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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문화톡톡] BL은 2023년 콘텐츠 트렌드의 새로운 좌표다 (2)
[김민정의 문화톡톡] BL은 2023년 콘텐츠 트렌드의 새로운 좌표다 (2)
  • 김민정(문화평론가)
  • 승인 2023.07.03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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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BL 드라마 [2gether]
태국BL 드라마 [2gether] 포스터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성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유튜브와 OTT 등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대중의 누적 시청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대중의 정서적 친밀감 또한 증가하였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콘텐츠를 경험하게 되면서 ‘레거시 미디어’ TV의 영향력은 자연스레 축소되었다. 최근 OTT 오리지널 시리즈가 OTT에 서비스된 다음, 케이블방송 채널을 통해 재송출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OTT에서 본방송을 방영하고 TV에서 재방송하는 식이다.

미디어 위계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문화의 위계 구조도 자연스레 변화하였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향유하던 하위 문화도 이제 문화의 변방에 머물지 않는다.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제작이 활발하다 못해 역으로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드라마 찾기가 더 어려운 실정이다. 웹소설과 웹툰으로 대표되는 웹콘텐츠는 냉혹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야기, 그래서 스토리 밸류(story value)가 검증된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서 인정받으며 ‘21세기 문화원형’ 신화(myth)가 되어가고 있다.

2022년 화제의 BL드라마 <시멘틱 에러>는 2018년 리디북스 BL 부문 대상을 차지한 19금(禁) 웹소설이 원작이다. 드라마는 12세 관람으로 성적 수위를 낮춰 BL 장르가 낯선 사람도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BL 웹툰과 BL 웹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는 BL드라마는 폭력적인 설정과 스킨십 장면을 대폭 축소하는 식으로 청소년 관람이 가능한 학원물·캠퍼스물로 각색하여 대중성을 높이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맨틱 에러>는 왓챠가 만든 오리지널 콘텐츠 가운데 역대 최대 성과를 기록하며 BL 콘텐츠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 설립 이후 가입자가 많지 않은 일본 왓챠의 킬러 콘텐츠로서 전년 동기간 대비 일본 가입자 200% 증가에 공헌하기도 했다.

OTT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려는 OTT 플랫폼의 전략도 OTT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글로벌 OTT로서 막대한 제작비를 내세운 넷플릭스와 애플TV+, 디즈니플러스와 달리, 토종 OTT 왓챠는 소수취향이지만 대중 취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들을 집중적으로 개발해왔다. <시맨틱 에러>는 충성도 높은 BL 콘텐츠 매니아층을 대상으로 적은 예산으로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전략의 일환인 셈이다. 세분화된 타겟을 대상으로 하는 왓챠의 행보는 최근 문화 트렌드 ‘취향의 공동체’와 잘 맞아떨어진다.

최근 문화산업은 주류 문화에 가려져 있던 특정 취향과 감각의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비주류 문화에 맞춘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개별적인 디지털 미디어 기기를 통한 직접적 즉각적인 콘텐츠 소비 방식이 다양한 층위의 세분화된 취향을 포용하는 비주류 콘텐츠 생산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대중문화예술 혹은 대중문화 콘텐츠로 통칭되는 ‘지금 여기’의 문화 콘텐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성. 대중성에 대한 재정의, 혹은 대중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와 있다.

 

콘텐츠 파급력과 화제성
 

대중문화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이다. 여기에서 대중은 지위·계급·직업·학력·재산 등의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의미한다. 대중에서 파생된 대중성은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취향에 부합하는 척도로 통상적으로 영화 관객 누적 수와 드라마 시청률 같은 양적 측면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하지만 최근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미디어 채널이 다양화되면서 점차 대중성의 양적 평가보단 질적 평가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TV 앞에 앉아 본방송을 고수하는 시청자들은 없다. VOD와 위성방송·케이블 채널, 그리고 OTT 플랫폼까지 우리는 원하는 시간과 원하는 공간에서 원하는 콘텐츠를 선택해 볼 수 있다. 심지어 콘텐츠 감상 배속을 선택해서 콘텐츠 분량까지 우리의 취향대로 조절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디지털 실크로드’로 불리는 글로벌 OTT의 대약진으로 콘텐츠 생태계에는 큰 변화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콘텐츠든 구독자의 취향과 감각에 따라 선택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청환경이 보편화된 것이다. 때문에 양적 평가로의 시청률과 흥행성적은 객관적 지표로서 효용성을 상실하였다. 반면에 온라인 반응과 댓글 수, 동영상 클립 조회 수 및 SNS 실시간 트렌드 등 콘텐츠 파급력과 화제성을 판단할 수 있는 요소들이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라는 특정 플랫폼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구독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 ‘대중’ 콘텐츠로 자리매김하였다. <오징어 게임>의 놀라운 폭발력은 소셜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의 긴밀한 연결망으로 구성된 디지털 알고리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 드라마의 넷플릭스 랭킹을 살펴보면 그 순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그 상승세를 타고 <오징어 게임>은 유리천장이라 불리는 미국을 포함해 94개국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이다.

긍정적인 파급효과는 같은 장르의 알고리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영화 <기생충>과 아이돌그룹 BTS를 잇는 K-세계관의 확장 버전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고, 이러한 거대한 세계관 통합은 지난 한류열풍과 맞물려 전 세계를 아우르는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국내외 온라인상의 폭발적인 호응 덕분에 <오징어게임>은 특정 플랫폼 ‘넷플릭스’ 또는 특정 국가 ‘한국’의 콘텐츠가 아닌, 세계적인 드라마로 등극하며 아시아 최초로 에미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성, 즉 ‘디지털 노마드’ MZ세대의 관심도가 곧 대중성의 주요 지표가 되어 전체의 일부가 전체를 대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 시대의 ‘미다스 손’, 이것이 모니터 화면에 가려진 MZ세대의 진짜 얼굴이다. 이제 MZ세대의 시선이 향하는 콘텐츠가 대중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바이럴 마케팅 효과 덕분에 실제로 흥행에 성공할 확률도 높아졌다. 콘텐츠 산업의 모든 눈이 MZ세대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디지털 파급력 즉, 관심 자본으로 축적한 그들만의 새로운 자본력 때문이다.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그들의 ‘관심’은 기성세대의 물질 자본과 차별화되는 그들만의 막강한 자산이다.

 

MZ세대의 디지털 놀이문화


‘디지털 노마드’ MZ세대는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즉 현실이 아닌 가상의 디지털 세계에서 그들만의 이상적인 메타버스를 건설하는 중이다. 이곳은 성별, 국적, 윤리 등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질서와 기준이 전복되는 혁명적 공간이다. 이름하여, 금기를 금기하라. 그들의 혁명은 가볍고 즐겁다. 그래서 확장력이 좋다.

남성 간의 동성애를 주요 모티프로 삼는 BL 콘텐츠의 기원을 찾아가면 MZ세대 특유의 놀이문화 팬픽션(fan fiction)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H.O.T’ ‘동방신기’ 등 아이돌그룹 팬픽으로 일군 BL물 역사가 이제 수면 위로 올라온 게 아닌가 싶다.” 한-태국 합작 BL드라마 <기이한 로맨스>를 연출한 공자관 감독의 인터뷰처럼 BL과 MZ세대의 남성 아이돌 팬덤 문화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동안 BL 콘텐츠에 관한 학술 연구가 독립적인 하나의 장르가 아닌 팬픽션 또는 알페스(RPS)‘로 불리는 아이돌 팬덤 문화의 일부로서 연구되어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K-pop 아이돌 세계관과 아이돌 활동에는 BL 코드로 해석될 수 있는 키워드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소위 ’떡밥‘이라고 불리는 BL코드는 2차 팬픽션을 포함한 N차 창작으로 확장되고 팬덤 자체의 스토리 담론을 뒷받침한다. BL의 세부 장르로서 팬픽션은 아이돌을 소비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로 팬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놀이문화로 작동한다. 디지털 미디어에 친숙한 MZ세대는 아이돌 팬덤의 주축이 되어 아이돌 캐릭터를 활용하여 그들만의 새로운 스토리를 생산하는 N차 창작자인 동시에 그것을 향유하는 소비자로서 막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최근 아이돌 팬덤은 ’떡밥‘을 제공받는 것을 넘어 역으로 남성 아이돌에게 BL적 이미지를 요구하고 BL 콘텐츠 제작을 요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신인 아이돌 그룹 멤버가 BL드라마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높이고 팬덤을 확장하는 사례는 이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여성향 BL 콘텐츠 플랫폼 헤븐리는 웹툰과 웹소설 기반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와 K-POP 아이돌 팬픽(fan fiction) 기반 스토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국형 BL장르를 개척하며 세계적으로 고유의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 드라마 [진정령] 포스터
중국 BL 드라마 [진정령] 포스터

중국BL 또한 한국BL과 다른 듯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중국 BL은 초기에 성애 묘사와 소재 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방식으로 향유되었으나 2014년 당국에 의해 대규모로 이루어진 ‘음란물 및 불건전 콘텐츠에 대한 제재’로 인해 직접적인 신체 묘사와 성애 묘사가 전면 금지되었다. 성애 장면은 직접적인 묘사 없이 맥락화되거나 비유적인 표현으로 에둘러 묘사된다.

중국 텐센트 조회수만 100억뷰를 기록한 중국 드라마 <진정령>은 중국 BL소설 <마도조사> 원작으로 소설 속 동성애를 브로맨스로 각색하여 제작되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스스로 삭제되고 편집된 이야기를 찾아 메워가는 방식으로 드라마를 N차 감상하는 열풍이 불었다. 중국 BL드라마 <산하령> 역시 검열 때문에 다른 대사로 덧입혀진 장면을 팬들이 직접 찾아내 본래의 대사를 복원하거나 섹슈얼한 시점으로 등장인물의 스토리를 재해석해내는 N차 콘텐츠를 제작하였다.

‘디지털 노마드’ MZ세대는 사회적 제약과 구조적 한계 앞에서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들은 자유롭게 디지털 메타버스로 옮겨와 새로운 질서와 윤리를 세운다. 그들의 움직임은 기성사회의 철학과 신념을 해체할 만큼 유연하고 개방적이다. 그래서 혁명적이다. 이렇게 BL은 사회적 금기를 하나의 놀이로 향유하는 MZ세대만의 디지털 놀이문화 안에서 새롭게 재탄생하였다.

 

윤리적이지 않은 윤리성
 

BL콘텐츠는 취향 공동체 중심의 서브컬쳐에서 문화 콘텐츠의 메인스트림으로 ‘사회적 신분’이 급변하면서 오늘날의 대중문화 지형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달라진 위상과 영향력에 따라 BL에 관련된 논의도 작품 고유의 예술성뿐 아니라 BL의 사회문화적 의미이자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세계를 비교했을 때 BL은 성소수자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퀴어물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BL은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들의 로맨스와 로맨스의 낭만성에 주목한다. 때문에 성소수자가 직면한 현실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두 남자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음에도 남녀 로맨스와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점이 역으로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르지 않게, 그래서 보편의 사랑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LGBTQ에 관련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윤리적 자장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름하여, ‘윤리적이지 않은 윤리성’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다.

영국 <더 이코노미스트>가 주목한 태국 BL 드라마 <2gether>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 그리고 트렌스젠더 여성과 남성의 사랑까지 다양한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드라마에서 재현된 가상의 BL 세계관은 세상의 모든 사랑이 동일한 가치로 존중받는 꿈의 이상향으로서 존재한다. 즉, 우리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의 풍경이 드라마 안에서 사실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태국 BL물 팬 중 20% 이상이 게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BL문화의 소비자층이 이성애 여성에서 동성애 남성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태국 유명 BL드라마 <2gether>의 주연 배우 브라이트는 여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남자 배우인 동시에 게이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남자 배우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23년 ‘지금 여기’의 BL 콘텐츠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BL 콘텐츠가 음지의 서브 컬쳐에서 벗어나 대중화의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나친 기대도 지나친 우려도 지금으로서는 너무 성급한 반응일지 모른다. 다가올 미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상상력 그 너머에 있다. 어제의 새로움이 오늘의 낡음이 되는 것은 문화 콘텐츠의 본래적 특성이다.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조용한 혁명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자. 그리고 즐기자. 그것이 2023년 우리에게 주어진 문화적 사명이다.

 

 

 

참고자료

 

김효진, 페미니즘의 시대, 보이즈 러브의 의미를 다시 묻다: 인터넷의 BL‘담론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47, 한국여성문학학회, 2019.

류호현, 글로벌 서브컬쳐 트렌드로서의 BL과 중국 BL, 중국문화연구57, 중국문화연구학회, 2022.

류효현·이가현 트랜스 동아시아 BL 대중화 경향 연구, 일어일문학94, 대한일어일문학회, 2022.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제 음지에서 안 봐요, 태국 GL/BL 드라마의 인기” 2023.4.10

게임톡(GAMETOC) “국산 스릴러 웹툰 킬링 스토킹’, 유럽 만화축제서 시선집중” 2017.11.6

 

 

글·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과 르몽드문화평론가상, 그리고 2022년 중앙대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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