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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희의 문화톡톡] BL, 낭만적 사랑의 서사 콘텐츠
[한유희의 문화톡톡] BL, 낭만적 사랑의 서사 콘텐츠
  • 한유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05.0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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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고도 낯선 장르

BL. Boy’s Love의 약자로 익숙하지만 낯선 장르다. 물론 웹소설과 웹툰을 즐겨 읽는다면 익히 알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낯설고 부담스러운 위치를 점하고 있다. 최근 여러 OTT에서 BL 영상 콘텐츠들이 제작되고,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언론에서 요사이 주목하고 있지만 사실 BL의 역사는 길다.

BL의 기원은 일본에서 유입된 야오이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확한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으나 한국에서는 PC통신을 통해 90년대 초중반부터 야오이 작품에 관한 정보가 공유되었고,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만화와 소설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만화는 동인지의 영향으로 기존 작품의 2차 창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소설은 1세대 아이돌 그룹인 H.O.T.와 젝스키스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팬픽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팬픽은 물론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도 있었으나, 유명세를 얻어 지금까지 회자되는 작품은 대부분 그룹 안의 멤버들을 커플로 맺은 동성애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많다. 즉 아이돌을 경유하여 BL의 기본적인 문법을 학습하여 BL에 대한 장르를 이해하는 독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재의 BL의 기본적인 외형이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팬픽 뿐만 아니라, 야오이 소설로 일컬어지던 작품들은 동성애물이자, 고수위의 성애 표현을 이유로 폐쇄적인 공간인 성인동(마유동, 야밤동 등등)에서 향유되었다. 이후 복잡한 사건들이 얽히면서 야오이 소설이라고 불리던 작품들은 BL이라는 장르로 통용되고 연재처는 ‘조아라’와 같은 여성 독자가 다수인 공개적인 플랫폼으로 점차 옮겨온다. 현재는 대부분의 콘텐츠 플랫폼에서 BL 장르를 메인 페이지에서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수도 많아지고, 소비층도 두터워졌다.

물론 조금 더 명확하게 파고들자면 각각의 연재처에 따른 차이점이 있고,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개괄적으로 BL이 2차적 문화의 부산물로 시작하였고, 마니아틱한 성향을 기조로 한다는 점이 BL 문화의 기본적인 성격이다.

 

다양한 웹툰 플랫폼에 BL작품들이 연재되고 있다.

낭만적이고도 다양한 사랑의 서사

사실 BL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다. 남성끼리의 사랑이라는 금기는 사랑의 ‘방해물’이다. 따라서 BL의 사랑은 이성애의 사랑보다 더 큰 장애를 이겨내야만 하는 완전한 사랑으로 치환된다.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경이야말로 절대적인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소재 아니던가. 낭만적 사랑이 상실되었다는 작금의 현실에서 BL은 절대적이며 환상적인 사랑의 서사로 작동한다. 서로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으로 금단의 조건들은 해금될 수밖에 없고 낭만적인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장르만으로도 BL은 낭만적 사랑을 전제로 한다. 또한 이러한 낭만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서사를 확장시킬 수 있다.

물론 왜 굳이 BL에서 낭만적이고도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찾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을 것이다. 로맨스 장르나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도 전제되는 것이 바로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맨스와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는 기본적으로 ‘이성애’를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BL에서의 ‘금기시된 관계’라는 설정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장르보다 더 큰 방해물로 작동한다. 두 번째는 거리감을 통한 안정감이다. 이성애의 관계와는 달리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완벽하게 대입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통해 피폐물에 해당하는 작품에서도 부담이 덜 하다. 또한 고수위의 성애 표현에서도 훨씬 더 대담한 표현들이 용인되기 쉽다. 세 번째는 이성의 관계에서는 절대 역전될 수 없는 관계가 BL에서는 가능하다는 점이다. 흔히 ‘공’과 ‘수’라는 관계로 일반적인 성애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공’과 ‘수’로 한정 짓지 않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이런 대표적인 특징들을 통해 BL은 제약이 있기에 오히려 더 제한이 없는 낭만적 사랑의 서사들을 확장시킨다.

 

오메가 버스, 단순한 재현 혹은 새로운 탈출구

흥미로운 것은 BL의 하위 장르에서 오메가버스 장르가 지속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점이다. 오메가버스라는 생소한 장르는 성별은 존재하지만 알파, 오메가, 베타라는 형질에 의해 임신이 가능하다는 세계관을 지닌다. 베타는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고 알파와 오메가는 특수 형질로 서로에게 성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페로몬’이 있으며 서로에게 각인할 수 있기도 하다. 특히 발정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겪는다는 설정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이런 오메가버스 장르는 크게 다섯 가지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첫째, 임신 출산 육아와 같은 여성이 겪는 상황을 투사한다는 점이다. 둘째, ‘페로몬’을 통해 운명적인 사랑을 이룬다는 것, 혹은 반대로 ‘페로몬’의 기본 조건을 거스르면서 사랑을 쟁취한다는 점이다. 셋째, 발정기로 인해 제어되지 않는 성욕과 성애를 통한 엄청난 쾌락을 얻는 점이다. 넷째, 각인이라는 행위를 통해 서로를 ‘평생’ 함께할 수 있는 반려자로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알파는 공이며 오메가는 수라는 관계가 일반적인 설정이지만 간혹 역전되는 경우로 얻는 재미가 있다는 점이 있다.

다섯 가지의 조건 모두가 여성의 상상력에서 창작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출산율로 익히 알 수 있듯, 임신·출산·육아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따라서 임신·출산·육아의 이야기는 오히려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남성이 출산하여 겪는 에피소드는 여성인 독자에게 훨씬 부담이 덜하다. 특히 두 번째부터 네 번째의 조건은 더욱 낭만적인 이야기로 작동할 수 있는 금지 조건이자, 운명적 사랑의 조건으로 작동한다. 서로의 페로몬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는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혹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알파-오메가로 발현된다는 조건을 설정할 수도 있다. 또한 알파-오메가가 기본적으로 짝이 되지만 ‘페로몬’에서 벗어난 베타와의 관계에서 더 큰 사랑을 느낀다는 설정을 통해서 오히려 당연한 조건을 거스르는 더 큰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페로몬에 의한 발정기는 이지를 잃고 동물적인 성욕과 성애의 쾌락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섹슈얼리티가 강조된다. 성적인 욕망과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서로에게 각인을 통해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는 설정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가장 결정적인 조건으로 작동한다. 특히나 보통 독자들은 ‘수’에 해당하는 오메가의 입장에 대입하기 쉽기에 당연시되는 관계가 전복될 때,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메가버스 장르는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이기도 하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여성 독자들에게 불편하다는 평가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BL장르에서 이러한 설정이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여성들은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자유롭게 내면의 욕망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원한 사랑, 운명적인 관계, 이지를 잃고 쾌락만을 좇는 성애, 행복한 가정이라는 현실에서 어려운 이야기를 오히려 가장 현실성 없는 세계관 속에서 대리로 실현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BL이되 BL이 아닌

BL은 여성서사이자 여성서사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BL은 어떤 장르보다 여성의 욕망이 구체적이고 다각화된 콘텐츠라는 점이다. 창작하는 사람도 이를 소비하는 사람도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지속적으로 BL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BL은 충실하고도 공고한 독자층을 지니고 있기에 재매개 또한 활발히 일어난다. 하나의 작품이 웹소설, 웹툰, 드라마 씨디, 애니메이션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고, 최근에는 특히 OTT를 통해 영상물로도 제작되기도 하였다. 또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출판을 하기도 한다.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소비하고 있는 BL의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BL 작품 <시멘틱에러>의 소설, 드라마, 웹툰 포스터  

BL 서사 콘텐츠가 지니고 있는 한계점은 분명하다. 이미 BL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거부감을 갖는 대중들이 다수 있고, 확장할 파이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성의 상상력이 극대화된 장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다수의 기호에 맞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창작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리디에서 BL장르에서 유명한 작가들의 신작이 15세 이용가로 창작되고, 19세이용가 작품들이 15세 이용가로 개정되어 출간되는 현상은 BL 시장을 조금 더 대중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시도만이 BL에 대한 불편함을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미 BL을 소비하고 있는 독자층에게 욕망이 거세된 작품만 창작되고 있다는 경향으로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BL에서의 여성의 욕망이 어떤 수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화되며,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과의 거리감을 어떤 방식으로 해소하느냐의 문제다. 즉, 작품성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BL이 여성서사가 아니되 여성서사인 것처럼, BL이되 BL이 아닌 것 같은 작품이 나올 때 또 다른 BL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다.

 

 

글 · 한유희
문화평론가. 제 15회<쿨투라> 웹툰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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