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제르브 역 플랫폼에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며
파사주 카르디네에 다시 왔다고 생각했었다.
1999년 2월에서 10월
- 『사건』
1. 사건으로서 <레벤느망>: “사건이 글쓰기가 되고 글쓰기가 사건이 되는 것”
<레벤느망>(2021)은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사건』(2000)을 원작으로 한 오드리 디완이 만든 각색영화이다. 오드리 디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심사위원장 봉준호 감독을 비롯하여 모든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물론 제인 캠피온, 파올로 소렌티노,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을 제치고 이 영화가 최고 영예의 상을 받은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때,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 원작 사건에 대한 새로운 글쓰기로서의 ‘사건’을 뜻한다.
1963년 에르노에게 닥친 임신과 낙태 경험은 그녀의 존재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그 세계의 기호 체계 바깥의 그 무엇을 요청하는, 즉 의미의 생성을, 즉 글쓰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1963년 사건은 35년이 지나 1999년 2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에르노의 글쓰기, 즉 의미의 생성이라는 ‘사건’이, 그리고 20여년이 지나 2021년 디완의 각색영화는 또 다른 새로운 ‘사건’인 것이다.
각색영화로서 이 영화를 ‘사건’이라고 할 때, 그것은 에르노가 체험한 사건을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한 그녀의 글쓰기 속에 존속하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 사건, 즉 ‘순수 사건’을 영화라는 다른 매체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 것을 의미한다. 사건으로서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디완이 원작을 각색하면서 생성하고자 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여성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과거의 국가정책과 문화권력을 검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하는 이 영화의 관객은 시대와 문화를 가로질러 같은 경험 또는 생각을 하는 여성들의 유대감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에르노의 과거 사건에 대한 돌아보기, 그리고 그 보기에 대한 다시 보기가 공존하는 이 영화를 사건으로 본다는 것은 탈현실화된 현재의 첨점과 연결된 동시성 속에서 새로운 사건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의 현실이 직면하고 있는 국가와 문화권력의 부조리성과 폭력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발견이 사건으로서 이 영화를 볼 때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성과이다.
에르노에게 불법 낙태 경험은 영화 속 주인공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이 교수(피오 마르마이)에게 말하듯이, 작가가 될 결심을 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 경험을 글로 쓰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1975년 프랑스에서 임신중단이 합법화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그 사건에 대한 글쓰기 사건으로 유예되었던 숙제를 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말미에 에르노는 자신의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79)이라고 단언한다. 즉 에르노의 글쓰기는 바로 그녀의 소수-되기, 여성-되기의 실천이자, 타인들을 되기의 블록으로 유도하여 연대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인 것이다.
『사건』을 쓰기 전 에르노는 1988년 러시아 외교관인 연하의 유부남과의 불륜 사건을 다룬 『단순한 열정』(1991)에서 주인공이 낙태수술을 받았던 곳을 방문한 에피소드로 그녀의 불법 낙태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어느 날 20년 전 그 사건의 장소를 찾아가는 일을 해냈다는 것은 “완전히 버려진 것을 되살려낸 일”(56)이며, 그것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같은 경험을 한 여자들과의 연대의식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녀는 밝힌다.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소외와 시련의 체험을 다시 직면해야하는 과거의 장소로의 방문과 이에 대한 글쓰기는 일상적 현실을 탈현실화한 “현재의 첨점”과 연결된 과거의 심연 속에 존속하고 있는 순수 사건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의미를 생성하고 새로운 삶의 분출을 찾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한 이 글쓰기는 다른 사람들을 같은 시도로 유도하는 유대감의 정치적 실천임을 시사한다.
2. 1960년대와 2020년대 여성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국가와 문화권력
자전적 글쓰기로 오토픽션이라는 모호한 장르로 분류되는 에르노의 이 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단순한 열정>(2020)과 <레벤느망>(2021)의 연달은 국내 개봉은 우연만은 아니다. <레벤느망>은 왓챠를 통해 2022년 3월에 먼저 개봉되었고, <단순한 열정>은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지만 에르노가 노벨상을 받고 난 뒤 2023년 2월에 일반 개봉되었다. 불륜 사건에 관심을 집중한 다니엘 아르비드의 <단순한 열정>은 원작의 낙태 장소 방문 에피소드를 다루지 않았지만, 두 영화의 원작들 모두 에르노의 불법 낙태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64년 3개월 동안 에르노의 임신한 몸과 낙태 경험에 대한 글쓰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뿐 아니라, 1960년대 시카고에서 12,000명의 임신한 여성들을 구한 실화인 ‘더 제인스’의 활동과 억압을 다룬 영화들도 2022년에 연달아 제작되었다. 티아 레신(Tia Lessin)과 엠마 필데스(Emma Pildes)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더 제인스>(The Janes, 2022), 그리고 필리스 나지(Phyllis Nagy)의 드라마 영화 <콜 제인>(Call Jane, 2022)이 선댄스 영화제에 공개되었고, 각각 202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과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경쟁 후보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콜 제인>은 최근 3월에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레벤느망>, <더 제인스>, <콜 제인>과 같은 1960년대 한 프랑스 여대생의 임신한 몸에 대한 공권력의 통제와 낙태, 그리고 불법 임신중단을 도운 미국 여성 ‘제인’들의 집단적 공조 실화에 대한 다시 보기를 시도한 영화들이 최근 연달아 개봉된 것 또한 우연의 사건은 아니다. 1973년 낙태권을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미국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1975년 낙태죄를 처벌하지 않는 법인 프랑스의 임신중절법(Loi Veil, 베일법 또는 베이유법) 통과로 여성의 성적 결정권을 국가가 간섭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낙태의 합법화가 실현된 것은 1960년대 불법을 감행한 용기있는 여성들의 연대와 공조가 이룬 성과라고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권력의 개입은 또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최근 트럼프 집권 때 구성된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낙태(임신중단)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50여 년 만에 낙태 보장권의 법적 근거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낙태의 합법화 문제는 세계적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필더스 감독이 제인들의 이야기를 트럼프의 시대가 왔을 때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듯이, 2022년 대법원의 판결에 앞서 개봉된 <더 제인스>와 <콜 제인>은 이러한 현실을 예견한 영화들로 볼 수 있다.
한국의 현실 역시 이러한 세계적 동향과 다르지 않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는 헌법정신에 위배된 법률이다’라는 판결을 내려 ‘낙태죄’로 불리던 형법을 2020년 말까지 유예기간을 두고 폐지하였다. 이에 형법으로서 낙태죄는 효력이 상실되었지만, 현행 모자보건법 조항은 여전히 개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국회에는 모자보건법 관련 개정안 뿐 아니라 형법 조항을 수정하려는 개정안을 포함하여 7건이 발의만 되어 있을 뿐 계류 중이다. 이와 같이 낙태죄의 위헌 판결 이후에도 아직 불법이냐 합법이냐의 논쟁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 입법은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말하고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더 제인스>가 “한국 관객들에게도 공감과 용기를 줄”, “동시대의 한국 여성 관객들에게 크게 공명하는 영화”로 202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특히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초미의 현행 국정과제로 부상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절충할 수 있는 방안 모색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임신중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윤리적 딜레마로 간주하고, 전통적으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그 딜레마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지양해야할 방안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에르노가 자신의 글쓰기를 “나와 같은 부류의 한풀이를” 위한 글쓰기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는 부류를 대변하는 정치적 행위의 실천으로서의 글쓰기를 의미한 것이다(『카사노바 호텔』 54).
사실 계류 중인 모자보건법 조항의 개정은 윤리적 딜레마로서 태아의 생명권보다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 존치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태아의 생명권은 형법상의 문제로 형법이 규정하는 생명권은 진통 시를 기준으로 태아가 사람이 될 때 갖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생명권은 그 이후에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아 상태에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에르노는 불법 낙태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즉 글쓰기를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유일한 죄책감”(79)을 느꼈으며, 그것을 지우기 위해 『사건』을 썼다고 밝힌다. 이러한 원작을 각색한 디완의 <레벤느망>의 OTT를 통한 개봉은1960년대 한 노동자 계급 출신의 프랑스 여대생의 용기에 지금 이 시대 그녀와 “같은 부류”의 여자들도 공명하고 있음을 그리고 서로의 연대와 용기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의적절한 사건이다.
3. 원작의 일인칭화자와 영화의 카메라 의식
원작자 에르노는 디완의 영화를 안에게 닥친 임신과 불법 낙태의 잔혹한 현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용기 있게 보여준 “진실한 영화”로 극찬을 했다. 원작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의 세부적 요인들을 찾아 메모하고 “반과거 시제”(32)를 사용하여 분석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괄호 속에 마치 지문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반추와 해설의 내레이션을 첨부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과거의 세계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기억과 연결된 먼 과거의 무언가”(34)에 붙잡혀 그 심연을 탐색하는 글쓰기임을 일인칭 화자는 수시로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카메라가 주인공 안의 일상을 따라가며 생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임신이 중지되고 학교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 무사히 졸업시험을 보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어떤 반박, 평가, 과장의 내레이션 없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녀의 일상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비극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소설을 영화로 매체 전환을 할 경우, 소설의 일인칭 화자는 <단순한 열정>에서처럼 보이스오버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처럼 카메라가 그 역할을 주로 대신한다.
시종 일관 안을 따라가는 이 영화의 카메라는 소설의 일인칭 화자의 관점과 의식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원작의 일인칭 화자는 과거의 사건을 떠올린다는 것, 그것을 쓴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삶을 다시 만났다는 감정이 드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며, 그 감정은 ”내가 거기에 다시 있었던 것처럼“이라는 표현으로 아주 정확하고도 자연스럽게 번역된다”고 괄호 속에서 첨언한다(41-42). 이 영화의 카메라는 바로 보존된 과거에 다시 있었던 화자의 존재와 역할을 대체한다.
원작의 화자는 용감하게 과거의 심연으로 진입하여 거기에 존속하고 있는 “과거의 시트” 속에 보유된 순수 사건을 다시 발견한다. 과거의 심연으로 연결된 현재의 첨점, 탈현실화된 현재의 첨점에서 일어난 이러한 발견은 “새로운 현실의 도약, 삶의 분출”의 발견을 의미한다. 원작의 화자를 대신한 이 영화의 카메라는 주 단위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안의 임신한 몸의 변화, 공포감, 시대를 역행하는 야만스러운 해결방법들이 모두 실패할 때마다 그녀가 겪는 혼란과 좌절, 그럼에도 반드시 끝을 보겠다는 확고한 결의에 따른 낙태 시술 등, 사건의 추이를 추적한다. 그리고 엔딩에 이르러 안을 쫓던 카메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보여주는 안의 건강하고 밝은 얼굴을 담는다. 이와 같이 이 영화는 원작의 화자를 대신하여 과거 사건의 장소로 돌아가 그 추이를 다시 목격하는 가운데 미래로의 탈주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정치적 또는 성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하는 카메라 의식을 창출한다.
4.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에 걸린 안의 투병
부모와 교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우등생 안은 사랑과 쾌락을 누리는 그녀의 몸이 남자들의 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안은, 학업이 부진했던 이유를 묻는 교수에게 대답하듯이, “여자만이 걸리는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 즉 여자를 재생산 활동, 임신, 출산, 육아, 가사노동을 하는 사적인 영역인 가정에 머물게 만드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원하지 않은 임신을 집에 있는 여자로, 젠더의 틀에 갇힌 여자로 만드는 병으로 간결하게 정의한 안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여성의 재생산권, 재생산 권리에 대한 국가와 문화 권력의 강압적 개입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아이를 낳기를 원하는 안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21세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논의 또는 논란의 이슈가 된 재생산권, 재생산 권리이다. 재생산 권리란, 최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가 제시한 정의를 참조하면, “차별·강요·폭력·사회적 낙인 없이 자녀를 가질지 여부와 시기, 방법, 자녀 수 등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사할 권리”를 의미한다.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안은 자신의 몸과 재생산 과정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선택을 한다. 카메라는 이러한 안의 선택을 잔인할 정도로 차분하게 추적한다.
주차별로 주말에 집과 학교를 오가는 안을 따라가며 카메라는 종종 그녀의 초조, 좌절, 불안의 얼굴을 프레임 속에 클로즈업으로 가득히 담곤 한다. 이러한 장면의 반복은 공부 잘하는 딸의 신분상승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가 속한 노동자 계급의 세계와 대학 친구들이 속한 그리고 자신도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중산층 세계 사이에 낀 경계인으로서의 안의 입지를 부각시킨다. 안의 경계인으로서의 입지는 지금 그녀가 처한 위기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킨다.
이 영화는 낙태라는 민감한 주제에 계급성의 문제를 중첩시켜 함께 다룬다. 따라서 이 영화는 출신 계급이 다른 안을 헤픈 여자로 따돌리는 올리비아(루이즈 슈비요트)를 비롯한 기숙사 친구들, 남자친구인 정치학 전공 막심과 그의 친구들 등과 안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감으로 사회적 문화적 권력에 의한 구별짓기, 즉 아비투스를 부각시킨다. 보르도에 막심과 함께 휴가를 보내러 간 안이 그와 그의 중산층 친구 커플과 어울리는 대신 혼자서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해 멀어져 가는 가운데, 물살이 세니 멀리가지 말라며 따라오는 막심에게 저리가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는 장면은 그 거리감과 아비투스를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임신한 안의 출신 성분과 거리감을 의식한 그녀의 수치심보다는 오히려 성적 금기와 위선적 도덕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안의 당당함과 이러한 안에 대하여 느끼는 체제 순응적인 중산층 출신 막심이 느끼는 위협감과 질투심을 드러내 보이는 극명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순응적인 부르주아적 관점”(46)을 가장 구체적으로 대변하는 부류는 임신한 안의 몸에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성세대 의사들이다. 안의 임신을 진단하고 임신확인서를 보낸 의사는 딸의 교육과 장래에 대한 안의 어머니의 열성을 높이 사는 가족 주치의로 그녀의 처지를 안타까워는 하지만 결코 낙태를 도와주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보인다. 안이 낙태의 도움을 얻고자 찾아간 의사는 그녀가 대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자신들이 속한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평범한’ 계층의 훌륭한 학생”(73) 안에게 “은밀한 공모”의 호감을 보인다. 그러나 안이 낙태를 요구하자 태도를 바꾸며 생리를 하게 하는 약이 아니라 태아의 건강을 위한 약을 처방해주면서 그녀를 배신한다.
안이 찾아간 의사들은 돈도 연줄도 없는 여자,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31) 그녀를 죽게 방치하는 낙태법을 위반해서 모든 것을 잃고 싶지는 않고 차라리 그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못할 정도로 위선적이다. 막심이 안이 혼자서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듯이, 이들 또한 결국 그녀가 알아서 해결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아는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택권은 당사자 안에게는 없고, 사회가 갖고 있으며, 모든 잘못과 책임은 선택권을 박탈당한 안에게 있다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5. 안의 해방 일지
사실 안을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안과 친한 친구, 가족, 또는 막심이 아니다. 전혀 친분이 없는 또는 그녀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안이 불법낙태를 결심하고 제일 먼저 도움을 청한 사람은 여자애들을 많이 알고 있는 남학생 장(케이시 모테트 클라인)이다. 그는 안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임신 걱정이 없는 안전한 섹스를 안과 즐기고 싶은 욕구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래도 주변 다른 위선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안을 도와줄 불법낙태경험이 있는 여자를 연결시켜준다. 안에게 본인이 체험한 것 그리고 도울 수 있는 모든 도움을 기꺼이 제공해준 이 여자는 시카고의 제인을 연상시킨다. 그녀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파리의 불법임신중절시술사와 약속을 잡고나자 마침내 도와줄 사람을 구한 안은 일단 안도감을 느낀다.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안은 친구들이 “금지당한” 것에 대한 욕구의 억압으로 인해 거칠게 자신에게서 떼어놓았던 소방관과 자기 주도적인 섹스를 한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유일한 섹스 장면이다.
12주차 파사주 카르디네에 있는 낙태시술소를 찾아가는 안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골목 계단을 내려가는 안의 뒷모습에 포커스를 맞춘 채 골목은 아웃포커싱을 하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 담고 있다. 이러한 기법으로 카메라의 의식은 안의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에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포착한다. 안이 찾아간 파리의 간호조무사로 불법 임신중절시술을 하는 여자(아나 무글라리스)는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냉철하게 1차 시술, 그리고 실패하자 모든 것을 건 2차 시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안에게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다.
안을 도와준 가장 뜻밖의 인물은 안을 헤픈 여자로 몰았던 올리비아였다. 아마도 그녀가 종교와 부르주아 신념을 따랐다면 안을 돕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차 시술 후 기숙사에 돌아온 안이 밤에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의 곁에서 임시산파역할을 해 준 사람은 바로 올리비아였다. 탯줄을 자른 후 심한 하혈로 의식을 잃어가는 안을 위해 의사를 부른 것도 그녀였다. 카메라는 심하게 흔들리며 들것에 실려 나가는 안과 어둠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기숙사 학생들을 비추다, 병원에 도착해서 수술실 밝은 불빛을 그리고 “뭐라고 적을까요?”라고 묻는 물음에 “유산”(낙태가 아니라)이라는 의사의 목소리에 안도의 숨을 쉬고 안이 의식을 잃은 뒤 몇초간 공백의 흰 스크린을 보여준다.
그리고 7월 5일 서서히 눈부신 태양 아래 새소리와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캠퍼스를 걸어가는 안의 뒷모습을 화면 정중앙에 잡고 따라가는 카메라는 강의실에 들어가 그녀를 도와준 친구들과 함께 착석해서 위고 시를 문제로 졸업시험 답안지를 열심히 쓰는 안과 그녀의 펜 소리로 엔딩 장면을 담는다.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나고 다시 강의실에 돌아온 안의 평온하고 빛나는 얼굴은 이제 교사가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이 영화는 소설의 일인칭 화자의 내레이션을 시각적 이미지로 포착하여 보여주는 카메라 의식을 창출함으로써 안의 투병과 해방 일지를 전개한다.
6. 21세기 여성의 재생산권과 출산정책의 새로운 방향성
20세기 국력 과시의 경쟁이 주로 우주탐험에서 일어났다면, 21세기 기술과학시대는 그 경쟁의 장을 마지막 프런티어인 인간의 재생산 영역, 특히 여성의 몸, 자궁으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여성의 몸은 국가와 문화권력뿐 아니라 21세기 국가경쟁력의 지표 향상을 위해 이중의 식민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식민화와 더불어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의 가속화된 저출산 현상은 2022년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떨어질 정도로 심각하다. 이에 다각적으로 실효성 있는 정책 모색과 추진이 긴급하게 요구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건은 여성들의 재생산권 확보 이슈이다. 아이를 낳는 사람은 여성이며 또 우리 사회에서 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여성이다.
이 영화가 용기 있게 보여주는 1960년대 안이 경험해야 했던 여성의 몸에 자행된 공포스러운 일들의 충격적인 장면들이 시사하는 잔혹한 현실을 21세기 여성들 역시 여전히 직면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다. 이에 국가의 출산정책은 일단 여성의 재생산권 확보 문제를 우선 순위로 하여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원작자 에르노, 원작의 화자, 각색영화의 주인공 안이 주장하는 것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 성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권익을 위해 자신의 몸과 재생산 과정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이다. 원하지 않은 임신과 낙태라는 사건을 경험한 이들은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국가와 문화권력의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며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스스로 행사하고자 하는 욕망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재생산 정치성에 대한 개입을 의미하며, 이들의 글쓰기는 바로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데 이바지하는 정치 행위인 것이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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