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틀린 건가요? 저를 똑바로 보세요.” 어둠 속에 한없이 자신의 몸을 웅크려서 존재를 지우고자 하는 남자, 후미(마츠자카 토리)는 깡마른 팔다리와 초래하고 창백한 표정으로 스크린 너머를 응시한다. 영화는 초등학생이던 사라사와 그를 유괴한 소아성애자 대학생 후미의 미묘한 관계를 15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두고 과거와 현재의 얼룩진 시공간을 넘나든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어린 사라사 앞에 우산 든 후미가 나타난다. 집에 가기 싫었던 사라사는 후미의 집을 따라가게 된다. 어디까지나 유괴의 전형적인 수법을 적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던 영화는 사라사와 후미의 묘한 유대관계라는 외피를 씌워 비틀기를 시도한다. 나기라 유의 장편소설 『유랑의 달』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이상일 감독은 소설의 구체적인 묘사를 지우고 서사의 틈을 만들어내면서, 관객의 윤리적 판단을 끝까지 지연시킨다. 사회의 시선 아래에서 싹튼 뒤틀리고 빈약한 나무는 끝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관계의 연결
<유랑의 달>의 카메라는 침착하면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대상을 포착한다. <브로커>(2022), <버닝>(2018), <마더>(2009) 등을 촬영한 홍경표 촬영감독이 섬세한 공간 안의 움직임은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한다. 보이지 않는 관계를 시각화하는 패닝은 사라사와 후미의 뒤엉킴을 수평으로 공들여 따라간다. 15년 전, 벤치에 앉아있던 어린 사라사의 롱 샷에서 시작된 카메라는 공원을 가로지르며, 건너편 벤치에 앉아있는 후미에게로 이동한다. 현재, 후미의 카페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반대 양상을 지닌다. 후미에서 시작된 카메라가 커피를 마시는 사라사에게 도달한다. 가늘고 길게 늘어뜨린 선처럼 팽팽하게 이어진 감정들은 적막 안에서 시작과 끝을 오간다. 소설에서 “균형”과 “무게 추”로 관계를 언어화했던 작가의 표현은 이상일과 홍경표의 만남으로 이미지로서 변모한다.
반면, 어른 사라사(히로세 스즈)와 남자친구 료(요코하마 류헤이)의 저울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권력을 취득한 쪽으로 한없이 기운다. “치사하지만 그것도 사랑의 형태지. 기댈 가족도 없는 사람은 도망갈 데도 없는 거야.”라는 사라사 동료의 말처럼 관계의 약자가 된 사라사의 말은 료에게 있어 묵음 처리가 된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테두리 안의 사랑에서 료는 폭력을 행사한다. 아버지의 폭력을 답습한 료는 도망친 어머니를 대체할 순종적인 여자를 선택한다. 유려하게 연결되던 패닝은 사라사와 료를 보여주던 장면에서 자취를 감춘다. 분절된 쇼트 안에서 일그러진 사라사의 표정과 침범하려고 하는 료의 신체는 프레임에 일부 잘린 채로 불안한 일상을 이어가도록 한다.
사라사, 후미, 료는 모두 각자의 불행을 희석시켜 타인의 공간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기심에 기대고 있다. 후미가 위험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이모네 집에 돌아가지 않은 어린 사라사, 신체적 열등감을 사라사와의 편안함으로 치환하는 후미, 도망간 어머니를 대체할 순종적인 여자를 택한 료까지. 영화는 타인을 바라보는 눈높이로 관계의 무게 추가 기울어지는 지점을 설명한다. 어린 사라사의 지옥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높이에서 기인했다. 밤마다 흉악한 짐승이 되어 나타나는 이모네 중학생 아들 다카히로에게 추행을 당하는 사라사를 보여주는 카메라는 다카히로의 시선이 되어버린다. 이는 료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구현된다. 사라사의 동의 없이 자행된 료와의 성관계는 텅 비어버린 사라사의 눈동자와 얼굴 표정은 프레임 바깥으로 침범해 잘린 료의 신체 일부와 대비된다. 반면, 후미는 어린 사라사와 눈높이를 맞춰주는 유일한 대상이다. 침대 아래에서 위에 있는 사라사를 바라보고, 나란히 누워서 보는 TV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장면은, 소설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불안정하게 기우는 저울”을 평평하게 만든 것과 다름없다. 마법과도 같았던 시간에 틈입한 불청객은 법의 저울에 사라사와 후미를 올려 죄의 경중으로 다시금 높이의 격차를 벌린다.
어둠을 포옹하는 여과된 빛
“평소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잡아내고 파헤치려는 힘을 필요”로 한다는 이상일 감독은 그 공간에 빛이 들어올 조금의 자리를 내어준다. <유랑의 달>은 전작이었던 <분노>(2017)의 표현방식과 닮아있다. <분노>는 하지오지 부부 살인사건의 도망친 용의자 야마가미를 찾는 경찰들과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 이즈미(히로세 스즈)가 각각 만나는 의문의 세 남자라는 독립된 에피소드의 충돌을 그린다. 찌르듯 쨍하게 얼굴에 내리꽂는 <분노>의 빛은 후반부의 거기 있음을 인지하는 믿음으로 표상된다. 이상일 감독은 <유랑의 달>에서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둔 빛을 통해 주변부에 꼿꼿하게 뿌리 내리지 못한 인물들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여과된 빛은 벽에 머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분노>에서보다 <유랑의 달>에서 그 빛이 희미해졌다고 한다면 조금은 주관적인 판단일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는 빛은 침대에서 료와 정사를 나누던 사라사가 무력한 표정으로 흔들리는 커튼이 보이는 창문에 시선을 두며 다시 나타난다. 15년 전, 후미의 집 커튼으로 돌아간 영화의 시간은 범람하기 직전의 물처럼 나풀거린다. 평화롭던 공원에 갑작스럽게 내리던 비처럼 넘쳐흐르고야 말 미묘한 감정들은 거기 있음을 마구 선언한다. 어린 사라사와 후미의 기묘한 짧은 만남은 눈에 보이지만 잡을 수 없는 신비한 것으로 변한다. 「빨간 머리 앤」을 읽던 사라사는 “폭풍 같은 선이나 악의 깊은 심연에서 그 신비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라는 「포 시집」의 문장을 읽는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시집을 등장시킨 영화는 “어린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후미의 언급처럼 사라사의 성장을 멈춰두기에 이른다.
머무른다는 감각은 단순히 사라사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거칠게 말하면, 변화를 하지 못하기에 붙잡히는 것이다. 사라사의 정신적인 성장의 단절, 후미의 신체적인 성장의 단절은 달의 형태로 묘사된다. <유랑의 달>이라는 제목처럼 사라사와 후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름달을 본다. 둥그렇게 꽉 채워진 달은 후회로 가득 채워진 감정이 되어 죄책감으로 밤을 환하게 비춘다. 후미가 체포되기 직전에 강물에 누워 낮의 보름달을 본 어린 사라사와 강물로 들어가 사라사와 같은 자세로 새벽녘의 달을 본 후미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번뇌를 반복한다. (후미가 강물로 들어가는 장면은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다유>(1954)를 오마주한 듯하다.) 집이 있으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유랑하는 두 사람은 과거의 빛이 잠시 머물렀던 공간을 그리워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 료에게서 벗어나 후미의 옆집으로 이사한 사라사는 또다시 하나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베란다에서 후미와 연결된다. 사라사의 동료가 맡기고 간 초등학생 여자아이 리카를 돌봐준 후미와 사라사의 만남은 잡지에 연재될 정도의 이슈가 되고, 두 사람의 공간에는 범람한 물이 가득 고인다.
사회의 심판이 시작된 낮의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후미는 사라사 앞에서 발가벗으며 신체적인 결함을 보여준다. “나는 어른이 될 수 없어. 누구하고도 연결될 수 없어. 사라사는 성장했는데.”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던 후미는 성장이 멈춘 유아적인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아픔을 내어놓는다. 아이를 달래주듯 후미를 안아주는 사라사와 신체적인 결함을 드러낸 후미는 내려놓으며 비우기를 선택한다. 그제야 영화는 달의 모양을 보름달에서 깎인 형태의 초승달로 모습을 바꾸기를 시도한다. 달이 변화하는 주기처럼 표면적으로 보이는 성장이 아닌 두 사람의 관계도 성장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이상일 감독의 태도에 약간의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소설과 달리 후미가 어린 사라사의 입술에 묻은 케첩을 닦는 장면을 후반부에 배치하면서 정서적 연결보다는 성적인 끌림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해진 것이다. 상술했듯, 영화는 소설에 비해 투박하고 유랑하듯이 흘러가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유랑의 달』에서 성장하지 않는 자신이 세뇌하듯이 아이를 좋아해야 한다는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뻗었던 손이 영화에서는 본질을 흐리는 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서로를 향해 뻗은 손을 맞잡은 사라사와 후미의 판단이 꽤나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상일 감독의 판단은 무엇일까?
외면하거나 판단을 유예하거나
<유랑의 달>을 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떨고 있던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 도둑을 일삼던 <어느 가족>과 달리 <유랑의 달>에서는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두 사람의 연대가 중심적으로 그려진다. 히로카즈의 세계가 이상한 가족에 동화되어 사회적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에 안타까움을 남겼다면, 이상일의 세계의 사라사와 후미는 관객과 거리를 두면서 고립된 그들만의 공간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관객들에게 판단을 지연시키면서 그들의 세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단순히 미묘한 사회문제를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론에 보도된 사라사와 후미의 비정상적인 관계처럼 관객들은 서사의 틈을 마주하고는 어느 편에 서야 할지에 고초를 겪는다. 상술했듯, 후미는 신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엄마에게 묻는다. 성장이 더딘 나무를 무차별하게 뽑아내는 어머니는 “저는 틀린 건가요? 저를 똑바로 보세요.”라는 후미의 물음에 외면하고야 만다. 이것은 감독인 이상일이 후미의 어머니로 우회하면서 관객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영화가 소설에 비해 생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를 정당화하기보다는 관객들의 유예된 판단을 기다려주려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감독의 질문에 사라사는 어둠 속에 감춰져있던 후미의 신체를 또렷이 응시한다. 타인의 선택에 자신을 유랑하듯이 맡겼던 사라사는 이제 굳건함을 지니고는 아이처럼 우는 후미를 안아준다. 소녀다운 해사함을 한 겹 벗겨내고 거친 폭력의 파도를 맞서던 <분노>에서의 이즈미는 <유랑의 달>에서 죄책감을 덜어낸 평온한 얼굴로 변모한다. 어쩌면 또렷한 응시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히로세 스즈의 다음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