라는 목적을 두고 출발한 여정이 ‘가족 되기’라는 의도치 않은 기적으로 종결되는 이야기이다. 대별적인 그 간극은 다른 배경을 가진 인물들 사이의 부조화가 이상한 조화의 상태로 나아가면서 메워진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식 귀결을 두고 낭만적 봉합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동수가 우성에게 던지는 “우리랑 이제 행복해지자”는 말은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들 각자의 상황을 볼 때, 현실적인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들은 살인, 인신매매 등 심각한 불법을 저질렀고 어떤 사회든 그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관객이 ‘합법/불법’의 경계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순간들을 배치한다. 이를테면 부산, 울진을 거쳐 인천 월미도 관람차에 오른 순간, 소영은 살인자가 아닌 엄마로 거듭나고, 동수는 인신매매범에서 남편, 혹은 아빠의 자리로 간다. 이후 모텔신에서 그들은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위로를 새기며 ‘가족 되기’의 진정한 의미를 관객에게 되묻는다. 아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선의가 진심으로 읽히면서 ‘합법/불법’에 대한 판단은 드디어 중지된다. 그 대신 그들이 행한 윤리적 차선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요구되기에 이른다.

이제 <브로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 중 <어느 가족>과 가장 닮았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두 영화 모두 살인이 있고, 성매매가 있으며 버림받은 아이가 있고, 불법의 현장을 천진난만하게 누비는 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 곁에 경찰이 있다. 부조화처럼 느껴지는 인물들이 정서적 합일을 이루는 비약적인 순간도 유사하다. <어느 가족>에서 마루에 붙어 앉은 인물들이 비 그친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불꽃놀이를 바라볼 때, 바닷가 모래사장에 모여 행복한 한때를 즐길 때, 관객은 가족을 구성하는 다른 조건을 상상하게 된다. 이들 장면이 남긴 여운은 <브로커>에서 월미도 관람차신과 모텔신에서 반복된다. 심지어 <어느 가족> 바닷가신에서도 마지막을 예감한 할머니가 “다들... 고마웠어”라고 읊조린다. 그렇게 보면 <브로커>는 새로운 소재, 설정을 갖고 행한 ‘반복’이다.

물론 할머니의 죽음(<어느 가족>)이 놓인 자리에 아기의 탄생(<브로커>)이 있다는 점이 다르고, 오해하는 경찰(<어느 가족>)의 자리에 이해하는 경찰(<브로커>)이 있다는 건 대별된다.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엄마(<어느 가족>)를 대신해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아기를 낳은 엄마(<브로커>)가 등장하는 것도 대조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되는 설정조차 정교한 데칼코마니처럼 아귀가 맞는다. 그 때문에 누군가 두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묻는다면, <브로커>가 <어느 가족>보다 더 멀리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칸에서의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송강호 연기의 절정이 <브로커>라는 데에도 동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식 서사 전개와 ‘낭만적 봉합’의 결말이 폄하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영화에서 소재와 설정상의 핍진성은 때론 선택의 문제다. 영화로부터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바라는 건 과도한 요구다. <브로커>의 엔딩신은 상현이 몰던 차량 내부를 보여준다. 룸미러 아래로 즉석 사진이 흔들리고 있고, 그 안에는 정서적 합일을 이룬 이들의 환한 표정이 있다. 그 사진은 ‘가족 되기’의 마법같은 순간이 일상의 시공간에서 연장될 수 있는가를 가늠케 한다. 아마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즉석 사진 앞에서 다음 영화를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국가 홍보 영문 매거진 <KOREA>에 수정을 거쳐 영문으로도 게재되고 있다.

 

·안숭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시인.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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