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 연재를 시작한 지 1년이 돼간다. 기후 변화로 절기가 바뀐 것을 얼마나 체감하는지 알 순 없지만, 그리 무딘 사람도 별로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날씨는 변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하순에 벌써 춘천은 얼음이 얼고, 내가 사는 광교산 자락에는 서리가 두껍게 내린다. 근처 식당에서 텃밭에 직영으로 재배하는 배추가 단풍이 든 광교산을 배경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런데 절기로 보자면 곧 입동이니, 배추는 이제 생장을 마치고 농부는 배추를 거둬야 할 때다.
지금 고기리의 풍경으로 보건대, 입동이 아니라 상강이다. 상강은 서리가 내리는 절기로 초반 무서리가 내리다가 막판에는 된서리가 내린다. 된서리 맞기 전에 재배하는 식물들은 이름처럼 서리를 맞고 자라는 콩, 서리태를 빼고는 모두 거둬들인다. 우리나라 절기가 지난 30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겨울은 두 절기가 줄어든 반면 여름은 두 절기가 늘었다. 24절기 중 춘분, 추분, 하지, 동지처럼 지구의 공전으로 발생하는 고정된 현상 외에 온도, 강우, 서리 등 생물의 생장에 미치는 변화는 큰 폭으로 달라진 것이다.
카메라 들고 떠난 절기 여행
우리 들녘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카메라를 챙겨 떠났다. 강화도에 들러 조강(한강 하구) 너머 북한 연백평야를 망원렌즈로 들여다봤다. 너른 논의 벼는 모두 수확을 했다. 추수를 마치면 이곳 임진강과 한강 하구에 사는 사람들은 참게를 잡는다. 바다에 갔던 참게들이 이맘때 돌아와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길목을 잘 잡아 그물을 쳐 잡는다. 보통은 입동 전에 참게잡이도 끝났지만, 요즘은 보름 정도 늦게 나타나 늦게 사라진다. 입동이 상강 절기로 변해 강 수온이 달라진 것이다. 참게는 보통 탕을 끓이기도 하지만 주로 간장에 담가 장을 만든다. 겨울철 진미 중 하나다.
가장 서쪽의 강화도 민통선에서 북녘을 봤다면 가장 동쪽 고성의 전방 마을은 어떠할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있는 왕곡마을은 해안에서 1.5km 들어간 산골 마을이다. 마을 주변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어 수백 년간 화마에 피해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 풍수지리적인 길지 중에서도 길지로 이름나 있다. 이 마을은 14세기 고려말 양근 함씨들이 이성계에 반대해 산골로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이라는데, 이런 유래는 전국에, 너무 많은 마을들에 깔려있는 것이라 믿을 것은 못 된다. 이 마을에서 절기의 분위기를 흠씬 느낄 수 있는 것이 30여 채에 달하는 초가집들이다. 매년 벼를 베고 탈곡 후 남은 볏단으로 초가를 잇는다. 이날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구수한 볏단 냄새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1월 초에 이를 하고 있으나 사실 상강에는 끝냈어야 할 일을 입동에야 하는 것이다. 여름이 길어져 벼를 늦게 심고 늦게 추수하기 때문이다.
11월엔 눈이 없다
입동에서 보름이 지나면 달력은 소설을 가리킨다. 하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기후 보고서>는 11월 16일을 새로운 입동으로 본다. 입동은 초목이 죽고 얼음이 얼며 겨울을 알리는 절기다. 기존의 입동보다 대략 열흘이 늦춰졌다. 그래서 여전히 서리가 내린다. 이때부터 낙엽수들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잎을 떨구고, 풀은 누렇게 시들어 사라지며 벌레들은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입동의 적막은 홀로 여행을 다니는 사진가를 우울하게 만든다. 철원 DMZ(비무장지대)를 찍기 위해 이른 아침 남방한계선 GP(감시 초소)에서 본 철원평야는 누렇게 물들었고 습지 연못은 얼어붙었다. 11월의 연평균 기온을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춥지 않은데도 이곳에서 군 복무를 한 사람들은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기억한다. 기분 탓일 수도 있고 유난히 안개가 많아 체감온도에 영향을 미치는 습도 탓일 수도 있겠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철원을 돌아보면 무논에 내려앉은 수많은 철새들을 본다. 강원도에 무슨 쌀이 날까 싶지만, 이곳 철원은 예외다.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요즘 이야기고 70년대 이전에는 지금처럼 쌀농사를 짓지 않았다. 우리에게 유명한 철원 오대쌀의 ‘오대’는 지명이 아니라, 벼의 품종명이다. 오대벼는 1982년 농촌진흥청에서 조생종이면서도 맛이 좋은 품종을 개발해 추운 철원 지역에 보급한 것이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지금은 철원 지역의 98%가 오대벼를 심는다.
그렇게 철원평야에는 무논이 늘어났고, 입동이면 나락과 논두렁으로 파고든 미꾸라지를 먹기 위해 철새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사람들도 역시 이때쯤이면 전통적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도랑탕이었다. 추어탕의 다른 말인데, 수확이 끝난 논의 도랑을 치면 함께 달려 나오는 미꾸라지를 잡아 탕을 끓이는 것이다. 기름지고 영양가가 많아 겨울을 준비하는 철원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요즘은 시에서도 철원 지역의 토종 미꾸라지를 논 주변 웅덩이에서 증산해 농사에도 도움을 주고, 철새와 사람이 나눠먹는 친환경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다시 고기리 집에서
요즘도 김장을 하나 싶겠지만, 고기리는 11월 중순부터 여기저기 김장 담그는 풍경이 연출된다. 김장하는 입동의 절기가 소설로 바뀐 탓에 전보다 열흘은 늦다. 경남이나 전남의 해안가는 12월 중순까지 늦춰졌단다. 고기리 계곡을 낀 한정식집들은 한 번에 수백 포기씩 김장을 한다. 누구는 자신들의 텃밭에서 키운 배추를 쓰기도 하고, 누구는 주변 농민들에게 구매해서 담근다. 우리 집도 김장철이면 거의 매일 돼지고기 수육을 내 김장 김치로 밥반찬을 한다.
하지만 일반 가정집에서 김장하는 풍경은 점점 사라져 간다. 사실 같은 무게의 김치는 마트에서 파는 것이 싸다. 그저 김장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역시나 우리는 절기를 마음대로 해석하며 기후 변화를 애써 부정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싶어 한다. 기후 변화를 인정하면 우린 정말 많은 것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성장보다는 지속을 선택해야 하고, 소비보다는 절약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린 정말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번 연재를 하며 여러 책들의 도움을 얻었다. 조너선 닐의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책갈피), 에릭 홀트하우스의 『미래의 지구』(교유서가), 안철환의 『24절기와 농부의 달력』(소나무) 등이다. 특히 재미있게 읽은 책은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 연구자로 명성이 높은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다다서재)이다. 현 자본주의 체제로는 도저히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는 사이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을 믿는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머피도 말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사진/글·이상엽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논픽션 글을 쓴다. 우리 땅 변경을 기록한 사진으로 2015년 <일우사진상>을 수상했고,『파미르에서 윈난까지』(현암사)는 2011년 올해의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늘 기록은 힘이 세다 믿으며 예술노동자로 산다. 지금은 비정규노동센터의 이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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