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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재앙을 뒤집는 일종의 합의 <화이트 노이즈> (2022)
[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재앙을 뒤집는 일종의 합의 <화이트 노이즈> (2022)
  • 이하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5.0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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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집단의 응집과 흩어짐을 현미경을 통해 보듯 미세하게 관찰하는 <화이트 노이즈>(2023)는 돈 드릴로의 장편소설 『화이트 노이즈』를 원작으로 삼는다. 영화는 3개의 챕터로 나눠진 소설의 형식을 차용하는데, 언뜻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구성은 3부에 이르러 촘촘한 얼개를 이룬다. 1968년, 미국의 평범한 백인 중산층 가족에서 살아가는 잭(애덤 드라이버)은 15년간 아돌프 히틀러를 연구한 교수다. 어느 날, 발생한 기차와 유독가스를 실은 탱크차의 추돌은 대기를 검게 뒤덮으면서 잭의 가족을 재난의 중심지로 몰아넣는다. 그와 동시에 아내 바벳(그레타 거윅)이 먹는 정체 모를 약은 잭에게 내부의 혼돈 역시도 재난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전작인 <프란시스 하>(2014)에서의 불완전한 개인, <결혼 이야기>(2019)의 파경을 맞아 분열된 가족은 <화이트 노이즈>에서 가족을 토대로 외부의 재난의 끝나지 않는 랠리가 선을 뛰어넘어 사회로 확장된 셈이다.

 

이미지의 기만과 폭력성

이미지가 지닌 암시는 대중을 어디로 몰아넣는가. 영화의 오프닝에서 잭의 동료 교수, 머레이(돈 치들)는 강의 중, 학생들에게 할리우드 영화의 차량 폭파신이 지니는 스펙터클의 실상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학생들의 눈은 교수의 말보다 영상으로 향하며 한곳만을 응시하게 된다. 매체 속의 이미지가 지닌 효과는 대중들의 머리에 각인되어서 사유할 시간을 줄이고 지나치게 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하나의 문화 산업으로서 대중의 사유 능력을 도구화함으로써 적극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위축시킨다고 말했다. 즉 대중문화는 대중의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배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개인의 독자적인 생각을 잠정적으로 잠식해버리는 TV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성들과 이미지는 사유를 통과하여 각인된다.

각각의 캐릭터가 맡은 역할은 공교롭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상술했듯 잭은 15년간 히틀러를 전공으로 연구해온 교수이며, 아내 바벳은 생활체육을 가르친다. 하물며 잭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습득한 정보를 상대에게 늘어놓기 바쁘다. 때문에 집 안은 소음으로 가득 차오른다. 잭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히틀러를 전공했으나 독어를 못해서 과외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학생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테다. 학생들의 중앙에 서서 강의를 하는 교수 잭과 머레이의 시퀀스는 가히 놀랍다. 신도들에게 신앙을 전도하듯, 두 교수는 각각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힘겨루기를 한다. 교차편집으로 삽입된 연기를 뿜으며 달려오는 기차와 유독가스를 실은 탱크차는 교수들의 힘겨루기가 길어질수록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군중 속의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 푸티지 역시 환호성에 힘입어 충돌에 박차를 가한다. 두 교수의 언어가 충돌하는 행위의 말미에는 기차와 탱크차가 추돌하는 이미지로 종결된다. 학생들의 박수소리와 연결되는 트럭과 기차의 폭발은 합체된 언어와 이미지가 흘린 질펀하고 끈적한 연료의 피처럼 보이도록 하는데, 심벌이자 우상을 바라보았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상황은 무대 위의 교수들의 강연 행위가 지닌 폭발적인 상황과 병치된다. 

그렇다면 왜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리일까. 세대의 기운이 새겨진 인물이자 군중들이 환호했던, 한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콘이라는 점이 그 이유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히틀러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결하는 지점에서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연 전쟁의 독재자와 1950-60년대 주류 미디어들이 천박하다고 경멸한 로큰롤로 대중음악을 선도한 가수 사이에서 묘한 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인종분리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백인의 컨트리 음악과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결합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열정과 저항의 상징이었던 엘비스는 몸을 움직이고 흔들면서 앉아있던 관중들을 일어나도록 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엘비스 프레슬리는 20세기 위대한 문화적 힘이다.”라며 대중들이 열광한 당시의 상황을 언급했다. 반면 히틀러는 어떤가. 군중이 모여든 상황은 같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함은 그 성격을 판이하게 다르게 만들었다. 혐오에 불을 붙인 무대 위의 지도자와 함께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창궐했다. 어쩌면 감독은 전쟁에서의 군중과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군중 사이의 유사함에서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다들 그 군중 속에 있어 봤잖아.”라며 잭은 군중 안에서의 확증 편향이 초래한 비극과 그 군중의 틈에서 벗어나는 것의 공포를 언급한다. “군중에서 떨어져 나온 자”는 잭의 말에 따르면 죽음과 가까워질 확률에 높은 자다. 대다수의 의견에서 비껴가 테두리에 위치하게 되면, 문화나 시대의 정신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말과 현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군중들 

영화는 독성물질로 인해 발현한 재난과 가족 내의 재난을 병치시킨다. 챕터 2 ‘공기 중 독성 물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은 다량의 출처 없는 정보들을 생산하게 된다. 대피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부부의 네 명의 자녀 중 맏아들 하인리히(샘 니볼라)의 말에 동요하지 않던 잭은 거리를 모두 비운 한산한 풍경에 피난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외부로 향했던 잭의 시선은 자동차 안에서 아내 바벳이 정체 모를 알약을 삼키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이는 딸 데니스(라피 캐시디)가 지속적으로 언급한 정체 모를 실체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으로 작용한다. 자칫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는 챕터들은 재난의 무자비한 혼란 속에서 뒤섞이기를 반복한다. 

사회의 재난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보들로 인해 정보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고 일종의 선동성을 함유한다. 집 안에서 가족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던 하인리히는 대퍼딜 캠프의 중심에 서서 독성물질이 발생한 경위에 대해 설명한다. 군중을 아래에 둔 일방향적인 소통은 마치 교수인 잭과 데칼코마니처럼 유사해 보인다. 10초 이상 노출된 사람들은 격리시키는 캠프의 직원들은 출처 없는 정보에 종속되어 지시를 내린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10초 이상 노출된 잭은 이때부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 독극물이 접근한다는 말 한마디에 대피하거나 안심하는 군중의 이상 행동은 무의식적인 세뇌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에서 멀어지게 한다. 분명 잭은 히틀러를 연구하면서 군중심리에 대해 연구를 했음에도 재난 상황에서 무력하게 대처한다. “나 이거 해봤어.”라고 중얼거리는 잭의 음성은 데자뷔라는 희미한 잔상으로 치환된다. 꺼진 TV를 들고 군중 안에서 이 사건이 뉴스로 보도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려는 사람들 앞에, 한 명의 청중이 된 잭은 꺼진 TV에 반사되며 다시 중얼거린다. “전에 이거 본 적 있는데.”

공기 중에 퍼졌던 비극의 씨앗은 이제 가족 안에서 그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잭이 반복적으로 들은 이상한 약을 먹는 아내 바벳에 대한 말은 구체적으로 실체화된다.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신문의 신약개발 광고를 본 바벳은 ‘다일라’라는 신약의 생체실험에 참여하게 되고 마약처럼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의 효능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재워준다는 것. 죽음 대신 기억이 지워진 바벳은 말과 현상을 구분 짓지 못하게 된다는 약의 실체를 알고도 끊어내지 못한다. 말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정한 언어로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현상과 일치시킨다. 말과 현상이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서 분리된다는 것은 바벳이 말한 “비존재라는 상태”에 도달하도록 한다. 그것은 사회의 거시적 재난과 가족의 미시적 재난이 포함하고 있는 실체 없는 공포가 가진 특성과 결합된다. 신약 개발자 미스터 그레이를 찾아간 잭은 바벳이 말한 단서인 TV의 꺼진 화면 위로 아내와 남자의 정사 장면을 상상하고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총을 발사한다. 앞서 재난 상황에서 비친 잭의 TV 속 얼굴과 겹쳐지는 꺼진 이미지는 이미지가 소거된 상태가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있음을 말한다. 초반부 시끄럽고 어수선하던 소리는 점차 가라앉고 북적대던 이미지들은 잔잔해진다. 

총에 맞은 미스터 그레이를 치료하기 위해 잭과 아내 바벳은 병원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수녀들을 만나게 된다. 실체 없는 신앙심에 대해 묻던 잭의 물음에 수녀는 “누군가는 믿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라며 신이 없는 자리를 희망으로 메운다. 재앙만이 흩뿌려진 잔해들 속에서 희망을 발굴하는 일은 공간에 진입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일종의 합의”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것. 노아 바움백 감독이 <화이트 노이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지점에 있다. 영화의 엔딩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마켓에 다시 진입하는 가족들을 비춘다. 대량의 생산품들이 진열된 미로처럼 넓은 마켓에서 각자의 물건을 계산하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합의된 모습처럼 보인다. 영화의 제목인 ‘화이트 노이즈’는 출력이 무한대이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잡음을 말한다. 어쩌면 감독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반응하는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데자뷔 같은 지난한 역사처럼 희망 역시도 보이지 않더라도 믿도록 하는 일종의 합의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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