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기회주의자들이 더욱더 판치는 시대가 도래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헝가리의 이스트반 자보 감독이 연출한 <메피스토>(1981). 이 영화의 주인공 헨드릭 회프겐(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은 기회주의자의 전형 같은 인물이다.
영화는 오페라 공연 장면으로 시작한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의 환호가 이어지자, 배우대기실에서 그 소리를 들은 헨드릭은 미친 듯이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것은 바로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 시기에 지방 도시 함부르크의 극장에서 배우로 살아가는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장면에서 헨드릭은 오페라 공연의 주연 배우 도라를 찾아가 찬사를 늘어놓으며 아첨을 떤다. 이 두 장면을 통해 헨드릭은 출세를 갈망하는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따라서 이후 헨드릭의 모든 생각과 행동거지는 오로지 출세의 길에 집중된다.
먼저 출세에 유리한 여성을 결혼 상대로 물색한다. 헨드릭은 오래전부터 율리에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흑인인데다 배경도 별로이기에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언젠가 헨드릭과 결혼할 날을 꿈꾸는 율리에테는 이 영화에서 헨드릭의 정체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다. 헨드릭의 본명(그가 싫어하는 이름인 하인츠)뿐만 아니라, 성적 취향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간파하고 있다. “배우는 가면”이라고 말하는 그는 율리에테 앞에서만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채 거침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야수처럼 거친 성적 욕망을 마음껏 표출한다. 가면 아래 자신의 정체와 욕망을 숨기는 그는 율리에테의 존재도 비밀로 한다. 따라서 헨드릭과 율리에테가 만나는 장면은 항상 어둡다.
헨드릭은 명망 있는 부르주아 집안의 딸 바바라를 알게 된다. 함부르크에서 벗어나 베를린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바바라의 환심을 사려고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결혼에 성공한다. 율리에테의 말처럼, ‘냉혹하고 위선적인 눈으로 슬픈 아이의 표정’을 지은 덕분이다. 바바라는 헨드릭이 ‘노동자를 위한 혁명연극’에 대한 기획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헨드릭은 부두, 공장, 지하 술집 등 어디나 무대가 될 수 있고, 노동자들이 배우로 나오는, 노동자와 하나가 된 연극을 열정적으로 설파한다. 그러나 깊은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시대의 대세를 따른 것일 뿐이다. 동분서주하던 헨드릭은 바바라 아버지의 추천으로 베를린 국립극장에 진출하게 된다. 그는 국립극장의 객원 배우로서 명성을 쌓아가는 한편, 다른 극장에서는 혁명연극에 출연해 각광을 받기도 한다.
나치가 권력을 잡기 전, 헨드릭은 나치를 추종하는 동료 연극배우 미클라스를 극단에서 쫓아낸다. 바바라가 미클라스를 변호하자, 헨드릭은 “나치의 위험성을 과소평가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독재에 익숙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치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자, “나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면서, “나치가 정권을 잡았다고 왜 걱정해야 하나?”고 반문한다. 그런 다음 나치의 파시즘을 영화로 구현한 레니 리펜슈탈이 했던 말을 덧붙이며, 또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나는 배우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 극장에 가서 내 역할을 연기한 후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 바바라는 제대로 된 예술이 불가능하게 된 독일을 떠나자고 설득하지만, 헨드릭은 거절한다. 히틀러에 저항하는 많은 이들이 독일을 떠나거나, 나치에게 체포되어 사라진다.
바바라가 파리로 망명하자 헨드릭은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나치 지도자(Führer)인 총리(이 인물은 히틀러 정권 시기 독일 국방군 공군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을 모델로 했다)의 아내이자 배우 로테 린덴탈(이 인물은 헤르만 괴링의 두 번째 아내인 영화배우 에미 존네만을 모델로 했다)의 추천으로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성공의 기회가 찾아온다. 예전에 그는 로테가 ‘남자관계가 복잡한 얼간이’라고 비웃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안간힘을 쓴다. 또 사력을 다해 총리의 비위를 맞춘다.
그는 먼저 총리에게 좌익 세력과 놀아난 적이 있다고 자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혁명 극장 활동 같은 나치가 싫어할 과거의 경력을 삭제하면서, 인생의 한 부분을 지워버린다.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바바라와는 미련 없이 이혼한다. 이렇게 출세의 걸림돌이 될 만한 문제를 처리한 그는 프로이센의 국립극장장 자리에 오른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양심을 가진 인간, 악질은 아닌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익과 야망에 부합되는 쪽을 선택하지만, 선택지 앞에서 고뇌하는 척한다. 극장장 자리에 오르기 직전에는 “극장장이 돼도 될까?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며 번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주는 과정일 뿐이다. 자신이 그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총리가 극장의 미래를 위해 자신에게 부탁했으므로, 심지어 하느님이 자신을 중용하시는 게 분명하므로, 그 자리를 수락할 수밖에 없다고 둘러대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여기서 히틀러 시대의 독일 예술가 가운데 헨드릭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많은 실존 인물 가운데 프리츠 랑 감독의 사례가 생각난다. 1933년 4월, 괴벨스는 자신의 사무실로 프리츠 랑을 불렀다. 괴벨스는 랑의 영화 <마부제 박사의 유언>(1933)에 대해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지만, “히틀러가 랑의 또 다른 영화 <메트로폴리스>(1927)와 <니벨룽겐의 노래>(1924)를 사랑한다”면서, “자신 또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괴벨스는 랑에게 제3 제국의 활동사진 제작을 감독하는 새로운 관청인 ‘제국 영화협회’의 수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랑은 고민해보겠다고 답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돈과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꾸려서 이튿날 파리로 떠났다.
랑과는 달리 헨드릭은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예전 동료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나치의 압제를 겪으면서 저항운동에 나선 미클라스가 동참을 권유하자 당국에 밀고한다. 나치는 미클라스를 처형한 다음 사인을 교통사고로 발표하고, 헨드릭은 빤한 거짓말을 그대로 신봉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배우 오토 울리히스를 무대에 서게 해 주거나 율리에테를 파리로 도피하게 한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왔다며 자신의 행태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고 합리화하며, 권력의 힘을 확인하고 만족해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순간은 헨드릭이 총리에게 두 번째로 울리히스의 구명을 간청하는 장면이다. 이때 총리는 “이 일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니, 간섭하지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쓰라”면서, “벌레처럼 눌려 죽기 전에 나가, 이 배우 녀석아!”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권력을 가졌다고 믿으며 자신의 지위를 과신하던 헨드릭은 절대권력의 무시무시한 정체를 실감하며 그 앞에서는 자신이 벌레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더러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울리히스가 사망했는데, 이번에도 사인이 자살로 발표되자 헨드릭은 공포에 사로잡혀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가치를 보존해야 된다. 연극이나 미술 같이 진정 가치 있는 건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법이다”, “세상이 아무리 추잡해도 진정한 예술은 항상 진실되고 순수하다”는 등,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으며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척했던 헨드릭은 점점 더 나치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아리안족의 이상적인 신체를 파시즘의 미학에 따라 구현한 조각상을 찬양하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나치의 프로파간다 연극으로 각색해 공연한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지위와 젊음, 사랑을 포기한 북유럽의 구세주이자 숭고한 이상을 지닌 순수한 피의 외로운 기사’로서, ‘나약하고 퇴폐적인 인물이 아니라 정력적이고 단호한 영웅’으로 변형하는 식이다. 또 극장까지 휴관해가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총리의 생일 파티를 열고, 파티에 참석한 하객들 앞에서 총리를 찬양하는 연설을 해서 총리를 기쁘게 한다.
이 같은 행태에 대해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에서, “마치 멸균이라도 하듯 정신을 소독하려 했고 동시에 복종을 강요했으며, 어떤 지적인 이단 행위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또 의지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정신의 능력과 감정을 동원했다. 그런 무자비한 방식을 통해 현실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 체제의 사이비 현실을 연출하기 위해 현실의 구성요소를 포착했다. 오래된 민요는 살아남았지만 대신 나치의 가사로 채워졌다”고 비판한다.
총리는 <햄릿> 공연이 마음에 들었다며, 헨드릭을 건축 중인 대 규모 야외극장으로 데려간다. 헨드릭을 항상 ‘메피스토’라고 부르던 총리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자 ‘헨드릭 회프겐’이라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그런 다음 총리는 헨드릭에게 아래로 내려가라고 명령한다. 헨드릭이 무대 중앙에 이르자, 사방에서 눈부신 조명이 그에게 쏟아진다.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각광을 받는, 그토록 오랫동안 소망했던 순간을 맞이한 헨드릭은 덫에 걸린 느낌을 받는다. 이전의 헨드릭의 결혼식 피로연 장면에서, 메피스토 분장을 한 배우들이 그를 둘러싸고 빙빙 돌 때, 이미 그가 악마의 손아귀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메피스토 가면 사이에 끼어있는 원숭이와 돼지 가면은 그의 상태를 조롱했다. 그러나 그때 헨드릭은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즐거워했다. 이제야 그는 위험을 감지하고 탈출하려는 듯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며 달려가지만, 계속 따라오는 조명의 빛에서 도망치지 못한다.(장면 8, 9) 완전히 포획되어버린 헨드릭은 “나보고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아주 평범한 배우일 뿐인데...”라며 위선적인 말을 중얼거리지만, 아마도 그를 동정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그가 빛 속에 거의 녹아드는 듯한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장면 10) 만일 다음 장면이 있었다면, 그는 완전히 총리의 개가 되어 혓바닥으로 총리의 구두를 핥고 있을 것이다.
P.S.; 메피스토펠레스를 위한 조명
헨드릭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의 공연에서, 파우스트에게 세상의 온갖 부와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냄으로써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미장센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출은 헨드릭을 비추는 역광의 조명을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처럼 사용한 것이다. 망설이는 순간이 있는 경우에도 헨드릭은 자극하고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조명에 굴복해 결국 자신의 욕망을 따라간다. 이러한 조명의 사례는 영화 도입부에서 헨드릭이 성공을 열망할 때(장면 1, 2, 3), 메피스토 연기를 할 때(장면 4, 5), 총리의 비위를 맞출 때(장면6), <햄릿>을 파시즘의 미학에 따라 각색할 때(장면7) 등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조명은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헨드릭을 완전히 지배하고 결국 집어삼킨다.(장면 8, 9, 10)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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