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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불온한 꿈에 대하여
스티븐 스필버그의 불온한 꿈에 대하여
  • 정우성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28 1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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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

“영화는 꿈이야,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꿈.”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 온 어린 새미(가브리엘 라벨 분)가 영화라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자, 그의 엄마인 미치(미셸 윌리엄스 분)는 최면을 걸듯 부드럽게 말한다. 불안에 떠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한 말 치곤 매우 의미심장한 이 대사는 마치 관객들에게 조심히 건네는 밀어 같이 들린다. 앞으로 펼쳐질 <파벨만스>(2022)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한 개인의 내밀한 사적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으로서 매체에 대해 말하는 자기반영적(self-reflexivity)인 영화가 될 거라는 속삭임 말이다.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라면 극장을 나와 미치의 속삭임을 떠올리며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란 정말 꿈인가? 만약 ‘영화’가 꿈이라면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진 <파벨만스>는 어떤 종류의 꿈인가? 어린 새미가 <지상 최대의 쇼>(1952)의 기차 전복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을, 장난감으로 재현한 영화를 만들어 극복한 것처럼 <파벨만스>를 통해 스필버그가 성장기에 겪었던 상처의 기억을 치유하기 위한 꿈일까?

자전적이라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영화 외적인 정보다. 감독 개인이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을지는 관객이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정확히 답할 수는 없다. 대신 영화라는 꿈을 활용해 기차 전복 장면을 더 이상 무섭지 않을 때까지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주체가 어린 새미가 아니라 미치라는 사실에 따라, 질문에 대해 다른 접근을 해볼 수 있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

<파벨만스> 안에서 ‘영화’가 무엇이라 정의하는 인물은 항상 주인공인 새미가 아닌 미치다. 그녀에게 ‘영화’는 꿈이며, 그 꿈을 통해 현실의 충격을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런 정의가 영화를 직접 만드는 새미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 정말 맞는 것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어린 새미가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난 뒤 충격에 빠진 것은 맞지만, 그 충격이 두려움이라는 판단은 어른의 시선일 뿐이며 실은 흥분과 매혹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기에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이미지에서 받은 두려움 혹은 매혹을 모방해 재현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새미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보고 난 뒤 <건스모그(Gunsmog)>를 만들고, 아버지의 2차 세계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도피할 수 없는 탈출(Escape to Nowhere)>을 제작하고, 가족들의 행복한 캠핑의 순간을 홈 무비로 재구성한 것은 바로 그런 욕망의 발현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을 만들 때마다 느끼게 되는 당혹감은 자신이 모방해 재현한 영화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마인 미치가 한 말과 달리 ‘영화’가 온전하거나 안전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온다. 예컨대 <건스모그(Gunsmog)>를 만들며 새미가 “완전 가짜(Totally Fake)”라고 탄식을 내뱉은 것을 바꿔 말하면, 영화가 그럴듯한 허구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허구임이 드러난 완전 사실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것을 연출이나 편집과정에서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어느 정도 성공하지만, 자신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구멍이 항상 발생하고 매번 당혹감에 빠진다. <도피할 수 없는 탈출(Escape to Nowhere)>의 주연배우가 허구의 상황 안에서 진심으로 현실인 것처럼 슬퍼하거나, 파벨만 가족의 캠핑 홈 무비가 아무리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연출한다고 해도 미치와 베니(세스 로건 분)의 불륜 때문에 가정이 붕괴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가 꿈이라면 끊임없이 현실이 침입해 들어오는 불완전한 꿈이며 완벽한 환영도 사실도 아닌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번민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란 안전한 꿈이라 속삭이던 엄마와 아빠의 말을 믿던 새미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영화’가 꿈이라는, 통제의 도구라는 단언은 어디까지나 미치의 믿음일 뿐이다. 미치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했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손을 보호하기 위해 일회용 접시와 식기를 사용하는 인물이다. 도식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녀는 지평선의 바닥에도 꼭대기에도 있지 않은, 가운데의 인물이다. 예술은 도달하지 못할 꿈과 같고 현실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때문에 미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중얼거린다. 정말 그래서가 아니라, 그렇다고 믿어야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을 견딜 힘이 생기기에 그렇게 되뇌는 것이다.

 

사자에게 물리지 않는 방법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새미는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성토하는 동생 레지(줄리아 버터스 분)에게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라는 엄마의 말을 언급하며 빈정거린다. 그때 레지는 가족이 붕괴하는 순간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영화를 편집하는 새미를 향해 엄마와 가장 비슷한 것은 너라고 지적한다. 엄마가 결국 자기 행복을 위해 이혼을 선택하고 베니에게 간 것처럼 새미 또한, 보리스(주드 허쉬 분)의 예언적인 말과 같이, 예술이 가족과 자기 가슴을 찢어놓을지라도 마약 중독자처럼 영화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전과 같이 잘못된 믿음을 따라 영화를 통제 가능하고 안전하며 이유가 있는 꿈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자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는 용기로 공포와 매혹 사이에서 맹수가 자기 머리를 물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행한다.

<땡땡이의 날(Ditch day)> 상영 시퀀스는 그런, 맹수가 물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곧 예술이라고 명명했던 보리스의 말을 가장 잘 드러낸 장면이다. 새미는 자신에게 학교폭력을 저지른 두 인물을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로건(샘 레츠너 분)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영웅처럼 묘사하고, 채드(오크스 페글리 분)는 그가 멍청하게 행동했던 장면들만을 모아 바보 같은 인물로 연출한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로건은 자신을 전교생 앞에서 미화한 것에 분노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새미에게 자신은 영화 속에 인물과 같지 않다고 힐난하며 왜 그런 편집을 했는지 묻는다. 새미는 있는 그대로를 내보냈을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로건은 거짓말이라 반박하며 되묻는다. 그때 새미는 극도로 흥분해 대답한다. “단 5분이라도 날 좋게 봐줬으면 하는 바람인지, 그저 영화가 잘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인지 나도 모르겠다.”

둘 중 무엇이 새미의 마음일까? 그가 스스로 모른다고 한 것처럼 정확한 이유는 알 순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새미가 영화의 완성도를 위한 최고의 선택을 하려 했다는 것과 그 선택이 자신에게 폭력을 저지른 로건을 미화하고 있으며 같은 가해자인 채드를 바보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이유가 됐든 새미는 맹수가 자기 머리를 물지 않게 만들었다. 마치 어린 새미의 장난감 기차가 더 이상 부서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미치와 로건 간의 구조적 유사성은 미치가 새미와 기차 충돌 영상과 캠핑 홈무비 푸티지를 볼 때 둘만의 비밀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로건도 자신이 운 사실은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강조된다. 그렇다면 영화는 미치와 로건의 에피소드를 서로 마주 보는 거울상의 이미지처럼 놓으면서 미치의 말대로 ‘영화’란 현실의 충격과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한 꿈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땡땡이의 날(Ditch day)>과 파벨만 가족의 홈무비 푸티지는 어린시절의 기차 충돌 영화와 달리, 온전히 허구의 대상인 장난감을 촬영한 것이 아닌 현실의 인간을 촬영한 것이다.

원형의 레일 위를 달리는 장난감이 어린 새미의 얼굴로 폭주해 부딪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지만, 전교생 앞에서 바보가 된 로건과 채드, 이혼을 앞둔 미치와 버트(폴 다노 분)라는 현실 속 인간의 마음은 정해진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영화는 서커스가 아니므로 사자에게 물리지 않는 완벽한 방법 따위는 없다. 그저 최선을 고민할 뿐이다. 나에게 폭력을 가한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고 더 한 괴롭힘의 위협을 무릅쓰고 오로지 예술에 대해 고뇌하는 더럽고 고통스러운 작업인 것이다. 

때문에 로건은 새미에게 위험하게 산다고 말하며 인생은 영화가 아니라고 충고한다. 그러자 새미는 아닐지도 모른다며 그가 영화 덕분에 클라우디아(이자벨 쿠스만 분)를 얻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지만 영화의 환영적이고 최면적 효과로 현실을 바꾸어 놓은 이 기이한 결과가 말하는 것은 ‘영화’란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매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끝에서 존 포드(데이빗 린치 분)가 새미에게 예술에 대해 질문하며 벽에 걸린 그림 속 지평선의 위치를 묻는 것을 떠올려보자. 포드는 지평선이 바닥에 있거나 꼭대기에 있을 때 흥미롭고 가운데 있으면 최악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로우앵글과 하이앵글의 차이에서 오는 극적 효과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경계로 하는 지평선의 위치를 묻는 것의 요지는, 꿈(하늘)과 현실(땅) 사이에서 번민하는 새미에 대한 은유이자 사실적인 것과 환영적인 것 양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영화’의 본질을 건드리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불온한 꿈

결국 <파벨만스>에서 말하는 ‘영화’란 미치가 말한 대로 실을 묶은 패를 던졌다, 다시 끌어들이면서 현실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안전한 놀이가 아니라 <지상 최대의 쇼>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버트의 참전 경험을, 자신의 기억과 과거를 모방하고 변주하고 베끼면서 현실을 착취하고 환영에 취하게 되는 예술이다. 만약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면, 로건이 자신과 있었던 일을 비밀이라 강조할 때 영화로는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새미가 음침하게 중얼거린 것, 부모의 이혼으로 혼란스러운 가족의 상황에서 그것을 촬영하는 새미 자신의 환영을 보는 것과 같이 보리스와 포드의 말대로 스스로를 찢어버리는 불온한 꿈이다.

이런 불온함은 이 성장담의 후반부가 아닌 시작부터 은밀하게 나타나 있었다. 어린 새미는 <지상 최대의 쇼>를 보며 그 많은 화려한 장면 중 기차와 자동차가 부딪치고 사람들이 다치는 순간에 매혹을 느낀다. 불꽃을 튀기며 날아가는 차체와 전복돼 나뒹구는 열차와 사람들, 동물들의 혼란스러운 광경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지만 자신이 하는 행위가 명백히 잘못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비밀스럽게 그것을 재현한다. 파괴되고 부서지는 사고의 단면들을, 빛을 어둠 속에 숨어 반복해서 보기 위해 말이다. 마치 관객들처럼, 한 개인의 내밀한 고백 혹은 붕괴한 가족의 슬픔과 고통, 폭력의 이미지들을 탐닉하는 것과 같이 1초에 24장의 환영을 본다. 

당연히 현실에서 받았던 어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때문에, 매혹하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불온함과 양면성이 스필버그가 또는 <파벨만스>가 자전적으로, 자기반영적으로 ‘영화’와 삶에 관해 고백하려는 어두운 단면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계 최고의 감독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게 될 감독 지망생에게 조언하는 신화적이지만 유머러스한 농담 같은 장면으로 마무리 짓는 것 또한 스필버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꿈의 공장들의 삭막한 거리 위로 난 하늘과 바닥에 놓인 지평선을 비추며 말이다. 

 

 

글·정우성 
2021년 영화평론가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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