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 는 1952년부터 10년마다 영화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역대 최고의 작품’을 선정해왔다(처음에는 가볍게 게임처럼 시작했는데 점점 더 중요한 이벤트가 되었다고 한다). 2023년 1월호에는 2022년에 선정한 결과가 실렸다. 이번 설문에는 이전보다 거의 2배가 많은, 1,639명의 평론가, 프로그래머, 아키비스트, 학자들과 거의 500명의 감독이 투표에 참여했다고 한다(한 사람이 최고의 영화 10편을 선정해서 제출하면 그것을 모두 집계해 순위를 가른다. 결과는 영화관계자들의 투표를 중심으로 100위까지 발표하고, 감독들의 투표 결과는 따로 집계해서 50위까지 발표한다. 한국 영화로는 봉준호의 <기생충>이 영화관계자들 투표에서 90위에 올랐다).
투표자 수를 늘리면서, 나이, 성별, 인종 등을 더욱 다양하게 안배했고, 그래서인지 이전과는 매우 다른 결과가 나왔다.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톱10 영화’의 목록을 2012년과 비교해 보면, 5편이 바뀌었다. 아마도 여기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결과는, 2012년까지 이 투표에서 여성 감독 영화가 톱10에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여성 감독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1975)이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과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감독 투표에서는 4위, 2012년 투표에서는 35위). 그뿐 아니라 또 다른 여성 감독 클레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Beau Travail>이 7위에 올랐다(감독 투표에서는 14위). 100편 가운데 여성 감독 영화는 11편이다. 이것은 전 세계로 퍼져나간 미투 운동과 그에 따른 페미니즘의 확산이 얼마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흑인 감독 영화가 2012년의 1편에서 7편으로 늘어난 점도 새로운 변화이다. 2000년대 영화로는 두 편, 왕가위의 <화양연화>(2000)가 5위,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가 8위를 차지했다.
이제 여성 감독 영화 두편, <잔느 딜망>과 <아름다운 직업>을 살펴보자.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잔느 딜망>은 1975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이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페미니즘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영화의 평가에 감독의 나이가 중요한 요소는 될 수 없지만, 샹탈 아커만이 25살에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영화의 상영 시간은 3시간 21분이며, 남편 없이 청소년 아들과 살아가는 벨기에의 중산층 가정주부 잔느 딜망의 일상이 사흘 동안 펼쳐진다. 잔느는 요리, 목욕탕 청소, 장보기,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과 저녁 먹고 산책하기 등을 하며 거의 쉴 틈 없이 하루를 보낸다. 카메라는 움직임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델핀느 세리그가 연기하는 잔느를 지켜본다. 잔느가 능숙하게 판에 박힌 일과를 수행하는 모습은 거의 실시간처럼 재현된다. 잔느가 집안에서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계속 전등을 끄고 켜기 때문에 그녀의 일상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잔느가 감자 껍질을 깎거나 뜨개질하는 등등, 가정주부의 일상적인 노동은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대중 영화라면 내러티브의 진행에서 단지 필요한 설정으로 짧게 지나쳤을 것이다.
잔느가 잠자리에 들 때 전등이 꺼지면, ‘첫 번째 날 끝’, ‘두 번째 날 끝’이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잔느의 평범한 일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활동은 아마도 생계를 위해 이루어지는 ‘매춘’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잔느가 매춘을 할 때, 카메라는 그녀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녀와 남자가 사라진 문밖에 머문다. 기계적으로 가사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잔느는 평온한 태도로 남자들에게서 돈을 받는다.
잔느의 일상은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 같지만, 매춘으로 번 돈을 넣어두는 도자기가 있는 거실 장면을 보면, 외부에서 비치는 불빛이 어른거리며 어둠 속에서 번쩍번쩍한다. 또 잔느가 소파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장면에서는 외부의 자동차 소음 따위가 계속 들린다. 이러한 미장센과 사운드는 서서히 붕괴해가는 잔느의 복잡한 내면 상태를 은유하는 것 같다. 잔느의 일상을 무심히 지켜보는 듯한 카메라에 강박의 느낌이 점점 스며들면서 이상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연출 솜씨는 너무나 훌륭하다.
두 번째 날, 잔느가 매춘으로 번 돈을 도자기에 넣은 다음 뚜껑 닫는 걸 깜빡했을 때(사진1), 감자 요리를 태웠을 때, 카페에서 잔느가 항상 앉았던 자리를 다른 여자가 차지했을 때, 그 붕괴의 조짐은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 번째 날, 카메라는 처음으로 잔느와 남자가 매매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많은 글에서, 수수께끼라고 평가했던 장면이 이어진다. 겉옷을 다 입은 잔느는 화장대에 놓여있던 가위를 집어 들고 곧장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목을 찌른다. “내가 여자라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잘 수 없을 것 같다”거나, “엄마와 섹스하는 아빠가 미웠다”고 했던 아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 남자와의 섹스에서 쾌락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래서 옷을 입으며 문득 화장대 앞에 놓인 결혼식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을 때 어떤 죄책감이 발동한 것일까? 아니면 찾아 헤맨 단추를 끝내 구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관객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 이유를 계속 찾아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잔느는 어두운 거실에서 그 도자기 옆에, 어른거리는 불빛과 소음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 뒤쪽에 놓인 장식장의 프레임을 통해 그녀는 갇힌 것처럼 보인다(사진2). 그러나 가사 일에 매달려 끊임없이 움직이던 잔느가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통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일상의 규칙을 깨버렸을 때, 비로소 쉬게 된다. 그녀에게 좀더 휴식을 주려는 듯, 아들은 집에 도착하지 않고 ‘세 번째 날 끝’이라는 자막도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클레르 드니의 <아름다운 직업>
<아름다운 직업>은 1999년, 베니스 영화제 ‘오늘의 영화’ 부문 초청작으로, 허먼 멜빌의 『수병 빌리 버드』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현재 마르세유에 거주하는 개루(드니 라방)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지부티의 해안지역에서 외인부대 준위로 복무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절의 개루는 평소에는 병사들을 신체적으로 단련시키는 각종 훈련을 실시하고, 휴가 때는 지역의 여성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개루의 일상은 신병 상탕이 도착하면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상탕은 외인부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려한 외모에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해내는 용기 있는 청년이다. 개루는 이러한 상탕을 보자마자 시기심에 빠져든다. 자신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부대장 브루노가 상탕에게 관심을 보이자 질투심에 휩싸인 개루는 상탕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개루의 감정 상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상탕이 개루의 음모에 빠져 죽을 고비에 처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간다. 때문에 영화의 많은 설정이 모호하게 다가온다. 브루노, 상탕 그리고 사귀는 지역 여성 등에 대한 개루의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병사들, 이슬람 종교의식 그리고 지역인들의 모습 등을 나열하는 감독의 의도도 불투명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병사들이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할 때, 뿜어나오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렬하게 포착해낸 연출 감각이다. 또 문명의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풍경(사진3)과 그러한 공간에 덩그러니 버려진 탱크(사진4), 군사 활동을 하는 병사들(사진5)과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는 지역민들(여성과 아이들)(사진6)의 대비, 오지까지 스며든 다국적 기업(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의 이미지(사진7) 등의 연출도 매우 훌륭하다. 클레르 드니는 이러한 이미지의 나열과 충돌을 통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기 위해 거기에 적합한 메인 플롯을 허먼 멜빌에게서 빌려온 것 같다.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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