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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고뇌하는, 세상의 파괴자 <오펜하이머>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고뇌하는, 세상의 파괴자 <오펜하이머>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2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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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했던 인물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잘 찍은 전기영화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허구의 인물이라면 감독이 추구하는 의도에 따라 이리저리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이미 만들어진 인물의 경우, 특히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한 인물이라면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각색에는 한계가 있다. 또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어서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인물이 천재라면, 그 내면을 면밀하게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복잡한 인물,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 인물’에게 끌린다고 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러한 사실을 영화로 풀어내려고 시도할 때 이야기가 더 풍성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드라마틱하게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천재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이하 ‘오피’로 표기)를 다룬 <오펜하이머>를 통해 전기영화에 도전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놀란은 여기서 아마도 오피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를 중심으로 세 개의 시간대를 오가는 구성을 했다. 시간의 전개가 뒤죽박죽되는 구성은 <메멘토>, <덩케르크>, <테넷> 같은 놀란의 영화에서 이미 시도한 것이다. 놀란은 이러한 구성 자체에서 영화마다 의도한 목표를 구현하려고 해왔다.

<오펜하이머>에서 세 개의 시간을 교차편집 함으로써 얻은 효과를 살펴보자. 먼저 이 영화가 시간순으로 전개되었다면, 학창 시절부터 맨해튼 계획까지 오피의 천재성과 그에 따른 성과가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영광의 시기를 거쳐 냉전 시대와 함께 불어닥친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리며 급격히 추락하는 결말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국민 영웅에서 국가 반역자로 전락한 천재의 실화에서 극적인 측면이 더욱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영화가 친절하지 않은 영화라는 비난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오피가 영광의 시기로 나아가는 과정이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교차편집된다. 따라서 오피뿐만 아니라 오피를 알았거나 함께 일했던 이들의 진술로부터 그 시기 오피의 생각과 행적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이를 통해 놀란은 오피가 원자폭탄 제조에 앞장섰으나 수소폭탄 개발에는 반대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행각을 부각하면서 과학자의 고뇌와 선택의 딜레마에 빠진 고통을 보여주려고 한다.

 

영광의 순간
영광의 순간

놀란이 연출한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고담시의 정의를 구현할 검사 하비와 사랑하는 연인 레이첼 가운데 누구를 살릴 것인지, 선택하도록 몰고 간다. 이러한 선택의 딜레마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을 해도, 그 결정에 대한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다. <오펜하이머>에서, 오피는 핵무기를 만들 것인가를 두고 피할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그는 핵폭탄이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일으켜 지구 전체가 멸망할 가능성에 경악했으며, 그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는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치가 먼저 핵폭탄을 만들도록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에 따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하는 핵무기 개발의 책임자가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라비 박사가 오피에게 건네는 말이다. “3백 년 동안 과학자들이 피땀 흘려 이뤄낸 성과를 고작 인간을 살상하는 무기를 만드는 데 모조리 소비할 수는 없다.”

결국 오피는 핵무기 제작에 성공하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일본이 바로 항복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손에 너무나 많은 사람의 피가 묻었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영광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도 한편으로는 괴로워한다. 따라서 그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될 가공할 무기를 더 이상 제조하지도 개발하지도 말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냉전 시대와 매카시즘이 횡행하는 미국 사회의 파시즘의 분위기 속에서, 천재 과학자의 양심의 목소리는 소련을 옹호하는 생각으로 왜곡되고, 오피는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된다.

 

천재 과학자의 몰락
천재 과학자의 몰락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개의 시간대에서,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원자력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로스가 상무부 장관 후보로 열린 청문회이다. 이 청문회 과정은 다른 두 시간대와 교차편집으로 진행되면서, ‘오피를 몰락시킨 주범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만들어낸다. 결국 밝혀지는 진실은 스트로스가 오피를 몰락시킨 주범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설정은 스트로스가 오피의 안타고니스트가 되는 원인이다. 1947년, 오피와 스트로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스트로스는 자신을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때 오피는 ‘우리 아버지가 자수성가했다’고 말한다. 또 스트로스가 “물리학 공부를 하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신발 판매를 선택했다”고 할 때, 오피는 아마도 무심코 “한때 ‘초라한’ 신발 판매원이었군요”라고 답한다. 스트로스는 불쾌감을 애써 감추며, “그냥 신발 판매원이었다”고 정정한다. 성공한 부르주아의 맏아들인 오피는 날 때부터 금수저였으며, 머리는 천재이고, 외모도 훤칠한 미남이었다. 따라서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특히 남성들)에게 즉각적으로 엄청난 시기심과 열등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춘 잘난 인간이기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말을 하거나 사교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그를 향한 시기심은 더욱 증폭되고 불필요한 오해를 살 확률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스트로스는 오피를 만나자마자 시기심에 더한 악감정이 쌓이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오피의 행동거지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피해의식에까지 사로잡혀 복수를 꿈꾸게 된다. 아마도 스트로스는 모차르트를 파괴하고 싶어 했던 살리에리처럼, 세상이 추앙하는 완벽한 천재를 무너뜨리는 데서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첫 만남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첫 만남

그러나 오피를 둘러싼 비극을 스트로스의 악감정에서 촉발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건 너무 순진한 관점이며, 2차대전 이후, 미국 사회의 지배층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라는 구조적인 원인을 등한시하는 태도이다. 만일 스트로스가 오피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면, 그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지점이 이 영화 또는 놀란 영화의 한계이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들의 등장은 세상을 바꾸었고, 20세기를 ‘과학의 시대’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과학의 위력은 여전하다. 어떤 정치적 결정 또는 사회적 의견을 합리화하려 할 때, 흔히 ‘과학’이라는 말을 앞세우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주장으로 다른 의견을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믿을만한 지식인가? 또는 과학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나 주관적인 관점을 완전히 배제하고 과학적 지식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후쿠시마 핵 오염수가 바다에 방출될 경우,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안전하다고 찬성하는 쪽과 재앙이라고 반대하는 쪽 모두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련된 과학자들은 모두 오로지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인간이 처음 원전을 건설할 당시에는 원전으로 빚어질 문제 따위는 과학의 발전을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후쿠시마 원전 사태 같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오펜하이머>에서 자신이 실현하려는 일의 결과를 놓고 번민하는 과학자 오피의 고뇌는 좀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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