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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어가는 비비안의 몸의 수행성: <위트>(Wit, 2001) 마이크 니콜스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어가는 비비안의 몸의 수행성: <위트>(Wit, 2001) 마이크 니콜스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05.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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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학 드라마, 대학 드라마, 그리고 페미니즘 영화로서 <위트>

<ER>(1994-2009)과 <그레이 아나토미>(2005-방영중>와 같은 최장수를 다투는 미국 드라마 시리즈, 한국의 <허준>(1999-2000), <하얀 거탑>(2007)을 비롯하여 현재 국내에서 방영중인 <낭만닥터 김사부 3>과 <닥터 차정숙> 등과 같은 드라마 시리즈는 병원을 배경으로 의료인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의학 드라마이다. 이에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 보건의료인과 환자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의사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생명을 중시하는 이들의 사명감과 휴머니즘, 그리고 로맨스를 다루는 매력적인 장르로 인기 드라마 순위에 상위권을 차지한다.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의 <위트>(Wit, 2001) 또한 의학 드라마 장르의 TV영화이다. 그러나 기존 의학 드라마와는 달리 그의 다른 TV 영화 <엔젤스 인 아메리카>(2003)가 에이즈 환자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 또한 의사가 아니라 난소암 판정을 받고 죽어가는 환자이다. 이 두 영화 모두 HBO를 통해 선보인 TV영화들이었지만, 상당한 파급력을 발휘한 영화들이다.

대학병원을 배경으로 영문학과 여자 교수 환자 비비안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의학 드라마이자 대학 드라마 영화이다. 대부분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대학사회 풍속도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대학 드라마 영화의 주인공은 악한이라는 직업적 이미지를 갖는 남자 교수로 풍자의 중심적인 대상이 된다. 그러나 비비안은 이러한 전형적인 남성 교수 주인공과는 차별적이고 예외적인 사례의 여자 교수이다. 또한 치명적인 암과 강력한 투약의 공격을 받는 비비안의 손상된 몸(damaged body)의 재현과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의학 드라마, 대학 드라마, 그리고 페미니즘 영화로 읽힐 수 있다.

이 영화는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의 첫 작품이자 유일한 극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동명의 원작(1995)을 니콜스와 엠마 톰슨(Emma Thompson)이 각색 제작한 영화로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비안 역을 맡은 엠마 톰슨의 연기는 원작 연극 공연(1997)에서 비비안 역을 맡은 캐슬린 찰팬트(Kathleen Chalfant)의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의 작품성을 완성해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마이크는 미국의 연극연출가 및 영화감독이자 배우로 에미(Emmy), 그래미(Grammy), 오스카(Oscar), 토니(Tony)를 수상한 이른바 'EGOT' 수상자중 한 명이다. 이러한 성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영화 작품들은 여러 매체들의 상호작용, 특히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을 활용한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니콜스는 많은 영화인들이 오마주를 표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끼친 <졸업>(1967)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지만, 에드워드 올비의 극작품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를 각색한 영화로 브로드웨이 영화에 진출하여 “제2의 오손웰즈”(new Orson Welles)라는 호평을 받았다. 아서 밀러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의 각색 연극으로 2012년 6번째 토니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극 연출가로도 명성을 쌓아온 그는 그 어떤 영화 감독 보다도 연극성이 두드러진 영화를 만들었다. 한동안 <워킹걸>(Working Girl, 1988), <울프>(Wolf, 1994), <버드케이지>(The Birdcage, 1996) 등 대중적인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위트>와 더불어 토니 커쉬너의 대표작을 원작으로 한 <엔젤스 인 아메리카>, 두 작품으로 다시 연극을 각색한 영화의 세계로 돌아왔다. 직후 만든 그의 대표적인 후기작 <클로저>(2004)는 연극적 바탕에 구축한 그만의 영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죽어가는 비비안의 주도적 스토리텔링

이 영화의 주인공은 17세기 형이상학파시인, 존 던(John Donne)의 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50세(영화에서는 48세) 비혼의 영문과 여교수로 말기전이성난소암을 앓고 있는 환자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이다. 정신력이 강인한 그녀의 몸, 엄밀히 말해 그녀의 난소는 대학병원 켈리키언 박사(Dr. Kelikian)의 새로운 연구의 실험을 위한 최적화된 대상이다. 아마도 그의 연구 성과는 유력한 의학 학술지에 발표되어 영향력 있는 의학 담론 형성에 공헌할 것이다. 이 영화는 아이러닉하게도 암세포를 죽이기 위한 강도 높은 화학요법의 실험대상으로 대상화된 그녀의 몸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은 대상화되도록 강요받고 있는 자신의 죽어가는 몸의 수행성을 의식하고 있는 주인공 비비안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여기서 수행성이란 젠더는 수행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버틀러(Judith Butler)의 수행성 개념에서 빌어 왔다. 버틀러에 의하면, 여성의 몸은 이성애의 규범적인 장치에 의하여 강요되는 행위를 반복하여 수행함으로써 지배적인 가치를 강화시키는 수행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복의 관습으로서 수행성은 오히려 그 수행성을 규범적인 장치의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해체 전략으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말기암 환자로 죽어가는 비비안의 몸은 젠더 수행성의 여성의 몸일 뿐 아니라 의과대학의 암연구자들의 분석 표본으로 강요받는 일련의 반복적인 규범적 행동의 수행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의 수행성을 의식하고 있는 비비안은 그 과정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 규범들의 부조리성과 아이러니를 주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존 던 전공자로서 위트(wit)와 기상(conceit)을 동원하여, 수행성의 전복성을 규범과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해체하는 전략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원작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메타연극적인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원작에서 비비안이 등장인물로 다른 인물들과 대화를 하는 동시에 직접 관객에게 말을 하듯이, 영화에서도 그녀는 카메라를 향하여, 즉 관객을 향하여 대사를 하는 “동시 대화 기법”(simultaneous discourse)을 사용하고 있다. 일종의 브레히트적 거리두기인 소외효과의 낯설게하기의 연극적 연기방식이기도 한 이 기법은 샐리 포터(Sally Porter)가 <올란도>(Orlando, 1992)에서도 사용하고 있듯이, 페미니즘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법이다. 영화의 메커니즘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선과 관점을 영화의 카메라에 동일시되도록 유도한다. 남성적 시각으로 대변되는 카메라의 눈을 보며 비비안이 직접 말을 하는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펙터클을 감정이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봄으로써 그녀의 몸에 가해지는 의료기술적 통제에 따른 수행성과 그것에 대항하는 전복성과 저항성울 볼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영화 기법이다.

결혼과 출산의 경험도 없지만 재생산 장기 난소암에 걸려 암병동에 입원한 비비안은 영문학 분야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형이상학파 시 연구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이자,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훈련된 “강한 여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강한 여자로 비비안은 사회가 만들어 구축한 여성적 삶의 틀과 규범을 수행하는 젠더 수행성을 저항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하고 독한 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료기술을 독점한 남성적 지배의 암병동에서 여성 환자의 몸의 수행성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한 비비안이 이러한 수행성에 대처할 수 있는 방식은 담담하게 위트와 기상으로 대처하며, 수행성의 반복성을 전용하여 전복성과 저항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비비안이 “강한 여자”임을 강조하는 동료교수이자 주치의인 켈리키언 박사와 비비안의 학생이었던 의학도 제이슨(Jason Posner)에게 비비안의 몸은 지적인 강인함으로 강력한 항암치료의 8개월 코스를 모두 견뎌내는 신기록을 세운 최신 종양약 연구를 위한 훌륭한 의학적 자료가 된다. 존 던의 텍스트를 의학전문가가 현미경으로 세포를 면밀하게 관찰하듯이, 구두점까지도 관찰하는 “해부”를 해온 비비안의 몸은 이제 대상화되어 의학 연구자들의 텍스트가 된 셈이다. 켈리키언 박사가 제이슨을 비롯하여 그의 수련의들을 데리고 실시하는 “대회진”(Grand Rounds)은 그녀의 몸을 텍스트로 한 의과대학 수업이다.

비비안은 자신의 몸을 텍스트로 한 켈리키언 박사가 이끄는 회진 장면을 자신이 감독하는 하나의 영화, 영화 속 영화의 장면으로 관객에게 소개한다. 그녀는 영문학과 대학원 수업과 비교하여, 켈리키언 박사가 수련의들에게 요구하는 텍스트로서 환자의 몸에 대한 강박적으로 자세한 검토는 바로 비비안이 수업 시간에 강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녀의 연구방법론인 신비평에서 강조하는 “면밀히 봄”(scrutiny)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몸이 당하는 면밀한 봄이 객관적인 연구방법론이 아니라 굴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켈리키언과 제이슨은 비비안의 몸을 텍스트로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여 학계의 명사가 될 것이지만, 그 논문에서 그녀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표본병, 책커버, 검은 흔적들이 있는 흰 종잇조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관객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의학적 담론 형성을 위한 텍스트로서 그녀의 몸을 흰 종이 위의 검은 흔적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의미를 생성하는 하나의 시 텍스트로 다룬다. 따라서 그녀는 위트와 기상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의학 담론을 위해 자신의 몸이 수행하고 있는 수행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분석함으로써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녀는 더 이상 스토리텔링을 계속할 수 없을 때까지 자신에 대한 영화를 진행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3. 의학적 담론과 문학적 담론

이 영화는 비비안에게 단도직입적인 어조로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라는 선고를 내리는 켈리키언 박사의 얼굴과 위를 올려다보며 그의 선고를 받아들이는 비비안의 얼굴을 각각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사용하여 암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의학적 담론의 위력에 그녀는 문학적 언어와 위트의 담론에 의존하여 그의 의학적 담론의 위력에 도전하고자 한다. 그녀가 걸린 암이 “잠행성”(insidious) 질환이라는 그의 설명에, 그녀는 “insidious”라는 그의 흥미로운 단어 선택에 반응을 보인다. “발견되지 않고 진행된” 병이라고 그의 부연 설명에 그녀는 “insidious는 교활하다라는 뜻이죠”라고 응답한다. 이와 같이 의사와 환자, 그리고 의대 교수와 영문과 교수로서의 두 사람의 대면을 보여주는 이 첫 장면은 비비안이 말기난소암에 대한 전투적인 치료에 대한 킬레키언의 위협적 경고에도 자신의 학자와 교수로서 닦은 강인함과 위트, 즉 지식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플래시백으로 전개되는 비비안의 지도교수이자 멘토인 애쉬포드 교수(Prof. E. M. Ashford)와 학부 시절 비비안과의 면담 장면은 학문적 엄격성과 탁월성을 성취한 스승과 제자로서 두 여자 교수의 비교를 통해 비비안의 위트에 대한 집중된 관심과 집착을보여준다. 애쉬포드 교수의 존 던의 소네트, 「죽음, 자만하지마라」(“Death, Be Not Proud”)에 대한 해설은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한 죽음의 주제와 비비안이 맞이할 죽음에 대한 수용을 함축적으로 예시해준다. 애쉬포드 교수는 제자 비비안에게 “죽음은 무대 위에서 느낌표로 공연되는 그런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쉼표, 휴지이다.”라는 해설로 존 던의 죽음관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존 던의 형이상학적 기상과 위트, 단어와 구두점의 유희에 몰두하고 있었던 학부생 비비안은 스승의 해석의 요점도,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삶을 즐기라는 충고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한 채,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온 비비안은 “출판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라는 대학 사회가 조장한 강박관념에 전념한 결과, “출판했다, 그래서 망했다”라는 역설을 경험했다. 이제 그녀는 대학 사회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지독하고 철저한 여자 교수의 강박관념에 따라 초인적인 투쟁으로 8번의 고강도의 치료를 견디어 내는 신기록을 세운 결과, “견디어 냈다, 그래서 죽었다”라는 최대의 역설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극도로 똑똑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라는 위트, 즉 지성의 중요성에 대한 그녀의 확신이 무너질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죽어가는 몸의 고통과 맞이할 죽음에 대하여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스토리텔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비안의 주도적 스토리텔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비비안 역시 자신의 몸을 텍스트로 읽어내고자 하며, 존 던의 텍스트에 대한 신비평적 분석 방식이 유추적인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병이 진행되면서 점차 이러한 유추 관계에 대한 그녀의 확신이 사라지게 된다. 반복 등장하는 그녀의 존 던 시 강의 장면들은 이러한 유추 관계에 대한 그녀의 확신과 더불어 좌절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존 던의 시 강의를 하며 스크린 앞에 선 그녀의 몸 위로 시 텍스트가 투사되는 장면은 그녀의 확신과 좌절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사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 텍스트와 그녀의 몸 텍스트의 오버랩은 유추 관계 보다는 충돌 관계를 더 강조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4. “그녀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영화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관객을 향한 비비안의 직접 말걸기는 점차 줄어들어, 드디어 “내 말로” 몸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비비안이 침대에 엎드려 “오늘은 좀 어떠세요”라는 말이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완성된 문장이라며, “남은 전개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 끌다가, 죽음은 너무도 빨리 온 것 같습니다. 적절한 결말을 위한 시간조차도 없네요”라는 말로 관객을 향한 마지막으로 말을 한다. 이제부터 비비안의 죽어가는 몸은 의료 전문가들의 통제를 완전히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의 전개를 주도하는 인물은 켈리키언 박사도, 제인슨도 아니고 간호사 수지(Susie Monahan)이다.

비비안은 급속히 쇠락하는 가운데, 그녀의 감정들이 살아난다. 그녀는 자신이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누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인간적 친절과 공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제이슨에게 그러한 인간적 친절과 공감을 기대해보지만, 그는 그녀를 위로할 수가 없다. 한밤중 공포감에 휩싸인 그녀가 알람을 울려 불러 온 수지 앞에서 눈물을 드디어 보이고 만다.

수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의식이 아직 깨어있는 비비안과 수지가 나눈 최후의 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대화는 특정한 단어에 대한 수지의 코믹한 무지로 인해 전개되는데, 이러한 단순한 대화에서 비비안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즉 선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졸린”(soporific)이라는 단어는 바로 그녀가 이런 단어들이 그녀의 일생의 작업이 될 것임을 안 바고 그날 그 시간의 기억을 그녀에게 가져다준다. 그녀도 포터(Beatriz Potter)의 동화의 첫 줄을 읽으면서 그 단어를 몰랐는데 아버지가 그 단어의 뜻을 가르쳐 준 5세 생일을 떠올린다. 관객을 보며 아이러닉하게 “나는 한 때는 가르쳤지만, 이제는 배운다”라고 말하는 비비안은 덧붙인다. 비비안에게 애정 어린 말을 해주고, 얼음과자를 주고, 그리고 진통제를 주고, 그리고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도 바로 수지이다. 그리고 회생조치거부(DNR: Do Not Resuscitate)의 권리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것도 수지이다. 그리고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도 수지이다. 약속대로 그녀의 임종을 지키며, 제이슨이 그녀를 소생시키려는 시술을 막는 것도 수지이다.

이와 같이 죽어가는 비비안에게 그리고 그녀의 죽어가는 몸의 전복적인 수행성을 위해서도 단순함과 친절함을 상징하는 수지가 필요한 것임을 이 영화의 후반부가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지의 존재와 그녀의 역할은 간과되는 경향을 보인다.

제이슨과 수지가 혼수상태에 있는 비비안을 돌보는 장면은 그들의 비비안의 몸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존 던의 시를 비비안에게서 배운 제이슨은 구원과 삶의 의미가 아니라 복합성의 차원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즉 퍼즐을 해결하기 보다는 퍼즐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능력을 배웠다고 말한다. 무한히 증식하는 암세포의 “불멸성”에 끌려 암 연구에만 전념하는 제이슨은 영문학과 의학의 대가 비비안과 켈리키언의 수제자이다. 가장 인문적인 관점에서 인간 존재를 대해야 할 전공 분야인 문학과 의학은 객관적이고 단호한 지성에 굴복하고 “삶의 의미라는 너절한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제이슨과 같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5. 수지의 “적절한 결말” 연출

본인의 집 침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고향에 묻히던 옛날 사람들의 죽음과 달리, 비비안의 죽음처럼 현대인은 병실에서 맞이하는 전형적인 의료화된 “더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현대인은 첨단 의학 기술의 발달로 생명을 연장 받는 대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지 못하고 폐부를 찌르는 고통과 무감각한 혼수상태를 오가는 격렬한 고통 속에서도 시시각각 죽음에 대한 공포로 괴롭힘을 당한다. 달리 말해, 현대인은 푸코(Michel Foucault)의 “생명권력”(bio-power) 또는 “생명정치”(biopolitics)의 관리와 통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첨단 시설을 갖춘 병원의 침대에서 비비안이 맞이하게 되는 고독한 죽음은 바로 전형적인 현대인의 더러운 죽음이다.

원작자 에드슨은 원작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이 구원에 관한 연극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했다. 사실 원작은 중세극『인간』(Everyman, c. 1510)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 주인공 비비안이 궁극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신을 경험하고 은총을 받게 된다는 구원의 주제를 다루는 『인간』의 현대적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중세극의 주인공처럼 비비안 역시 영혼의 구원에 앞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같이 해줄 동반자들이 필요하다.선행(Good Deeds)과 지식(Knowledge)이 인간의 죽음 직전까지 동반하듯이, 더러운 죽음을 맞이한 현대인 비비안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애쉬포드 교수와 그녀를 “자기”(Sweetheart, 라고 부른 친절한 수지의 동반이다. 즉 비비안이 지금 필요한 것은 위트가 소멸시키지 않고 오히려 고양시킨 애쉬포드 교수의 연민과 사랑이다. 유일한 방문객 애쉬포드 교수는 존 던의 시 대신 도망치는 버니(The Runaway Bunny)라는 ‘영혼의 작은 우화’를 읽어주며,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모성의 따뜻한 사랑으로 구원을 약속하며 임종을 맞는 비비안을 위로해주기 위한 동반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비안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그녀가 잃어버린 그러나 수지에게서 다시 배운 “개인적 접촉”과 “인간적 친절함”이다. 그리고 수지가 가르쳐 준 심폐소생술금지 선택권 행사, 즉 그녀에게 강요되는 더러운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적인 권위 회복이다. 사실 수지는 비비안의 부탁대로 생명권력에 대한 저항, 즉 그녀의 죽을 권리를 그녀가 수행할 수 있도록 대신 싸워주고 끝까지 함께하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엔딩은 병실 침대에서 고독하게 굴욕적인 더러운 죽음을 맞는 비비안의 몸이 겪는 굴욕의 클라이맥스로 이른다. 비비안의 심장이 멎은 것을 발견한 제이슨은 연구 대상으로서 비비안의 몸의 회생을 위해 심폐소생술금지를 선택한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심폐기능소생(CPR)을 시도하고 청색경보(blue code)를 발동한다. 출동한 경보팀이 황금시간(golden time) 내의 응급조치를 위해 광란의 소동을 벌이는 가운데 비비안의 몸은 이제 완벽하게 생명권력의 통제 관리 시스템에 갇힌 몸이 된다. 이러한 생명권력의 닫힌 구조 속에 갇힌 비비안의 몸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우선은 비비안의 선택권이기는 하지만, 수지의 강력한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엔딩 장면은 부각시킨다. 통제 시스템에 대한 수지의 저항으로 비비안의 몸은 ‘무경보’(no code), 즉 ‘죽게 내버려둔’ 몸으로 죽을 권리를 얻게 된다. 따라서 비비안의 죽어가는 몸의 수행성의 전복성은 수지의 강력한 개입과 저항에 의하여 마침내 구현될 수 있다. 수지 덕분에 비비안은 애쉬포드 교수의 존 던 시의 해설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멜로드라마적인 격함이 없는 조용한 쉼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십수년전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로 가면서 내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도 수지처럼 끝까지 나를 돌봐 줄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을 했던 나의 제자 정혜가 작년 오월 십이일 우리 곁을 떠났다. ‘교활한’ 말기전이성췌장암으로 <위트>에 대한 학위논문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돌연 먼저 간 그녀를 추모하며 영화 엔딩의 비비안처럼 존 던의 소네트를 작은 소리로 낭독해본다.

John Donne: HOLY SONNET X.

Death, be not proud, though some have called thee

Mighty and dreadful, for thou art not so ;

For those, whom thou think'st thou dost overthrow,

Die not, poor Death, nor yet canst thou kill me.

From rest and sleep, which but thy picture[s] be,

Much pleasure, then from thee much more must flow,

And soonest our best men with thee do go,

Rest of their bones, and soul's delivery.

Thou'rt slave to Fate, chance, kings, and desperate men,

And dost with poison, war, and sickness dwell,

And poppy, or charms can make us sleep as well,

And better than thy stroke; why swell'st thou then ?

One short sleep past, w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죽음이여 자만하지 마라, 몇몇 사람들은 그대를

강하고 두렵다고 하지만, 그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죽지 아니했으니, 불쌍한 죽음이여, 그대는 나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그림일 뿐인 안식과 잠으로 부터

많은 기쁨이 나온다. 그러니 그대로부터는 더 많은 기쁨이 흘러나오리라

그리고 가장 선한 자들이 가장 일찍 너하고 가노니,

유해의 안식이며 영혼의 구원이니라.

그대는 운명, 기회, 왕, 그리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노예고,

독과 전쟁, 질병과 더불어 사는 존재다

그리고 양귀비와 주문은 또한 우리를 잠들게 하는데

그것들은 그대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 그대는 왜 잘난 체 하는 것인가?

한 번 짧은 잠을 자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있게 되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 죽음이여, 그대가 죽으리라.

 

사진출처: IMDB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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