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란 무엇일까? 아니,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지 안한지를 따지려고 던지는 광학적(혹은 과학적) 의혹이라기보다 홍상수 감독의 29번째 영화 <물 안에서>라는 영화를 보고 나면 어렵지 않게 포착되는 신화적(혹은 우화적) 의문에 더 가깝다.
한 가지 확실한 팩트는 <물 안에서>에서 그 의혹에 가까운 의문은 감각과 죽음을 뒤엉키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렌즈에 흡수된 과학적 빛이 결국 덩어리처럼 엉기듯 신화적 픽셀로 방출되다가 곧 암전된다. 이 영화의 정점은 바로 그 마지막 장면에서 발견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배타적 태도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인물 이야기다. 신석호, 하성국, 김승윤, 김소령, 거기에 김민희 배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얼굴을 이 영화에서 확인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김민희 배우는 목소리만 등장하고 심지어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잘 불리지도 않는다.
보통 영화에서 인물 이야기는 매번 중요한 테제를 이루지만 <물 안에서>는 인물들을 그런식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서 그 위로 부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어쩌면 하나의 작은 효과에 불과할지 모르나, 거시적으로 볼 때 영화 문법의 파괴 혹은 영화의 종언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하다면 심각한 문제로 비치기도 한다. 이쯤에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설명을 곁들이자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이때 초점은 말 그대로 렌즈의 초점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피사체 혹은 배경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소위 말해 ‘포커스가 날라갔’는데, 홍상수 감독의 그간의 영화적 행적을 통해 반추해보면 이 역시 어떤 의도를 내비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초점을 맞추지 않은 것은 하나의 상징적 제스처로서, 오히려 화면 너머에 있는 미지의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춘 표현일 뿐이라고. 그렇게 이 영화에서 초점은 보이는 모든 것의 경계를 덩어리처럼 뭉개놓는다. 그 와중에 그나마 명확하게 파악 가능한 것은 꿈처럼 희미한 인물들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서 어딘가에 찾아 왔다는 사실 뿐이다. (장소 역시 한국인이면 제주도로 알만한 정보를 꽤 발견할 수 있으나 외국 관객에게는 그저 이름없는 해변에 불과해 보일 것이다.)
이 영화를 기존의 영화를 다루듯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지역명도, 심지어 그들의 얼굴조차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서사, 즉 영화를 찍으러 왔다는 서사에는 오히려 지나치게 의존한다. 이런 서사의 모양새는 마치 유난히 뾰족하게 튀어나온 현실의 한 파편처럼 어떤 의도를 우리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사의 내용에 주목하지 말라’이다. 그래서 이 영화, <물 안에서>는 뾰족한 이야기의 두드러진 내용보다는 보여주는 ‘방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물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마치 사실주의 화풍에서 인상파로 넘어갔던 당대 화가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기만에서 벗어나서 자연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접하는 ‘감각’에 천착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홍상수의 이번 영화는 수 세기 전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내 안의 감각세계가 아닌 나의 바깥을 성찰하는 탐구 서사를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에 여전히 천착하되 그 대상만큼은 나와 다른 것,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것, 어쩌면 나의 바깥에 놓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초점은 내 바깥에 놓인 어떤 것에 정확하게 맞추려 했고 그 효과로써 흐린 화면, 경계가 뭉개진 초점이 나간 화면을 보여주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이번 홍상수 감독이 흐린 초점으로 대상을 보여주려는 ‘방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초점이 나간 화면은 초점이 맞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겨냥했기 때문에 나타난 효과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있을지 모를 ‘창의성’을 확인하려고 영화를 찍는다는 성모(신석호)의 고백이 한 차원 다르게 이해된다.
성모는 창의성이 자기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삶의 상실을,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 곧 성모가 바다, 아니 정확히는 뭉개진 수평선으로 사라져가는 장면은 왜 그렇게 연출되었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창의성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나의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을 덩어리진 픽셀로 만들어가는 영화 속 성모의 모습은 삶의 의미를 잃은 모습으로 뒤바뀐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바로 미지의 거기로 향하는 성모의 행보는 오로지 절망, 체념, 죽음으로만 명확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명확함은 뭉개진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영화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 수사(rhetoric)도 필요없는 나의 바깥에 놓인 대상으로의 걸음, 아니 어쩌면 수렴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방향을 아는 것처럼 걸어가는 무조건적인 반응 덕이다. 비록 물 안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으로 비치다가 급기야 죽음을 상징하는 모양새로 비칠지라도 우리는 오로지 어디론가 수렴되어 가야만 하는 결정불가한 운명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배경에 깔리는 화음이 뭉개진 음악소리가 오히려 그 장면에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홍상수는 이번 영화에서 나의 바깥에 놓인 무언가를 찾으려는 여정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있는지, 왜 찾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자기 고백적 성찰이 깃든 <물 안에서>의 마지막 바다(어쩌면 ‘물’ 그 자체일지 모르는) 장면은 방위가 설정된 환경과 방향이 결정된 생각에 완전히 찌든 우리에게, 그 상태로 정말 괜찮은지 오히려 되묻는 은유가 된다. 들뢰즈가 ‘액체적 지각’을 사유한 이유도 바로 그런 은유로서의 ‘물’이 영화를 통해서 가장 뛰어나게 재현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 않았나.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 영화의 주제는 보다 명확해 질 수 있다.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은 뭉개져야만 하고, 그것이 가능한 ‘곳’은 바로 ‘나의 바깥’에 있으며 우리는 그 곳으로 수렴되어 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고. 그래, 여기에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은 결국 그 바깥을 향하는 초점뿐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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