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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진의 문화톡톡] <더 글로리> 인기의 명과 암 그리고
[엄윤진의 문화톡톡] <더 글로리> 인기의 명과 암 그리고
  • 엄윤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3.04.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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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이라는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충분히 받을 만하다.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강렬하다. 특히,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가 제도적인 혹은 형사적인 책임을 교묘히 빠져나갈 때,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사람들의 갈망은 더 강렬해진다. 이 드라마에서도 가해자들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한다.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말이다. 우연이겠지만, 〈더 글로리〉 시즌 1이 끝나고 나서 우리 사회를 뒤흔든 학폭 관련 뉴스 보도가 있었다. 국가수사본부장이라는 고위 공직자의 자녀가 벌인 학폭 사건 전말이 드러났다. 현실에서도 가해자인 정군은 정시로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고, 피해자는 아직도 그 사건으로 인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심지어 가해자 정군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학폭 기록마저 삭제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실제 사건으로 접하게 되면서 학폭을 다룬 〈더 글로리〉의 인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끈 또 하나의 이유는 복수심이 인간의 본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복수는 위협이나 위험에 인간이 보이는 본능적 반응에 속한다. 또한 사적 복수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 많진 않지만, 우리 의식 내면에선 복수를 통해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한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형사적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가해자에 대한 일종의 제도적 복수이고, 피해자의 원한을 공적인 사법 제도로 풀어 주기 위함이다. 또한 심리적으로도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하면, 가해를 당하기 이전의 건강한 심리 상태를 회복한다는 심리학 실험 결과도 있다. 그러니 드라마 〈더 글로리〉가 우리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을 후련하게 풀어 준 것이다.

 

〈더 글로리〉 같은 복수극이 갖는 장르적 매력

 

복수극은 통쾌한 기분 즉, 카타르시스(catharsis)를 확실히 느끼게 해 준다.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란 뜻이고, 배설이란 어원을 갖는다. 〈더 글로리〉 같은 복수극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시청자의 마음에 쌓아 놓는 분노와 적의, 정의에 관한 목마름과 같은 것들을 극을 마무리하며 쏟아내 해소하게 한다. 마치 복수극은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를 주지 않은 채, 기름기가 많은 느끼한 음식을 몇 인분 연속 먹게 해 놓고, 그 느끼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간 눈앞에 사이다 뚜껑을 펑펑 소리 내며 따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시청자에게 준다. 악역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시청자들의 마음에 일으키고, 그 감정의 찌꺼기를 서서히 혹은 한꺼번에 배출하게 해 시청자들에게 행복감을 주는 방식은 극을 쓰는 전형이다. 그래서 거의 사이코패스만큼 악랄하게 가공된 악역이 복수극엔 빠지지 않는다. 후련하게도, 〈더 글로리〉에서는 현실과는 매우 다르게 선한 주인공이 그 악역을 응징하는 데 성공한다. 극이 전개되며 악역은 해서는 안 되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악행을 저지른다. 극 후반부부터 복수를 벌이는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며 쌓인 부정적인 감정을 모조리 해소해 버린다. 적대감이든 분노든, 그게 어떤 감정이든 간에 배설될 때 느끼는 그 후련함과 행복감, 말 그대로 카타르시스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더 글로리〉의 인기 이면에 있는 사회적 현실


우린 일상을 살며 긍정·부정적인 여러 감정을 갖게 된다. 특히 분노 등을 비롯한 여러 부정적 감정이란 것의 근원엔 살며 느낄 수밖에 없는 불공정과 차별, 편법에 의한 독점과 사회 제도에서 발생한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가 있지 않을까. 〈더 글로리〉를 보는 시청자 상당수도 이런 문제를 부딪쳐가며 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좌절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복수극은 이런 갑갑한 처지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무력감을 잠깐이라도 잊게 해 준다. 최근에는 특히 기나긴 팬데믹과 전쟁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 상당수가 코로나 블루 같은 우울증으로 괴로워했고, 동시에 주거비(금리 포함)와 물가가 상승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 즉, 불안, 원망, 그리고 분노 같은 감정의 배출구가 필요했다. 그러니 〈더 글로리〉의 복수가 많은 이를 위로해 준 거다. 삶의 조건이 취약해 일종의 마취제가 늘 필요한 다수에게 그 고단함과 고통을 잊게 해줄 혹은 행복감을 줄 약은 필요하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약을 먹을 필요가 없는 편안하고 행복한 사회에서 살고 싶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소수 특권층이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 된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다. 그러다 보니 소수 기득권은 이런 약을 시의적절하게 제공해줘야 언제나 그렇듯 자신들의 지위와 풍요를 우리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누릴 수 있게 된다. 세계 최고 부자 이십여 명이 지구 전체 인구 하위 50%가 가진 부만큼을 독점한 상황이다. 이런 구조적인 불평등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렇다 보니 항상 사회구성원 다수의 이목과 감정이 향할 대상이 늘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느끼게 되는 여러 유형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배출하거나, 행복감으로 이 감정들을 상쇄할 수단으로 소위 3S 즉, 스크린(Screen; 드라마 포함), 스포츠(Sports), 그리고 섹스(Sex)가 등장한 것 아니겠나? 클리셰(cliché) 느낌이 드는 이론으로 들리겠지만 상투적이라 해서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민생과 경제, 정치, 외교 등이 막장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선 파놓은 우물에 물이 계속 차오르듯,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내면에 계속 차오를 수밖에 없다. 그 복잡하고 더러운 감정을 어디다 해소해야 할까?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 속의 악역 캐릭터마저 없었다면 우리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우린 <더 글로리> 같은 소위 대중문화 콘텐츠라는 것을 즐기며 감정을 배설하고 있었던 거다.

 

〈더 글로리〉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저렴한 약과 같은 것인가? 부작용은 없을까?

 

부정적인 여러 감정을 배설하고 난 시청자들은 어떤 태도나 마음 상태를 갖게 될까? 용변이 급해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의 달라진 심리 변화, 혹은 허기져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서 느끼는 것과 같은 포만감과 비슷한 효과를 느끼지 않을까? 그 드라마의 결말을 기다리며 통쾌한 마지막 장면을 지켜 본 시청자의 마음에도 다급한 신체적인 욕구를 풀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을 거다.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나 원망의 감정이 누그러졌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현실에서 응징해야 할 일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감정의 강도도 약해지지 않았을까? 이런 현상이 우리 안에 일어나면 누구에게 좋을까? 우리 사회가 가진 거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자본과, 이들의 자원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정치 엘리트 집단이 혜택을 보지 않을까? 물론, 〈더 글로리〉를 쓴 작가가 이 점을 의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복수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일으킬 주제가 우리가 처한 최근 상황에서 인기를 끌 것이라고 예상은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인기와 같은 대중적 관심이 정작 진짜 비난받고, 원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해 줄 수 있단 인식은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권력자들(주로 정치와 경제 권력자들)에게 향할 분노의 양이 줄어들거나 다른 곳을 향하게 되는 예기치 않은 효과들 말이다. 우리는 사회의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쏟아내야 했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원망 등의 더러운 찌꺼기 대부분을 드라마 〈더 글로리〉에 배설해 버렸다. 이 드라마가 자본이나 정치 엘리트들이 받아야 할 분노와 원망을 모면하게 해 주는 희생양(scapegoat)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으로 이 드라마가 우리의 비판적 시선과 정당한 분노를 마땅히 향해야 할 곳으로 인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글로리〉의 인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안타깝게도, 우리 언론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과 같은 소위 좋은 콘텐츠가 지적하는 의제를 그동안 진지하게 조명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단지 “오스카상을 받았다. 역사적 쾌거다.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이제는 세계적 수준이다. 아니 넘어섰다. 소프트 파워 강국이다.”라고만 보도한다. 이 또한 민족적 자부심을 줘 우릴 뿌듯하게 해 부정적인 감정을 행복감으로 상쇄하는 데 그친다. 문제는 불평등은 왜 그리 질겨 오래 가는지, 다수인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불평등 문제를 풀 해법은 진짜 없는지에 대해선 공론의 의제로 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는 유치원생부터 생산과 노동 현장에서 은퇴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오징어 게임>처럼 잔인한 ‘현실판 생존 경쟁’을 쉼 없이 해 왔다. 언론은 이런 비인간적일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없애거나, 최소한 완화할 제도적 방식이나 정책에 관해서도 적극적으로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진지한 담론은 시청률과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일까? 어쨌든 공론을 이끌어가야 할 언론은 그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집중적으로 비춘다. 달은 보게 하지 않고.

 

달은 어디를 비추고 있을까?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학교 폭력과 그 심각성을 다룬 드라마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을 때, 언론은 그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하기보다는, 그 콘텐츠가 제기하는 문제와 그 문제를 일으킨 환경에 대해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폭력은 무엇보다 사회의 위계 구조와 그 구조가 만들어 낸 우리 문화의 부산물이다. 위계 구조는 주로 자기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아래로 보거나 덜 가치 있는 존재로 보게 한다. 위계 구조는 타인의 존엄에 대한 무시와 차별적 대우를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폭력은 한 인간에 대해 행사하는 무시 혹은 경멸의 형태다. ‘타인이 나보다 아래란 인식’이 타인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게 되는 씨앗이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폭력의 온상이 되는 구조 즉, 불평등한 위계 구조는 사회 전 영역 구석구석에 빠지지 않고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그 위계 구조가 정당한가에 대한 의심도 받지 않은 채로 말이다. 만연한 위계 구조와 여기서 비롯한 불평등, 그리고 공정하지 않은 대우는 그 사회의 문화가 된다. 차별적인 대우가 큰 저항 없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타인이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지위와 가치에 있어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상대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바로 이런 인식과 태도에서 폭력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니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가치에 있어 차등을 두고 순위를 매기는 문화가 폭력의 온상이다. 탁월한 재능 혹은 한 사람이 갖는 여러 지위의 높낮이는 사람의 존엄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 않은가? 한 사람이 가진 사회·경제적 지위와 능력은 그 사람이 사회라는 무대 위에 설 때 입는 무대 의상과 같은 것이다. 화려한 옷이든, 허름한 옷이든 누구든 이 옷을 벗는 순간 타인과 똑같은 존엄과 감정의 경험을 가진 한 사람에 불과하다. 타인이 느낀 고통과 행복, 그리고 좌절과 희망이 내 것만큼이나 똑같이 깊게 의식에 새겨지고, 또 그래서 이 모든 감정을 경험한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 아닌가. 이 사실은 그 어떤 지위의 높낮이와 능력도 절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가리킨다. 위계 구조가 불러일으키는 착시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면, 폭력은 더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은 내가 아픈 만큼 똑같이 타인도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나 또한 폭력의 온상이 되는 위계 구조의 특정 층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사는 누구나 인지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유·무형의 폭력을 행사해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인식과 이에 따른 예민한 경계가 폭력을 점차 줄여가는 괜찮은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엄윤진

독일 본 대학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정치 철학서 『거짓 자유』와 실존주의 서적 『좋아서 하는 사람, 좋아 보여서 하는 사람』을 쓴 인문교양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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