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과몰입은 때로 창작 의욕을 부추긴다. ‘나도 저런 사랑을 해봤으면’하는 상상에서 끝나지 않고 ‘나라면 저 장면에서 이렇게 고백했을 텐데’하고 아쉬워하다가 급기야 ‘작가가 저렇게밖에 못 쓰나?’에 이어 ‘내가 쓰면 더 잘 쓸 거 같은데’라는 용기가 생기고 이 마음이 누적되어 절실해지면 컴퓨터 앞에 앉아 한글 프로그램을 열게 된다. 모든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공모전이라는 게 있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단막극을 써서 당선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고 드디어 드라마를, 늘 상상하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취재와 조사라는 과정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빨리 명대사를 날리고 싶고 사이다 장면도 만들고 싶고 달달함이 치사량을 넘어가는 로맨스 씬도 쓰고 싶은데, 그래서 캐릭터 이름도 정하고 나이도 정하고 성격도 만들었고 직업도 정했는데, 이제 캐릭터가 일하는 그 장면을 멋있게 쓰기만 하면 되는데! 바로 여기서 브레이크가 걸린다. 캐릭터가 멋지게 일하는 모습이라. 새로운 직업을 택하자니 아는 게 없고, 내가 아는 직업을 택하자니 여태까지 맨날 드라마에서 보(며 욕했)던, 뻔한 장면과 대사만 떠오를 뿐이다. 씬이 써지지 않으니 진도도 나가지 않고 같은 페이지만 맴돌다 보면 어느새 나를 들뜨게 했던 뮤즈는 날아가 버리고 고취됐던 창작 의욕은 볼품없이 사그라들어 이내 노트북 앞에 앉는 게 지겨워진다. 글이 술술 풀릴 땐 당장 미니시리즈라도 써낼 것 같은 기세지만 안 풀리기 시작하면 그보다 고약한 감옥은 없다.
글이 잘 써지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되 필요 조건인 것이 취재와 조사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충분하고도 적절한 땔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창작의 본령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귀찮거나 지루할 수 있고 때로는 빨리 작품을 써야 하는데 다른 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급하게 대충 넘겼다가는 작품 쓸 때 발목을 잡히고 마니, 좋은 작품을 잘 쓰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취재와 조사 과정에서 생각할 것들을 짚어보기로 하자.
드라마 주인공의 직업이나 이야기의 배경을 정할 때, 일단은 특별한 직업이 유리하다. 인물과 감정과 갈등이 드라마의 핵심이지만,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것도 드라마의 재미 중 하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직업의 풍경들,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행동과 언어 등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시청자는 강력한 재미를 느낀다.
<대장금>을 통해 시청자들은 조정과 내전과 궁중 정원이 아닌 대궐의 수라간을 엿보게 되었고 임금의 밥상이 어떻게 차려지는지 그걸 준비하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그 당시 음식에는 무엇이 있는지 다양한 정보와 볼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이후 도화서의 화공, 상의원의 어침장, 성균관의 유생 등 사극의 직업군 다양화가 이어진 이유다. 공효진, 이선균의 <파스타>는 셰프의 직업 세계와 레스토랑 이면의 주방의 풍경들을 보여주며 크게 인기를 끌어 한동안 또 셰프 주인공 드라마가 줄줄이 뒤를 이었다. 이제는 신선함이 사라지고 오히려 평범한 소재 중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국정원이나 국과수 등의 특별한 직업의 세계도 한때 주목받았었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레인저라는 새로운 직업군을 선보였던 최근 드라마 <지리산>은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초반에는 생소한 직업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었다.
늘 특별한 직업군의 주인공만 있을 수는 없다. 인물의 직업이 흔한 직업이라면 디테일이 관건이다.
내가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직업 유형을 가져오면서 내가 아는 대로만 쓰면 이야기가 뻔해진다. 편의점 알바생, 학교 선생님, 택배 기사,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흰 와이셔츠에 사원증을 목에 건 회사원... 일상에서 많이 본 사람들의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이 연결되는 드라마는 당연히 재미가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장면의 취재다. 은행원은 내가 창구에서 봤던 그 은행원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창구에서 일어나면 뒷자리 차장님하고는 일에 관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금고에 들어갈 땐 어떤 식으로 열고 들어가는지, 개개인이 다 금고를 열 수 있는 건지, 절차가 있는지 등등을 취재하다 보면 에피소드 자체가 새로워진다.
기발한 아이디어나 신박한 설정도 취재가 바탕이 되어야 개연성을 얻고 재밌어진다. 은행을 털러 들어간 강도 이야기를 하면서 금고를 여는 과정 자체가 너무 쉽게 해결이 되어버리거나 지금 시대에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된다면 시청자들은 흥미를 잃을 것이다. 취재가 바탕이 되지 않고 상상력만 발동하면 황당한 에피소드가 나오거나, 아니면 그나마 뻔한 수준도 안 되는, 그 직업의 인물 같지 않은 인물이 나오게 된다. 대학병원 의사인데 내가 아는 수준의 의학 상식만을 말한다거나, 판사인데 법정 용어 자체를 틀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실소를 자아내는 상황을 만들고 마는 것이다.
학교가 배경인 이야기에서는 늘 교실이 중심이 되고 학생이 주인공이었는데 드라마 <블랙독>에서는 교무실을 중심에 놓고 교사가 중심이 되면서 직장인으로서의 교사의 모습을 그려 “선생님 오피스물”같은, 조금 다른 학교 드라마가 될 수 있었고 시청률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작품은 호평받았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스포츠를 소재로 했지만 선수가 중심이 아니라 구단 프런트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로 역시 조금 다른 스포츠 드라마, 오피스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디테일은 취재와 자료 조사에서 나온다. 남들이 다 아는 얘기 말고 더 들어간 이야기, 뒷면의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야 한다.
흔한 직업일 때는 중심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부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놓아보는 것도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흔히 생각하는 돈과 출세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모습의 변호사가 아니라 그저 먹고 사는 게 중요한 국선 변호사를 상정한다든가 (드라마<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장혜성(이보영 분) 변호사) 증권회사를 배경으로 하되 증권맨이 아닌 회사 청소부 아줌마들이 중심이 된다든가 (드라마 <클리닝 업>) 임금의 여자로서의 궁녀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 궁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등이 그 예다.
주인공이 달라지면 이야기의 관점이 달라지고 그러면 던지는 메시지도 달라진다. 같은 소재여도 훨씬 더 매력 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작가의 메시지에도 힘이 생길 수 있다. 달라진 시대에 따라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이 시대의 풍경을 담아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취재와 자료 조사가 중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연성을 위해서다. 요즘 시청자들은 똑똑하다. 수많은 콘텐츠, 외국 드라마의 유입, ott의 발달 등은 창작자만 훈련 시킨 게 아니라 시청자도 학습하고 발전하게 했다. 또 다양한 채널을 통해 빠른 팩트체크도 가능한 시대다. ‘드라마니까’라고 넘어가거나 사실과 다른 것, 얼버무린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내용에 오류가 보이면 이입이 깨진다. 작품이란 몰입이 전제되어야 향유가 가능하다. 드라마가 화면 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흥미는 뚝 떨어지고 시청자는 떠난다. 시청자를 몰입시키고 붙잡아두기 위해 이야기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 안의 모든 순간이 개연성을 가져야 한다.
(사족. 개연성을 확보해야 함이 대전제이긴 하나 이는 장르마다 다르고 맥락에 따라 다르다. 드라마니까 대충 넘어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드라마인데 너무 따지는 것도 주객전도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시청자가 수용 가능한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 한발 더 나아간 이야기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데 드라마의 자료 조사와 취재는 자세히 많이 했다고 좋은 게 아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처음 드라마를 위한 조사와 취재를 하다보면 매우 고무적인 상태가 된다(!). 어떤 분야든 파고 들어가 보면 내가 몰랐던 이야기가 너무 많고 드라마에 써먹을 만한 재밌는 에피소드도 넘치고 심지어 드라마에 캐릭터로 써도 좋은 모델도 만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 직업의 인물이 유형화되니 당연한 것일수도). 이대로라면 대박 작품이 나오겠다는 벅찬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이 이 모든 자료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다.
드라마는 드라마다. 르포나 다큐가 아니고 업계 현황 보고서도 아니다. 조사와 취재에 눌리면 그 직업을 소개하고 일에 관해 설명하다가 끝난다. 그리고 본인은 재밌다고 뿌듯하지만 대본을 읽는 사람은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여기서 드라마를 본 사람, 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대본을 읽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런 실수는 주로 초보자의 작품에서 나오고 적어도 방송할 때는 이런 실수는 걸러지게 마련이라 드라마로 볼 일은 잘 없어서다. 그러니 처음 쓰는 이들이 주의할 일이다.
드라마는 더 다양화, 전문화되어 가는 추세다. 앞으로 또 어떤 취재와 자료의 힘으로 무장한 재미있는 드라마가 나올지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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