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생의 여정 가운데 한 번쯤은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방황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게 되곤 한다. 이러한 성찰이 바로 마음이 부유할 때는 잘 모르지만 마음이 가난해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질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중 하나다. 그래서 내려놓음은 곧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는 바로 이러한 성장과 같은 것들에 대해 다룬다. 즉,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우리가 인생에서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듣기만 해도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이 따뜻한 이야기는 맡기만 해도 현기증 나는 알콜 냄새 가득한 어느 술집 한 구석에서 시작된다.
박봉에 일복만 터진 영화사 제작PD 찬실(강말금). 어느 날 자신이 담당하는 작품의 감독이 술자리에서 거짓말처럼 급사하고, 그렇게 찬실은 하루 아침에 일도, 집도, 남자도 없는 박복한 '여자'가 된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건만 모아 놓은 돈은 없고, 당장의 사정에 맞춰 이사 간 곳은 산 중턱의 한숨 나오는 어느 달동네. 찬실은 자신의 신세가 마치 감나무 가지에 외로이 딱 하나 남은 감처럼 느껴진다. 모든 복이 떨어져 나간 것만 같은 공허한 나날의 연속 속에, 집주인 할머니(윤여정)만큼은 찬실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심지어 어느 날 밤에는 찬실의 집으로 장국영(김영민)이 걸어 들어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과연 이것은 복이 터지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망조가 든 증거일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영화적 미덕을 전달하는 방식은 익숙한 것에서 느끼는 불편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친숙한 것들이 때로 낯설고도 두려워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겪곤 한다. 언캐니(uncanny)라 부르는 이러한 '낯익은 두려움' 혹은 '두려운 낯섦'은 영화에서는 주로 공포 장르에서 인간의 업악된 감정으로 재현되어 왔다. 이렇게 언캐니가 유독 특정 장르에서 클리셰처럼 반복적으로 활용되다 보니 그것은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채 은막 너머에만 존재하는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반복되어 익숙하고, 익숙해서 다소 지루하기도 한 일상을 살지만, 그 미래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사실은 하루하루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속 현대인에게 삶이란 매 순간이 불안하고도 두렵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일상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떠올린다면, 언캐니는 공포 영화 속에서 환상처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장르 속에 갇힌 채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심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눈을 뜨면 맞딱뜨릴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인 것.
이러한 관점에서 김초희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한 여자가 경험한 언캐니를 보여주지만 그 방식은 오히려 유쾌하고 산뜻하다. 영화 속에서 '찬실'은 좋아서 선택했고, 그 덕분에 행복했으며, 그래서 삶을 지탱해 주던 일 때문에 잠시 길을 잃는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익숙했던 공간뿐만 아니라 나 자신마저도 낯설게 느껴지는 그 두려움의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방황이다. 그렇게 눈 앞에 펼쳐진 익숙하고도 낯선 두려움의 현실 속에서 '찬실'은 길을 잃고 헤매지만 역설적이게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즉, '찬실' 스스로를 되찾고 나서야 다시 자신이 가고 있던 본래의 길로 복귀하게 된다.
'찬실'은 이 영화의 주제가 가사처럼 "돈도 집도 없고, 남자도 새끼도 없으며, 사랑도 청춘도 다 가 버린" 40대 싱글 여성이며, 이러한 한국 사회의 통념은 일종의 언캐니를 유발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수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난 뒤 '찬실'이 마주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되고 싶은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국영은 찬실이 잊고 있던 첫 마음을 일깨워 주는 무의식 속의 자아처럼 작용한다.
이렇게 '찬실'은 현실 속에 펼쳐진 언캐니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영화 속 대사처럼 '이제 할 것 많은' 삶으로 씩씩하게 다시 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40대 싱글 여성’이라는 '찬실'을 둘러싼 강요된 이미지는 더이상 불필요해진다. 이러한 기본 서사 안에서 습한 사랑의 굴레와 눅눅한 가족애를 탈피한 '찬실'에 대한 동일시는 젠더 중립적이다. 덕분에 영화적 주제는 더욱 깊어졌고, 그 공감대는 보다 확장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서사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찬실'로 분한 배우 강말금이다. 과잉 없이 시종 일관적인 강말금의 진심어린 시선과 몸짓 그리고 표정은 영화 전반에 섬세하고도 영리하게 배치된 서브텍스트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준다. 또 사투리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안정적인 연기톤은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찬실'의 영화 같은 삶을 스크린이라는 장벽을 뚫고 실제처럼 진솔하게 재현하는 데 일조한다. 허구의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찬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관객들에게 진실하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인간 강수혜가 배우 강말금으로서 캐릭터의 사실성을 위해 얼마나 세심히 준비하고 노력했을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간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대학에서 강의하며 담화분석, K-콘텐츠와 대중문화, 문학치료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계명대에서 국문학, 영문학을 복수전공하고 연세대 국문과에서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영상작가교육원을 수료한 뒤 제1회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부문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기독교 영화비평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미국 에모리대 펠로우십, 대만 국립정치대와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로 지내다 2019년 귀국 후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와 한국어교육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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