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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연호의 문화톡톡] 대안영상예술 3: 진보로서의 예술-해방의 행위들
[김장연호의 문화톡톡] 대안영상예술 3: 진보로서의 예술-해방의 행위들
  • 김장연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3.04.17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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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우리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사전에 보면 예술(藝術, art)은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예술적이다!'라고 부르는 문장에는 '미적으로 숙련된 기술'이란 의미가 포함된다.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인간이 오랫동안 형성해온 '미적으로 숙련된 기술'인 다양한 예술을 접하고 성장해왔다. 그렇기에 예술은 공공재로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도구적 가치를 지닌다. 집단 문화가 형성되면, 예술은 그 공동체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한 예술 장르들을 발달시켜왔다. 과학과 예술 분야가 일치했던 서구의 발달 변천 과정을 거슬러 가보면 과학적 발명이 사회문화에 영향을 주고 예술은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적 토대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발명해온 것을 알 수 있다.

한 일례로 현재까지 세계 최초 극영화감독인 알리스 기-블라쉐(1873~1968)는 1896년부터 1920년까지 약 1,000여편을 제작했다. 현재 전해 오는 작품은 약 100여 편 정도인데, 블라쉐는 '크로노폰 시스템'을 개발해 영화를 제작하면서 무성영화에 사운드를 삽입해 실제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흑백필름에 색을 입히는 틴팅(tinting), 이중인화와 같은 실험을 통해 영화의 미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Pierrette's Escapades (1900) *new musical score* - ALICE GUY BLACHE - Le depart d'Arlequin et de
피에레트의 일탈 Pierrette's Escapades (1900) *new musical score* - ALICE GUY BLACHE - Le depart d'Arlequin et de

그렇다면 앞으로 새롭게 탄생할 예술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스마트폰이 상용화되자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여 사진, 동영상을 찍고, 드로잉을 하는 행위가 특정 전문 직업인만이 아닌 이제 아동청소년도 접하고 할 수 있는 예술적 행위가 되었다. 유튜브와 같은 대중 디지털 플랫폼에서 이들이 그린 동영상 콘텐츠를 쉽게 시청할 수 있는 이유다.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여 '예술'을 하는 것은 이제 대중화가 되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전세계인들이 찍고, 그리고, 만든 수많은 콘텐츠들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군가는 현재 유튜브 영상 콘텐츠 생산량을 보며 1900년대 초 서구에서 제작된 초기 영화들과 비슷한 흐름이라고 말한다. 전문 산업 디지털 플랫폼 OTT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에서 상영/방영될 것을 전제로 제작되는 영화, 영상들도 대세가 된 디지털 기계들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연 '진보로서의 예술'이라 호명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Coin Rue de Seine. Date de création: 1924. Numéro d’object: CARPH003868., Eugène Atget(1857–1927), Tirage sur papier albumin, Musée Carnavalet.
코너 뤼 드 센느(Coin Rue de Seine). Date de création: 1924. Numéro d’object: CARPH003868., 외젠 앗제 Eugène Atget(1857–1927), Tirage sur papier albumin, Musée Carnavalet.

가속도가 붙은 디지털 기계의 발전을 인간의 진보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동영상/영화는 인간의 시청각적 감각을 확장시켰지만, 오히려 가부장체제하에 대량으로 생산되는 성적/대상화 재현물에 여성과 사회적 약자는 희생양이 되었고 문화는 성적대상화된 생산물에 무감각해지기에 이르렀다.   

미셀 푸코(Michel Pau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Discipline and Punish)>(1975)에서 인간의 몸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정치적인 몸으로 살핀다. 집단 공동체에서 매일 매일 사회(권력자)의 체계가 체화되는 과정에서 계급화되는 몸은 어느 순간 위계화되고 자동화되어 무의식에 각인된다. 권력자의 체계는 관습과 생활양식으로 '모세혈관'처럼 집단, 가족, 학교, 공동체, 사회, 회사, 군대에 질서화되어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1935)에서 주위환경을 가시화하는 카메라 기능이 인간의 지각을 심화시키면서 기존의 예술보다 '상황들'을 더 정확하고 섬세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시각의 무의식의 출현으로 민중은 '아우라'에 가려진 권력자의 세계관을 벗겨내고 민중의 현실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가시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벤야민은 외젠 앗제의 사진을 통해 아우라를 찾을 수 없는 공허하고 쓸쓸한 지금-여기의 도시를 발견함과 더불어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사진'이라는 사진의 가능성을 제안했다. 또한 파시즘, 제국주의 등 권력자들이 정치를 예술화하는데 선전사진/영화 등을 동원하는 것을 비판하며, 민중이 카메라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여 대항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은 예술 생산자로서 민중의 출현을 예견했다. 진보가 권력자가 아닌 피지배계급의 관점을 얼만큼 더 명확하고 정확하게 더 관철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라면, 진보로서의 예술은 피지배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각의 무의식'은 차별받는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증언한다

​'특권과 억압의 교차축', 교차성X페미니즘, 한우리 외, 출판사 여이연, 2018.​
​'특권과 억압의 교차축', 교차성X페미니즘, 한우리 외, 출판사 여이연, 2018.​

왼쪽 그래프는 교차성 페미니즘에서 논의하는 '특권과 억압의 교차축'이다. 어떤 정체성을 지닌 몸인가에 따라 나의 몸은 그 사회에서 특권화 또는 차별받는 위치성을 갖게 되며 정체성은 '능력'으로 평가받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들이 차별받는 위치에 더 가깝게 좌표값이 찍히게 된다면 그 사회에서 폭력, 차별, 불평등, 혐오 표현 등에 더 노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자체가 언어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책, 건축, 거리, 미디어, 문화, 예술, 복지, 교육, 가족정책 등이 특권계급에 맞춰 있기 때문에 차별 받는 정체성은 일상적으로 위축되고 불편하며 폭력 경험이 자연스러운 문화에서 치열하게 생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좌표값의 존재는 일생동안 헌법에서 보장된 인간 어느 누구나 누릴 수 있다는 '행복추구권'을 박탈당하는 상황들에 매순간 직면하게 된다. 어떤 좌표값은 재현불가능성을 안고 있는 몸이다. 오늘날 현실은 미디어(동영상/영화)에서 이들의 존재를 어느 만큼 보여주고 있는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시네마 ICinéma I : L'image-mouvement>(1983)에서 움직이지 않는 단면들의 구체적 지속으로서의 운동이 시네마적 환영(the cinematographic illusion)을 이루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논의를 끌어온다. 시네마에서 운동은 순간을 포착한 연속적인 사진들의 지속으로, 시네마는 이러한 운동들로 이루어진 불특정한 순간들을 서로 연결하면서 재생산하는 '몽타주'와 같은 체계를 갖고 있다. 들뢰즈는 진보로서의 예술을 '우발성들(accidents)'에서 찾는다. 우발성들은 운동의 지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사유방식의 탄생'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는 시네마에서 기존 남성의 동선을 여성의 동선으로 지위를 변화시키는 것 역시 새로운 사유방식의 탄생을 야기하며, '아우라'와 같은 완벽한 환영으로서의 장치(appareil)가 아닌 새로운 현실을 보여줄 기관(organe)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계예술이 쏟아내는 완벽한 환영의 재현물이 세상을 덮을 때 쯤, 해방의 행위를 담고 있는 동영상은 더 비가시화되고 은폐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나 카메라로 찍고, 그리고, 만들 수 있는 환영 기계 환경은 어느 누구나 현실을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도 권력의 통제를 탈주하는 치열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해방의 행위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미래의 예술은 이 치열한 과정에서 생존한 형상물이 될 것이다.   

 

 

글 · 김장연호
문화학 박사. 한예종 객원교수.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집행위원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대외협력이사,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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