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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린나이트(2021)>-인류세 시대의 시네마를 발명해내다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린나이트(2021)>-인류세 시대의 시네마를 발명해내다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1.0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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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자연 영화를 찍는 일은 모순적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순정으로 무장한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1995)>의 오프닝은 이를 잘 드러낸다. <포레스트 검프>의 차분히 내려오는 깃털은 카메라가 대상을 찍는다고 한들 재현이 가능한 이미지는 아니다. 자연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기에 깃털이 사뿐히 내려앉은 것을 찍으려면 숱한 테이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깃털의 이미지는 CG의 세례를 입고 탄생했다. 이는 CG 기술의 탄생이 곧 인간이 자연을 거느리고 조작할 수 있는 유사 조물주로 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영화사가 버지니아 라이트 웩스먼이 디지털 영화의 탄생을 <포레스트 검프>의 오프닝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 28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투모로우(2004)>에서 <아바타2:물의 길(2022)>에 이르기까지 기후 위기를 경고하는 여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제작되었다. 다만 이러한 블록버스터에서 드러나는 메시지는 단순히 근대적인 자연관에 기반한 캠페인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한없이 무서우며 숭고로우며 인간은 제 잘못으로 인해서 심판당하게 되리라는 이야기다. 도시에 살게 된 인간은 자연을 도시보다 낯설게 느끼며, 그것을 신(<아바타2:물의 길)>)으로도, 괴물(<투모로우>)로도 보게 된다. 데이빗 로워리의 걸작 <그린나이트(2021)>는 자연과 인간의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서인류세 시대의 영화를 새로 찍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로 가득하다. 

 

출처-네이버 영화

<그린나이트>는 14세기에 쓰인 기사 모험담《가윈 경과 녹색 기사》을 원작으로 한다. 가웨인(데브 파텔)은 크리스마스에 성에 온 녹색 기사의 내기에 응한다. 가웨인에게 목 베기 게임을 제안한다. 지금 자신의 목을 벤다면 내년 크리스마스에 그만큼 가웨인의 목도 베인다는 것이다. 가웨인은 차츰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용맹을 드러내고자 녹색 기사의 목을 단칼에 베고야 만다. 가웨인은 약혼녀도 생기고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잠정적으로 확정되었으나 녹색 기사의 내기에 응해야만 하기에 그를 발견하러 나선다. 영화는 원작에서의 가웨인의 업적과 그에 대한 찬미를 덜어내고, 로드 무비에 가까운 구성만을 택한다. 녹색 기사를 발견하러 가는 여정은 환상과 실재가 뒤엉키기에 인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파편적 에피소드의 나열은 그 연결점이 어렴풋하다. 이로 인해 여러 단편을 한 데에 둔 옴니버스 구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웨인은 여정의 시작에 강도(베리 키오건)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으로, 가라앉은 목을 연못에서 건져달라는 위니프레드, 그를 따라다니는 붉은 여우, 세계를 방랑하는 거인 무리, 성주와 성주 부인 등 여러 대상을 만난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끝내 가웨인이 만나야 할 녹색 기사의 흔적만을 남기고 종결된다. 끝내 녹색 기사를 만나게 된 가웨인은 내기에 응하지 않고 도망쳐서는 경험할 수 있는 파국을 데자뷰로 본다. 가웨인은 그로 인해 내기에 다시 응하며 그에게 목을 내어준다. 플롯 상으로는 단순한 <그린나이트>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매혹적이고 강렬하며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복잡한 텍스트다. 오히려 각 에피소드의 연출은 극영화의 것이라기보다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같은 미디어 아트 작가들의 유산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이 파편화된 서사는 나름의 정당성을 지닌다. 중간에 성주가 길게 설명하듯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존재인 자연이라는 대주제로 되는 이 에피소드 간의 균열은 오히려 동시대적이다.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매 순간 토네이도가 닥치는 인도에서 원근법에 기반해 자연을 고정된 것으로 그려내는 근대적 리얼리즘이 효력이 있는가를 질문한다. 우리에게 기후 위기가 카오스에 가깝게 닥쳐오기에 오히려 소설은 더 마법스러워야 한다고 본다. 이 영화의 환상성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비례한다.

<그린나이트>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를 골라야 한다면, 성주 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이 가웨인(데브 파텔)의 초상을 그리는 에피소드를 고르고 싶다. 녹색 기사를 마주하기 직전 가웨인(데브 파텔)은 인근에 있는 성에 들러서 며칠간 머물러 있는 중이다. 성주 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은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제안하며, 화폭에다가 감광물질을 바른 뒤에 가웨인을 어두컴컴한 방으로 데려간다. 그녀는 곧장 방에 있는 작은 구멍을 열어서 화폭에 반전된 가웨인의 상을 거기에 비치게 한다. 가웨인은 궁정화가의 손을 거친 초상화보다 더 섬세하고도 정확한 초상화를 보고는 경이에 사로잡힌다. 가웨인은 초상화가 형상을 드러내기 전까지 잠깐 유령같은 형상으로 머물러 있다. 이 에피소드는 에피소드 사이의 연결이 모호한 플롯 구조를 생각해도 외따로 떨어져 있기에 영화 전반을 겉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그런데도 이 가웨인이 느끼는 경이에 가담해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고야 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잠깐의 에피소드에는 아날로그 매체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스치듯 지나가지만 가웨인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이 초상화에는 모델인 가웨인이 입지도 않은 갑옷을 입고 있다. 또한 아직 원근법이 발명되지 않은 시기에 그려져 있기에 그의 몸이 2차원 평면으로 그려진다. 화가는 가웨인이 녹색 기사의 목을 벤 신화적인 인물이기에 화가가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그려야 했다. 원근법이 부재해 있기에 그는 당대에 유행하던 화풍에 기대어 가웨인을 그려냈을 것이다. 인간 주체가 당대에 구성된 이데올로기와 기법에 따라서 다른 이미지로 그려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며, 아날로그 매체 이전의 시기에 인간이 그려지는 논리를 잘 설명한다. 인간은 인간이 그리는 그림으로는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없다. 한편 성주 부인이 그리는 초상화는 가웨인이 있는 그대로 그려진다. 정확히는 복제된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성주 부인이 가웨인을 그리는 그 몇 분의 시퀀스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카메라가 되는 과정을 압축한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어두운 방에 작은 구멍을 내서 거꾸로 상을 맺히게 한 것이라면, 거기서 착안해서 환영을 맺히게 하는 환등상Phantasmagoria이 이어서 등장한다. 디졸브로 그려지던 가웨인은 그제야 물질로 인화된다. 가웨인은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야 비로소 그 자신으로 서게 된 것이다. 광학적 장치로의 카메라는 인간을 객관화한다.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에서 인간 바깥의 시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스트 스토리(2017)>에서 그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례 아래서 자연과 인간 사이를 고찰한다. <엉클 분미(2010)>의 전생을 기억하는 유령은 <고스트 스토리>에서는 사랑하는 M(루나 마라)을 보는 지박령 C(케이시 에플렉)로 변주된다. 그러나 데이빗 로워리는 위라세타쿤이 그려내고자 하는 퀴어와 태국의 역사 등 여러 정치적인 주제를 탈색하고, 명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고스트 스토리>는 영원의 시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령의 눈으로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있다. 1:1이라는 낯선 화면비와 필름을 쓴 촬영, 정적인 프레이밍으로 인간 바깥의 시선을 매개하려 한다. C의 유령은 한 번도 M의 시점과 그 자신의 시점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C와 M의 시선은 숏-리버스 숏으로 단 한 번도 교환되지 않는다. 유령의 카메라는 M을 공전하는 행성 궤도처럼 그녀를 겉돈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M이 슬픔을 견뎌내면서 블루베이 파이를 입에 욱여넣는 순간을 10분간 찍는 경이로운 롱테이크는 시선의 문제가 시간의 차원과도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M의 시간과 C의 시간은 다르다. 그저 C의 시간을 통해서 M의 시간이 재해석될 뿐이다. 블루베이 파이를 먹는 잠깐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M이 떠나간 후의 시간은 잠깐의 에피소드들로 분절된다. 로워리는 외재화된 시선으로 M의 상실을 객관화하려 애쓴다. C의 유령은 터전이 무너지자 사라져버린다. 영원히 살아있을 법한 유령은 왜 하필 집이 무너지자 죽었을까. 데이빗 로워리는 인류의 시간과 절멸에 대한 일장연설을 이야기하면서 주제의식을 직접 드러낸다. 영원한 유령의 시간과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대비하되, 인간이 집이라는 상징으로 드러나는 지구를 파괴할 때 그 자연의 시간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은유로 이어진다. M과 C의 이야기는 단순히 죽은 자가 상실한 이의 시간을 재해석하는 것을 넘어선다. 둘의 시간이 상대적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기인해서 자연과 인간의 구도를 알레고리화한다. <그린나이트>는 <고스트 스토리>의 연출과 거기서 비롯된 주제의식을 창조적으로 계승한다. 가웨인(데브 파텔)이 강도를 당한 뒤에 쓰러져 있을 때 카메라가 급작스레 360도 패닝을 하더니 급작스레 가웨인이 죽어있고 거기에 꽃이 흐드러져 있다. 360도 패닝 숏이 <고스트 스토리>의 엔딩에서 무너져 있는 집터를 보는 장면과 유사하다. 자연을 거쳐서야 인간의 유한성이 매개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령의 시점이었던 것이 그 시체를 둘러싸는 숲의 시점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360도의 관점으로 이 대상을 보고 있을 것이다. 숲의 시점 숏으로 본 인간의 삶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카메라는 잠깐 동안의 패닝으로 그 몇 백 년의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다만 가웨인은 숲이라는 군집을 360도로 볼 수 없다.

 

출처-네이버 영화

<그린나이트>는 <투모로우>같은 할리우드가 설정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연이라는 외부의 등장이다. 가웨인이 여정을 떠날 즈음에, 마녀는 그의 허리춤에 녹색 끈을 매어주면서 이 끈을 매는 순간에 누구도 해치지 못하리라고 이야기한다. 이 끈은 외부와 내부 구분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매개체다. <그린나이트>에서 환상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시점은 가웨인이 길에서 만난 강도로부터 녹색 끈을 상실한 순간부터다. 자연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이 무너지면서부터 가웨인은 공포에 처하게 된다. <그린나이트>는 풍경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에, 환상적인 공간에서 인간이 자연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이끌고 있다. 머리를 되찾아달라는 위니프레드의 우화 속 가웨인이 물에 잠기는 순간에 붉은 조명이 끼어든다. 실험 연극에서 쓰일 법한 조명으로 인해서 우리는 해양 온난화로 인해서 급증하고 있는 적조의 풍경을 연상할 수가 있다. 거인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인이 등장하는 씬이 등장하기 전에, 카메라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가웨인이 지나가는 길을 찍는다. 가웨인이 걸어가고 있는 길 뒤편에 고래 화석이 있다. 포유류인 고래는 젖이 달렸다는 이유로 인간과도 유사하다고 비유되며, 거인이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운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린나이트>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며, 우리가 외면했던 자연의 풍경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 이를 연상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자연이 인간에게 침투하는 순간들을 그려낸다. 도나 해러웨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트러블과 함께 하기다. 자연이 인간을 지켜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자연과 더럽게 뒤엉키며 되려 공산sympoiesis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유가 반영된 것이다. 이것이 가웨인을 자신에게로 오게 하려는 녹색 기사의 큰 그림 아래서 차근히 생긴 일이라는 것을 염두한다면 데이빗 로워리는 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로 관객을 데려가려 하는 듯하다. 다만 이 알레고리가 제대로 읽히지 않은 것은 영화에 내재하는 모호성 때문이기도 하며, 동시에 아직 기후위기를 다루는 동시대 영화의 문법이 아직은 낯설며 발명 단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자연이 애니메이션으로 연출되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김소희 평론가는 <씨네21>에서 이 영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혼합을 앞서 지적했다. 위니프레드와의 만남, 붉은 여우, 거인과의 조우 그 어디에서도 인간은 그 애니메이션을 만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CG는 그 자체로 만질 수 없기도 하다. 위니프레드의 머리가 잘려나간 형상은 가웨인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경고한다. 이는 예수의 정연명령과도 같다. 자연이라는 물질을 만지거나 해치려 하기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그들이 드러내는 세계를 멀찍이 떨어져 체험하는 것이다. <투모로우>와 마찬가지로 그린나이트에서 자연은 체험되지 않는 대상으로 남아 있다. 다만 디지털 이미지와의 대화는 <투모로우>의 괴물화와는 정반대로 자연을 그려내고 있다. 녹색 기사는 그 절정에 있다. 가웨인은 처음 녹색 기사를 보고서는 압도감에 사로잡힌다. 얼굴이 나무뿌리의 형상을 지니되 다족류를 닮기도 한 이 녹색 기사를 보고 가웨인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목을 가감 없이 벤다. 인간은 보통 자연에게는 통점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또한 자연이 인간에게 복수할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해 저지른 짓이다. 가웨인이 다시금마주한 녹색 기사는 윌리엄 터너의 <황금가지>를 연상하게끔 하는 미장센을 지니는 노란 조명 아래의 성당에 앉아 있다.  녹색 기사는 H.P.러브크래프트가 그리는 크툴루와 닮아있다. 크툴루는 우주적 공포cosmic horror를 자아내는 생명체이며, 인간이 있기 훨씬 전부터 지구에 살고 있던 존재다. 이들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은 미쳐버리고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크툴루를 보고서 미치는 러브크래프트 소설 속 인간처럼 가웨인은 다시금 녹색 끈을 매고서 녹색 기사가 주는 공포를 잊으려 한다. 가웨인의 환상에는 인간이 기후위기를 외면한다고 한들, 인간은 결코 종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로워리의 비전이 담겨 있다. 마지막에야 가웨인이 심판에 응하려고 녹색 끈을 다시 풀고자 때 녹색 끈이 성기의 위치에 있는 것은, 그러한 사고가 남성적인 사고에 기반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녹색 끈을 되찾으려 정절을 지는 장면도 허울 뿐인 기사도를 조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생각이 자위에 불과하다는 냉소로 보인다. 데이빗 로워리는 기후위기에 우리가 정정당당히 나아가기를, 그 심판을 지금 우리가 감당하고 후대에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요청하는 듯하다. 이 요청에 응할 것인가 아닌가는 영화를 본 이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출처-네이버 영화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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