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감독의 <YMCA 야구단>(2002)은 1904년 창단한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황성 YMCA 야구단의 실화를 각색한 영화이다. <YMCA 야구단>의 시대 배경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1900년대 초반이다. 을사늑약, 통감부, 일본군, 항일의병운동 등이 영화의 시대 상황을 알려준다. <YMCA 야구단>에서는 YMCA 야구단과 일본군 야구팀인 성남구락부의 경기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두 팀의 경기는 시대 상황에 의해 자연스럽게 스포츠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마이웨이>(감독 강제규·2011)에서 준식과 타츠오의 마라톤, <자전차왕 엄복동>(감독 김유성·2019)에서 엄복동과 카츠라의 자전차 경주가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어 집단적, 민족적인 의미를 지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YMCA 야구단>에서 가장 눈여겨볼 인물은 야구단의 매니저 겸 단장 역할을 하는 민정림이다. 영화의 서사는 표면적으로 송호창의 행적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송호창의 행적과 성격 변화는 사실상 민정림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민정림은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폭력에 맞서 투쟁하는 여성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 목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던 송호창에게 야구를 통해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민정림은 <암살>(감독 최동훈·2015)의 독립군 안옥윤이 일본군 혹은 친일파를 직접 처단하는 것과 다른 관점에서 ‘행동하는 여성’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민정림은 국내 스포츠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주체적, 능동적, 진취적인 여성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YMCA 야구단> 이전의 국내 스포츠영화에서 여성 인물은 조연 혹은 단역으로만 등장해 남성 인물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화해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즉 2000년대 이전 스포츠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캐릭터에 불과했다. 그런데 민정림은 <YMCA 야구단>에서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 시대의 폭력에 저항하고, 나아가 남성 인물이 절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인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그러한 점에서 민정림은 스포츠영화를 뛰어넘어 2000년대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캐릭터라고 평가할 수 있다.
<YMCA 야구단>의 민정림은 표면적으로 조동일이 ‘영웅의 일생’ 유형에서 정리한 상층영웅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민정림은 명문 귀족의 딸이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라는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 또 민정림이 미국인 선교사와 야구단원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동시에 단장 혹은 감독으로서 야구단을 이끌어가는 것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민정림은 실질적으로는 민중 영웅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민정림의 이러한 성격은 <YMCA 야구단>의 배경인 1900년대 초반의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즉 민정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상층 영웅이지만, 엄혹한 시대 환경으로 인해 미천한 혈통의 민중 영웅으로 추락한다. 그로 인해 민정림이 고난과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민정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므로 고난을 손쉽게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민족적인 차원에서 민정림은 민중 영웅의 한 명이다. 멸망 위기에 놓인 나라의 백성이라는 상황이 개인의 삶을 짓누른다. 하지만 민정림은 시대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민정림의 이러한 성격은 오대현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오대현이 통감부의 친일파 조선인 관리를 응징하려다 실패한 후, 민정림은 오대현과 함께 경주로 몸을 숨긴다. 일본 유학파인 오대현은 친일파 무리인 ‘을사 50적’을 처벌하는 인물이다. 오대현은 YMCA 야구단을 핍박하는 히데오와 야구로대결하는데, 히데오는 일본에서 오대현과 경쟁했던 일본군 장교이다. 게다가 히데오의 아버지는 통감부의 최고위 관리이다. 따라서 YMCA 야구단과 성남구락부의 야구 경기는 조선과 일본의 대결로 그 의미가 확장되며, 이는 민정림의 행적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민정림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영향까지 받고 있다. 야구단 결성 초기에 쇠락한 양반 가문 출신 남성 선수가 야구단과 관련해 설명하는 민정림에게 “여자 말고 남자 나오라고 하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런데도 민정림은 남성 인물을 포용하며, 그들의 내적 성장과 재생을 끌어낸다. 민정림의 이러한 면모는 상심의 나날을 보내던 송호창이 민정림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송호창이 사용한 암행어사 마패는 민정림이 조선의 마지막 암행어사였던 외삼촌에게서 얻어다 준 것이다. 마패는 조선의 선비 정신으로 제국주의 일본을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민정림은 외세 침략 및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투쟁한 끝에 승리의 주역이 됨으로써 시대의 질곡을 넘어선다.
그러한 점에서 민정림이 선수들과 똑같은 유니폼을 착용은 것은 의미가 크다. 유니폼은 남성/여성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영화 초반에 민정림은 신여성으로서 주로 밝고 활동적인 이미지의 양장을 입고 등장한다. 때로 여성적이면서 귀여운 이미지를 표출하기도 한다. 부드러운 느낌의 파스텔톤 색상과 레이스 장식 등을 통해 사랑스럽고 밝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민정림은 중반 이후 선수들과 함께 YMCA 야구단 유니폼을 함께 착용한다. 이 유니폼은 야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항일의 의미를 강조하고, 나아가 민정림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극복했음을 드러낸다. <YMCA 야구단>에서는 조선/일본, 양반/상놈, 남성/여성의 대립 구도가 두드러지는데, 민정림은 스포츠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모두 이겨낸다.
민정림은 고귀한 신분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민정림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해 가는 시대 환경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민중 영웅에 해당한다. 그런데 민정림은 스포츠를 통해 제국주의 일본과 투쟁하고, 이를 통해 항일 운동의 첨병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집단적, 민족적, 역사적 영웅의 성격을 확보한다. 또 남성 인물인 송호창의 구원자 혹은 정신적 스승의 역할까지 수행함으로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극복한다. 즉 민정림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라는 이중의 시대적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남성 인물의 재생과 부활을 끌어낸 주체적, 능동적, 진취적, 집단적, 민족적 여성 영웅이다. 그러한 점에서 <YMCA 야구단>의 민정림은 2000년대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힌 여성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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