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감독이 근 10년만에 장편 상업 영화로 돌아왔다. 제목도 죽인다. <킬링 로맨스>(2023). 충무로 데뷔작 <남자 사용 설명서>(2013)에서 기존에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이른바 'B급 병맛 코드'를 성공적으로 상업화했기에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펼쳐 놓을까 개인적으로 기대감이 컸다. 그렇게 참석했던 언론 시사회. 예상대로 극장 내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그러다 영화 속 위기일발의 상황 가운데 절벽에서 타조가 훨훨 날아오르자 한쪽에서는 웃음 소리가, 다른 한쪽에서는 한숨 소리가 묻어났다. 참고로,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박장대소한 관객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탄성과 한탄을 오가게 만드는 문제의 이야기는 한 여배우의 일탈에서 비롯된다.
톱스타 여래(이하늬)는 발연기로 구설에 오르자 자신을 향한 비난일색의 현실을 벗어나 남태평양 콸라섬으로 떠난다. 거기서 운명처럼 만난 재외동포 조나단(이선균), 줄여서 존나(John Na). 그렇게 여래는 존 나와 결혼 후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 학벌 풍년인 집안에서 홀로 서울대 입시에 실패한 채 고군분투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존 나의 인형 역할에 신물인 난 여래는 연예계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렇게 존 나를 상대로 이 둘의 '푹쉭확쿵' 아찔한 작당모의가 시작된다.
<킬링 로맨스>에 반영된 이원석만의 작가적 상상력에는 어설픈 현실 재현의 강박 따위는 없다, 마치 영화 속 타조처럼 하늘로 날려버린 듯이. 그래서 잔뜩 힘만 준 채 기존의 장르적 법칙만 답습하는 여느 상업 영화들보다 오히려 더 담백하고 통쾌하다. 거기다 노포 이발소에나 걸려 있을 법한 국적 불문의 풍경화 같은 키치적 미장센은 구전설화나 전래동화처럼 비현실적인 <킬링 로맨스>만의 세계관을 더욱 견고히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계적인 미인대회와 미국배우조합이 인정한 이하늬와 이선균이라는 'A급 톱스타'에게 덧씌운 'B급 병맛 코드'는 그 자체가 이 작품의 장르성을 대변한다. 첨언하면, 이하늬는 이 영화에서 그동안의 연기 커리어로 응축된 코믹 연기를 능청스럽게 잘도 해낸다.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킬링 로맨스>는 코미디 영화의 장르적 미학인 '충돌'을 거침없이 폭발시키며 관객들에게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과연 이 정도면 이원석 감독은 'B급 병맛 코드'의 주류라 할 만하다. 이름하여 B주류.
<남자 사용 설명서>에서 구축된 이원석만의 세계관은 <상의원>(2014)으로 잠시 방향을 틀었으나 왠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이원석다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그 사이 한국 영화는 세계 영화 시장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나 그런들 뭘 하랴? 한국영화사가 100년이 넘도록 여전히 헐리우드의 <록키 호러 픽쳐 쇼>처럼 회자되는 괴짜영화 하나 없는 판국에. 이는 영화의 만듦새나 작품성을 떠나 한국영화 시장의 다양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무로의 천편일률적인 장르적 상상력에서 이미 저만치 벗어나 뚝심있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킬링 로맨스>의 이원석이 더욱 반갑다.
무엇보다 영화가 좀 병맛이면 어떠랴?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신문의 정치면, 사회면, 산업면 등을 늘상 채우고 있는 우리의 현실 사회 자체가 뒤죽박죽 병맛인 것을.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킬링 로맨스>는 그러한 병맛 사회를 더욱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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